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글로리아 루피너스 (2)
나는 지금까지 귀족 영애는 돈 많은 백수인 줄로만 알았다.
예쁜 드레스 입고 호호 웃으며 부채나 부치고, 가끔 티 파티에나 참석해서 맛있는 디저트를 먹는 한가하고 잉여로운 삶.
그게 내 앞에 펼쳐져 있을 거라 기대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고위 귀족가의 영애는 정말 극한 직업이었다.
적어도 아홉 살 때까지는 여주, 남주와 만날 새도 없이 토 나오도록 공부만 했다.
게다가 나는 차기 가주이기까지 했으니 기본적인 예법뿐만 아니라 온갖 이론과 다른 가문의 이야기까지도 조그만 머리통에 채워 넣어야만 했다.
심지어 내 아버지는 으레 소설에서 나오는 잘생긴 딸 바보가 아닌 꼰대였고 예쁜 드레스를 입기 위해 차야 하는 코르셋은 고문 기구였다.
어린애 삶이 이 지경이니 글로리아의 성격이 삐뚤어진 게 이해가 갔다.
이런 건…… 난 이런 걸 원한 게 아니었다. 적어도 그동안 숱하게 읽었던 환생 로판에는 이런 내용이 없었다. 거하게 속은 기분이었다.
아, 편하게 살고 싶다. 고위 귀족 말고 적당히 하급 귀족으로 태어났다면 좋았을걸.
하루는 아버지가 지켜보는 앞에서 전날 배운 내용 시험을 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보통 빙의한 여주인공의 아빠는 딸 바보 속성이 있지 않나? 막 애교 떨면 좋아 죽고?
그래, 내가 한번 저놈의 딸 바보 기질을 일깨워 주는 거야.
그래서 나는 들고 있던 펜을 놓고 혀 짧은 소리를 냈다.
“이잉, 파파. 리아는 오늘 공부하기 시져요.”
그랬더니 아비라는 놈이 나를 미쳤냐는 눈으로 보는 게 아닌가.
그 싸늘한 시선이 아직도 뇌리에 박혀 있다.
그래도 자기 딸인데 너무한 거 아니냐. 아무리 우리가 살가운 부녀는 아니라고 해도.
아버지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하고서 그럴 정신 있으면 공부나 더 하라며 숙제를 더 내줬다.
이게 아닌데.
그날 나는 후작가의 가계도를 서른 번 베껴 쓰며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생각해 보면 그땐 왜 그런 생각을 했나 몰라. 공부가 힘들어서 미쳤나?
하여튼 내 목표는 그냥 가만히 지내다 어떻게든 이 미친 집안을 탈출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아버지가 죽으면 가문으로 돌아와 작위를 잇고.
호래자식이라고? 알아. 하지만 집구석은 싫어도 후작위를 받는다는 건 메리트가 엄청나기 때문에 포기할 생각이 하나도 없었다.
조금 알아보니 아버지가 죽기 전까지 이 집안에서 빠져나와 있을 방법이 있었다. 바로 성기사가 되는 거였다.
황실 기사단은 출퇴근제지만 성기사단은 아니거든.
그렇게 난 다섯 살부터 내 진로를 정하고 후작가의 검술 선생에게 빡세게 수업을 받았다.
보통 귀족들과는 다르게 공부하고 남은 내 시간을 거의 다 쏟아부었다.
선생님에게 재능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신나서 그렇게 한 십 년 넘게 수련하다 보니 오러까지 쓸 수 있게 되었다.
계집애가 무슨 검술이냐며 꼰대질을 하는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결국 내가 이겼다.
원작의 글로리아도 검술학부였던 걸 보면 이 몸에 정말로 재능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여튼 이렇게 팍팍한 삶이었지만 중간중간 나름 재미있는 일도 많았다.
그중 하나를 꼽자면 내가 남주와 약혼을 할 뻔한 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겠군.
그러니까 무슨 일이었냐면, 내가 열 살이 되는 해에 아버지란 놈이 유리엘 후작가와의 혼담을 물고 왔다.
열 살 꼬꼬마한테 무슨 약혼이야, 하면서도 여긴 어릴 적부터 약혼을 해 놓는 경우가 많으니 그냥 그러려니 했다.
어차피 내가 싫다고 고집부리면 깨질 혼담이었으니까.
