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110)

외전 - 글로리아 루피너스 (3)

“리아, 리아. 나랑 놀자.”

몽실몽실한 분홍 머리카락의 소녀가 내 팔에 매달렸다.

“이런, 플로라. 드레스 자락이 구겨졌잖니.”

“아이, 나도 참.”

내가 짐짓 엄한 투로 훈계하자 소녀는 아차 싶은 얼굴로 옷자락을 정리했다.

“숙녀답지 못해.”

우린 동시에 그렇게 말하고 깔깔 웃었다.

같은 예법서로 공부한 탓에 가능한 장난이었다.

이 애는 플로라, 원작 여주인공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 친구죠.

“뭐 어때. 치마야 뒤집어지게 두라지. 식당에 케이크 먹으러 갈래?”

“응응.”

플로라는 생글생글 웃으며 내 팔을 꼭 껴안았다. 일 년 전만 해도 절대 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

열한 살, 나는 완벽한 요조숙녀였던 플로라를 조금 왈가닥인 요조숙녀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코르셋 벗어던지고 맨발로 뛰어다니고 몰래 담 넘어 놀러 다니고.

원작에서도 착하고 다정한 성격인 데다 외동인 그녀는 나를 언니처럼 잘 따랐고 나도 플로라를 동생처럼 귀여워했다.

“노아 너도 이리 와서 놀자!”

플로라가 구석에 앉아 책을 뒤적거리는 노아스에게 손짓했다.

나는 바닥에 꽂은 목검에 몸을 기대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노아스와 나와 플로라. 우리는 친구라고 할 수 있었다. 노아스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어떻게 된 거냐면, 혼담은 깨졌어도 두 가문 간의 교류는 남아 있던 터라 어쩔 수 없이 노아스의 얼굴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여주인공의 가문인 아이비 백작가와도 교류가 생긴 탓에 붙임성 좋고 착한 플로라와 나는 금방 친해졌고,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셋이 놀게 되었다.

새 친구를 소개해 주겠다는 플로라의 손에 이끌려 간 곳에서 노아스의 얼굴을 봤을 때, 우리 둘의 표정이 동시에 썩어 들어갔던 것이 기억난다.

첫인상을 망치다시피 했으니 당연하지.

“얼른 와.”

플로라가 노아스를 끌고 오자 나는 그녀 몰래 혀를 메롱 내밀었다.

“쯧.”

아니, 저놈이.

저 한심하다는 표정이 사람을 정말 열받게 한다는 걸 알까? 알고 저러는 걸까?

아마 그날도 둘이 기 싸움이나 했던 걸로 기억한다. 플로라가 사이에서 중재하느라 고생했지.

꼭 원작대로 흘러가라는 법은 없지만 저런 놈이 연애를 한다니…… 놀랍군.

그렇게 얼굴 본 햇수로 따지면 8년이니, 나름 소꿉친구라고 할 수 있지만 우린 사이가 안 좋았다.

나는 그놈을 재수 없는 마법쟁이 샌님 정도로 여겼고, 그놈은 나를 귀족으로서의 품위는 개나 준 미친 망나니로 생각했다.

하여튼 그렇게 같이 싸우고 놀고 공부하다가, 열여섯 살에 셋이 나란히 합격해서 제국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그리고 조금 실망했다.

넘쳐 나는 돈으로 플렉스를 하는 것도 아니고, 고딩 때로 돌아간 것처럼 중간 기말 나눠서 시험이나 보고 있다니.

다른 소설들 보면 파티 참석해서 춤추고 놀고 하던데 실상은 좀 달랐다.

건국제 날은 시험 기간이고 황궁 파티는 그렇게 자주 열리지도 않았다.

내가 왕년에 미드 좀 봤다. 원래 청춘 학원물엔 프롬 파티 같은 거 있어야 하는데, 여긴 그런 것도 없었다. 심지어 장르가 로맨스 소설인데!

이 좁은 식견으로 감히 교장 선생님의 깊은 생각을 들여다보자면, 그럴 시간에 공부나 하라는 게 아닐까 싶다. 작가 한국인인 티 좀 그만 냈으면.

