소설리스트

37화 (37/110)

나는 1학년 교실 창문을 빼꼼 들여다보았다. 다른 학년 교실에 와 있자니 조금 뻘쭘했다.

주중에 찾아온다는 걸 깜빡해서 나가기 전에 잠깐 얼굴이나 비추려 했는데, 생각보다 그게 쉽지 않았다. 기숙사나 연무장에 있을 줄 알았지 교실에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아니 얘는 왜 굳이 금쪽같은 주말에 교실에 있는 거래? 공부에 관심도 없으면서.

아, 친구들이랑 노는 건가. 아무래도 친구 수가 한 자릿수를 넘어가면 다 같이 외출하기가 좀 그렇지, 응.

친구 많은 놈, 부럽다.

속으로 투덜거리며 조금 기다리고 있으니 붉은 머리통이 보였다.

“아르한아.”

나는 놀란 듯한 표정의 아르한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진짜 왔네.”

“응, 보러 오겠다고 했잖아.”

시험 끝나서 홀가분하고, 이따 약속도 잡혀 있어 기분도 좋았기에 나는 연신 웃었다.

“내내 못 왔잖아. 얼굴이라도 비추려고.”

한 말을 못 지킨 내 잘못도 있고, 동생 같은 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걸 보니 기분이 나아져 나는 빙긋 웃었다.

그때 교실 안에서 장난스러운 야유와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애인이야?”

“아, 진짜…… 아니라고.”

아르한이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그를 놀리는 동급생들에게 무어라 험한 말을 뇌까렸다.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귀가 언뜻 붉어져 있었다. 나름대로 소리를 줄인 것 같은데 다 들렸다.

“친구들이야? 와, 너 친구 많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교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음?”

그런 내 주의를 끌 듯 아르한이 나를 툭툭 건드렸다. 그리고 대뜸 ‘이십’이라고 속삭였다.

뭐지?

어리둥절한 얼굴로 아르한을 바라보자, 그가 민망한 얼굴로 슬쩍 시선을 피했다.

“이번 내 시험 등수가 그거라고.”

“야, 너 대단하네!”

그의 말을 들은 나는 아르한의 등을 팡팡 두드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지난 시험 성적이 어땠는지 정확하게는 알지 못했지만, 객관적으로 봐도 좋은 성적이었다.

“누나한테 제일 먼저 말해 주고 싶었어.”

아르한이 수줍게 눈을 깜빡거렸다.

“칭찬해 줄 것 같았으니까.”

“귀여운 자식. 고생했어, 이제 실컷 놀아!”

나는 낄낄 웃으며 아르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나는 약속이 있어서 이만.”

문득 시계를 보니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 거의 다 되어갔다.

“그러고 보니까 사복 입었네.”

“응, 어때?”

한 바퀴 돌아 보이자 초록색 드레스 자락이 팔랑였다.

“잘 어울려.”

벽에 기대선 아르한이 그윽한 눈빛을 하고 대답했다.

“고마워, 나 가 볼게! 친구들이랑 재밌게 놀고.”

“응, 안녕.”

아르한에게 인사를 건넨 나는 서둘러 약속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구두가 바닥에 부딪혀 탁탁 소리를 냈다.

* * *

가게들이 모여 있는 중심가는 아카데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오랜만에 사복을 입은 나는 친구들과 시내로 나갔다.

“우리 사탕 사러 안 갈래?”

스타트로 넷이서 케이크 한 판을 먹어치운 후, 나는 새로 생긴 사탕 가게를 가리키며 눈을 반짝였다.

규모도 크고 인테리어도 아기자기하니 예뻐서 얼마 전부터 학생들 사이에서 유명해진 곳이었다.

친구들을 끌고 간 그곳에서 나는 익숙한 사탕을 발견했다.

“어.”

전에 글로리아 선배가 줬던 캐러멜이었다. 엄청 맛있었는데!

나는 신난 얼굴로 실컷 사탕을 쓸어 담았다. 학교 매점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종류가 많아서 엄청 신이 났다.

“장 보냐?”

내 손에 들린 봉투의 크기를 본 도라가 핀잔을 주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히히, 단 거 좋아.

금방 계산을 마치고 맬러리 옆에서 막대 사탕을 구경하고 있는데, 계산대 옆에 익숙한 백금발이 보였다. 그 옆에 있는 은발과 연분홍색 머리도.

선배들도 놀러 나왔구나. 플로라 선배, 기숙사에서 복습할 거라더니 나오셨네. 그래, 역시 주말에 공부만 하긴 아깝지. 어라, 근데 그럼 사다 드리기로 한 캐러멜은 어쩌지?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용기를 내어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선배.”

“오, 케이트!”

글로리아 선배가 무표정이던 얼굴 가득 화색을 띠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캐러멜 사러 왔어?”

“네.”

“아우, 귀여워.”

작게 중얼거린 그녀가 캐러멜 몇 봉지를 계산하고 내게 쥐여 주었다.

나는 곤란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아, 정말 괜찮은데…….”

“아냐, 내가 사 주는 거야. 맛있게 먹어.”

“뭐야, 케이트야? 안녕!”

플로라 선배 뒤로 노아 선배도 보였다, 반가운 얼굴이었다.

“안녕.”

“안녕하세요.”

노아 선배는 글로리아 선배가 내게 준 캐러멜을 보고 아차 싶은 표정을 했다. 나는 선배를 잠시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아, 나도 뭐 하나 사 줄까?”

플로라 선배가 지갑을 꺼내 들며 기운차게 물었다.

“아뇨, 괜찮아요. 저 가 봐야 해서…….”

“아, 친구들이랑 같이 왔구나. 우리가 너무 잡아 두고 있었네.”

사탕 코너에 몰려 있는 친구들을 본 플로라 선배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라며 손을 내저은 나는 인사를 몇 번 하고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맬러리가 놀랍다는 얼굴로 내게 물었다.

“뭐야, 글로리아 선배랑 그새 친해진 거야?”

“응, 뭐……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더라고.”

나는 그녀에게 캐러멜을 나눠 주며 얼버무렸다.

그렇게 두어 개 까먹으며 노닥거리다 보니 제법 먼 데까지 왔다.

내 눈치를 살피던 친구들이 갑자기 내 팔을 잡고 어딘가로 이끌었다.

우악스러운 손길에 빨고 있던 막대 사탕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영문을 모른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력하게 끌려가기만 했다.

“엥?”

종착지는 한 카페 안이었다. 그것도 어둡게 커튼이 쳐진 자리.

“야, 케이트. 있잖아. 우리가 궁금한 게 있는데…….”

후다닥 내 음료까지 주문을 끝낸 친구들이 자기들끼리 시선을 몇 번 교환하더니, 도라가 대표로 입을 열었다.

“너 노아 선배랑 뭐가 어떻게 되어 가는 거야? 진짜 차인 거 맞아? 혹시 너 갖고 노는 거 아냐?”

“아…….”

분명 좋은 친구들이었지만 속사정까지 전부 말해 줄 수는 없었다. 믿기 어려울 테니까.

“걱정해 줘서 고마워. 근데 별거 아냐. 진짜 괜찮아.”

결국 나는 머리를 긁으며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내 욕심이야. 안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옆에 있고 싶어져. 워낙 좋은 사람이고 오래 좋아했으니까.”

나는 코코아를 홀짝이며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편한 애들과 있어서인지 이상하게도 말이 술술 잘 나왔다.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만약 노아 선배가 나를 가지고 노는 거라 해도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뭐 평생 볼 사이도 아닌데, 언젠가는 괜찮아지겠지.”

차분한 얼굴로 컵을 내려놓고 고개를 든 내가 멈칫 몸을 굳혔다.

“……뭐야, 그 표정?”

“너…….”

에코가 눈썹을 내려뜨리고 입을 틀어막았다. 맬러리와 도라의 표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케이트…… 너 진짜 속도 없다.”

“왜 이래, 단체로 돌았어?”

나를 무슨 비련의 여주인공 보듯 하는 시선에, 나는 옅게 몸서리쳤다. 부담스러워 죽을 것 같았다.

“이리 와 봐, 하나 더 시켜.”