드래곤 날아다니고 마법 쓰고 검 휘두르는 판타지 세계관인데 그깟 파티 하나 넣어 주는 게 뭐가 그리 어렵냔 말이다.

내 청춘 하이틴물 어디 있어? 럭비부 부장 킹카 내놔.

기껏 환생해서 한다는 게 학창시절 리플레이라니 조금 억울했고 1년간은 적응하느라 정신없었지만 나름 잘 지나갔다.

허구한 날 고함 소리가 들리는 후작저보다야 훨씬 나았다.

2학년으로 진급을 하고 이제는 조금 편해진 상태로 복도를 지나던 어느 날이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슬슬 나의 그녀가 등장할 때가 됐는데.

센티한 얼굴로 매점에서 산 빵을 우물거리다 목이 막혀 켁켁거리던 중이었다.

갓 입학한 1학년으로 보이는 여학생이 내 앞을 기웃거렸다. 양손으로 책 몇 권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창밖에서 불어온 봄바람에 웨이브 진 노란색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이곳 지리에 익숙지 않은 듯 녹색 눈동자가 아카데미 복도 곳곳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참 귀엽게 생긴 애네, 생각이 드는 동시에 나는 여학생의 노란 명찰에 수놓인 이름을 보게 되었다.

케이틀린 블레어.

“!”

목을 막은 빵을 억지로 삼킨 나는 거칠게 입가를 문질렀다.

케이트다!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

어떡해. 입 안에 넣고 와랄랄라, 하고 싶게 생겼어. 어떻게 저리 솜털이 보송보송하고 귀여운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을까.

엑스트라라 일러스트가 없어서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는데, 저렇게 예쁜 눈을 가지고 있었구나. 제법 귀염상이라는 묘사만 띡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처음으로 최애를 실물로 영접한 나는 17년 만에 사랑을 알아 버린 AI 같은 모습으로 복도에 서 있었다.

봄이었다.

* * *

마음 같아서는 당장 케이트에게 친한 척을 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신학교 교환 학생 자리를 두고 플로라와 경쟁 중이었고, 그러려면 중간고사를 무지하게 잘 봐야 했다.

결국 나는 피나는 노력 끝에 중간고사에서 노아스와 공동 수석을 하는 쾌거를 이루었고, 내 예쁜이를 두고 유학을 가게 되었다.

로웰 왕국의 신학교는 아카데미보다 훨씬 분위기가 엄숙했다.

복도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도 없었고 서로에게 존댓말을 썼으며 무엇보다 매점이…… 매점이 없었다. 울고 싶었다.

그에 나는 강제로 우아한 후작 영애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신관과 성기사를 주로 배출하는 교육 기관이다 보니 검술 수업의 수준이 확실히 높았다.

나는 신학교에서 어떻게 오러를 다루는지도 익혔고, 슬슬 내 손발처럼 다룰 수 있게 되었을 때 1년간의 유학이 끝났다.

* * *

1년 만에 돌아온 아카데미는 여전했다.

못 보던 얼굴이 많이 생기긴 했지만 여전히 따사롭고 활기차고 밝았다.

떠났던 계절과 돌아온 계절이 같아서인지 풍경은 정말로 달라진 게 없었다.

돌아오자마자 넥타이를 안 맸다는 이유로 사감 선생님께 한소리 듣기는 했지만.

분명히 노아스 놈의 짓일 것이다.

망할 새끼, 오랜만이라고 인사는 못할망정 내게 엿을 줘?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는데 어디선가 새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아!”

“어이쿠.”

나는 달려오다 관성에 의해 고꾸라지려는 플로라의 허리를 잡아채고 능글거렸다.

“이런, 복도에서 품위 없이 뛰어다니다니. 정말 숙녀답지 못한걸요.”

“왜 이래, 신학교 가더니 요조숙녀가 된 거야?”

플로라가 입가를 가리고 키득거렸다.

“보고 싶었어.”

우린 마주 웃으며 포옹을 했다.

내 등을 토닥거리던 플로라가 고개를 돌리더니 말했다.

“아이, 노아. 이리 와서 인사 좀 해.”

깜짝이야, 언제부터 있었어?

나는 흠칫 놀라며 플로라를 안은 팔을 풀었다.

“안녕.”

“…….”