“아 괜찮다고.”

나는 질린 얼굴로 맬러리가 들이민 메뉴판을 거절했다.

“진짜 괜찮은 거 맞지?”

“그렇대도.”

좋아하는 사람이 그렇게 들이대는데 마음이 동하지 않을 리가 없고, 그럴 때마다 마음을 다잡느라 힘들긴 하지만 죽을 정도로 슬프거나 하진 않았다.

아직 감정을 완벽하게 정리한 건 아니지만 체념 정도는 끝냈으니까.

나중에 플로라 선배랑 노아 선배가 같이 있는 걸 보더라도 울면서 뛰쳐나가지는 않을 정도?

“그리고 나, 나 좀 즐기고 있어.”

여전히 무거운 분위기에 내가 떠듬떠듬 내뱉자 친구들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래, 뭐 네 일이니까. 나중에 가서 펑펑 울면 그땐 안 받아 준다.”

주문한 케이크가 나오자 그걸 내 쪽으로 밀어 주며 에코가 말했다.

나는 케이크를 입에 쑤셔 넣고 우물거렸다.

“응…….”

* * *

“아으, 배불러.”

“그러게, 너 너무 많이 먹었어.”

나는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늘어진 도라에게 핀잔을 주었다.

옷을 갈아입고 사 온 사탕들도 대충 정리하고 침대에 누워 책을 읽고 있는데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내가 나갈게.”

완전히 뻗은 도라 대신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비척비척 걸어가 문을 열었다.

꽤 늦은 시간인데, 누구지?

“……선배?”

문 앞엔 노아 선배가 서 있었다.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지만 견딜 만했다.

“어쩐 일이세요?”

다만 선배의 모습에 반사적으로 머리를 정리하는 내 모습이 조금 씁쓸했다.

“저…… 이거.”

잠시 머뭇거리던 선배가 내민 것은 거대한 캐러멜 통이었다. 과연 다 먹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컸다.

“받아 주면 기쁠 거야.”

“아…….”

내가 어쩔 줄 몰라 가만히 서 있자 노아 선배가 수줍게 덧붙였다.

“글로리아가 준 것보다, 큰 거야.”

귀, 귀엽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곤 밝게 웃으며 통을 받았다.

“네, 엄청 크네요. 잘 먹을게요.”

직접 들어 보니 무게도 제법 상당했다.

슬쩍 흔들어 보니 안에 든 캐러멜끼리 부딪혀 알찬 소리가 났다.

꽤 비쌀 것 같은데, 이런 걸 그냥 받아도 되나?

“잠깐만요.”

잠시 죄책감에 시달리던 나는 주머니를 뒤져 아까 산 사탕 세트에 들어 있던 박하사탕을 싹싹 모았다.

“앗.”

손바닥에 놓아 주다 손가락이 닿았다. 닿은 부분이 찌릿 울리는 것 같아 두 손을 등 뒤로 감췄다.

“아, 고마워.”

사탕을 받은 선배가 살풋 웃었다.

언제 봐도 정말 꽃사슴처럼 생겼다. 머리를 풀어서 그런가, 어두운 복도를 배경으로 밤바람에 은발이 흩날리는 모습이 숨 막힐 정도로 몽환적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어…… 늦었는데 이만 들어가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 응.”

한 손에 내가 준 사탕을 꼭 쥔 노아 선배가 몸을 돌리려다 말고 인사를 건넸다.

“잘 자.”

“네, 선배도요.”

짧게 인사를 나눈 후 캐러멜을 들고 방으로 돌아가자,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도라가 궁금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뭐야? 누구였어?”

나는 캐러멜 통을 흔들며 대답했다.

“노아 선배가 줬어.”

“잠깐, 너…….”

“됐어, 그냥 깊게 생각 안 하기로 했어. 먹어, 먹어.”

나는 건조하게 웃으며 의아한 얼굴의 도라에게 캐러멜 몇 개를 던져 주었다.

그러곤 침대에 누워 멍한 얼굴로 내 입에도 몇 개를 까서 넣었다.

달았다. 혀가 아릴 정도로 단데, 이상하게 하나도 질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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