간결하다 못해 싸가지 없는 인사였다. 나는 그래도 픽 웃으며 녀석의 어깨동무를 했다.

“그래, 나 없는 새 외롭지는 않았고?”

“별로.”

“쯧, 정 없는 놈.”

나는 플로라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환하게 웃었다.

“한다던 독서 동아리는 잘 되어가고?”

“으응, 다행히. 케이트라고 착한 후배가 하나 있어.”

플로라가 제법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있잖아, 플로라.”

가만히 서서 볼을 톡톡 두드리던 나는 생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도 거기 들어갈래.”

* * *

최애를 영접한 첫 동아리 시간이 끝난 후,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허망한 기분으로 기숙사로 돌아왔다.

케이트는, 케이트는 나를 무서워했다.

왜, 왜 날 피하는 거지, 아기 고양이?

친히 그런 놈이랑은 안 어울린다고 충고까지 해 줬는데.

서러운 기분에 사탕을 입에 넣자 인공적인 딸기맛이 확 풍겨 왔다. 케이트에게 줬던 사탕과 같은 상표였다.

이딴 걸 맛있다고 그렇게 귀엽게 옴뇸뇸 먹고 있었다니, 당장 후작저 디저트를 잔뜩 먹여 주고 싶다.

그러니까 우리 귀여운 베이비, 언니 집에 갈래?

아니, 이게 아니지.

“내가 좀 무섭게 생겼나?”

나는 시무룩해져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예쁘긴 하지만 조금 기 세고 앙칼져 보이는 여자애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분명 시무룩……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는데 곧 누구 하나 족칠 것같이 살벌해 보였다.

“휴우.”

내가 그동안 너무 막 살았나? 내 평판이 안 좋나?

“아닐 텐데.”

어렸을 때면 몰라도 아카데미에서만큼은 사고 친 적이 없었다. 적을 만든 적도 없고, 심지어 원작의 글로리아와 달리 뒤에서 누굴 괴롭히지도 않았는데.

그런데 날 왜 그렇게 피하지.

“이-상하네.”

나는 침대에 누워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나는 굴하지 않고 케이트와 친해지려 노력했다. 하지만 족족 실패였다. 케이트는 날 무서워하기만 했다. 그것도 엄청 귀엽긴 했지만.

보니까 노아스에게 마음이 조금 있는 것 같던데. 내가 노아스보다 못하다니. 분하다.

하루는 검술 수업이 끝난 후 목검을 들고 복도를 걷다 노아스와 케이트가 함께 있는 걸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뭐 그러려니 했는데 생각보다 대화가 길게 이어지는 것 아닌가.

기둥 뒤에서 둘의 대화를 듣다가 언뜻 노아스의 얼굴을 보게 된 나는 경악하며 입가를 가렸다. 하마터면 그대로 고꾸라질 뻔했다.

으악 미친, 너 누구세요.

맹세코 8년 동안 노아스의 저런 표정은 처음 보았다.

하다못해 플로라와 있을 때도 저런 얼굴은 한 적이 없었다.

아니, 저 표정은 아예 결이 달랐다.

붉어진 뺨이며 떨리는 속눈썹, 어쩔 줄 모르는 시선은 아무리 봐도 사랑에 빠진 사람의 그것이었다.

뭐야, 저 멜로 눈깔은?

그뿐인가, 조금 자극해 본 걸로 엄청 째려보기나 하고.

확실하다. 노아스 유리엘은 케이틀린 블레어에게 푹 빠져 있다.

그리고 케이틀린은 그걸 모른다.

“맙소사.”

나는 이마를 탁 짚으며 실소를 흘렸다.

이 무슨 시트콤 같은 상황이람.

원작이야 신경 안 쓴다. 이미 날아간 지 오래니까.

문제는 저 둘이 서로 단단한 착각에 빠져 있는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케이트는 온갖 플러팅을 받으면서도 어째서인지 해탈한 얼굴이었고, 노아스는 연신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우리 예쁜이가 눈치를 팔아먹었다니.

내 소꿉 웬수가 저런 빙구였다니.

환장스러운 상황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나는 비음을 흘리며 머리카락을 배배 꼬았다.

“흐응, 재밌어 보이니…….”

일단은 지켜보기로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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