나는 차기 가주로 일찌감치 내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내 약혼 상대는 첫째 영식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몸이 아프다는 막내 영애도 아닐 터이니 남은 건 차남뿐이었다.
노아스 유리엘. 응, 남주 걔.
일찌감치 높은 마력량과 영특함으로 소문이 나 있던 그였으니 아버지 입장에서도 데릴사윗감으로 탐이 난 거겠지.
거기다 유리엘 후작가와의 결속도 더 탄탄히 할 수 있고 말이야.
원작대로라면 내가 노아스를 보자마자 그의 조신함과 외모, 능력, 하여튼 그런 것들에게 반해서 집적대기 시작해야 했지만 원작이니 뭐니 따지기 이전에 안타깝게도 노아스는 내 취향이 아니었다.
소설은 재미있게 읽었지만 남자로서는 아니야. 난 좀 더 귀여운 사람이 좋다고.
하지만 늘 그렇듯 당사자들의 의사라고는 하나도 없이, 우리 둘 다 아버지의 손에 떠밀려 단둘이 응접실에 남게 되었다.
나는 각설탕을 넣은 찻잔을 휘저으며 노아스의 얼굴을 흘깃거렸다.
여기까지 와서도 책에 코를 박고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고개를 여러 각도로 돌린 끝에 어찌저찌 얼굴을 보는 것에 성공했다.
찻잔을 젓던 내 손이 멈추었다.
과연 소설에서 묘사한 것과 일러스트 그대로였다.
와, 여자애보다 예쁘게 생겼네.
노아스의 얼굴을 본 나는 내가 ‘여식’을 ‘영식’으로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한참 생각했다.
매일 거울을 보면서 미인에 제법 익숙해진 나로서도 제법 감탄할 만한 미모였다.
아직 어려서인지 소설에서는 길다고 묘사되었던 은색 머리카락은 어깨 언저리에서 찰랑였고, 벌써부터 시력이 안 좋은지 제법 두꺼운 안경 너머로 가라앉은 황금색 눈동자가 보였다. 피부가 나만큼이나 하얘서 더 곱상하게 보였다.
호오, 콧날이 스키 점프대가 따로 없군. 녀석, 장래가 기대되는걸?
속으로 별 주접을 다 떨고 있는데, 아무 말 없이 책을 읽고 있던 노아스는 나를 보지도 않고 말을 꺼냈다.
“미리 말하는데, 난 너랑 결혼할 생각 없어.”
뭐라고?
그 말을 들은 나는 똥 씹은 얼굴로 눈썹을 꿈틀거렸다.
방금까지만 해도 얼굴에 감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가슴이 싸하게 식었다.
가문끼리 잡은 혼담에서 저런 말을 한다고? 요놈 자식이.
아무래도 이놈은 미모와 싸가지를 등가 교환한 모양이다.
이거 봐, 이거 봐, 이 새끼!
내 최애한테 그렇게 굴 때부터 알아봤어. 이런 놈이 남주라니, 이게 나라냐.
분명 여주인공 플로라는 보통 보살이 아니겠구나.
아이고, 내가 전생까지 합쳐서 서른이 넘었는데 열 살짜리한테 이런 소리나 듣고 있다.
도대체 원작의 글로리아는 이 싹수 말아먹은 애의 어디가 좋다고 그렇게 난리를 쳤지.
하긴 원작의 글로리아는 어떤 귀족의 부인이 아니라, 오로지 ‘글로리아 루피너스 후작’이란 이름으로 살고 싶어 했지.
그러니 차남이라 작위를 받을 일 없고 가문에 귀속된 작위에도 관심 없는 노아스가 남편감으로 안성맞춤이었을 테고.
미남을 끼고 사는 커리어우먼이라, 멋지긴 하다.
아니, 이게 아니라 어쨌든 저쪽에서 저리 싸가지 결핍인 태도를 보이는데 내가 가만있을 이유는 없지.
“누군 있는 줄 알아? 나도 없어.”
나는 코웃음을 치며 가까이 있는 쿠키를 집었다. 와작, 분노 어린 손길에 쿠키가 가루로 부서졌다.
“비리비리하니 가문 일도 제대로 못 할 것 같은 남편은 필요 없거든.”
내 회심의 어그로에도 놈은 반응이 없었다. 아직도 책을 읽고 있는 걸 보니 엄청난 포커페이스였다.
그런 그놈을 보고 있는 것보다는 마카롱으로 탑을 쌓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아서, 마카롱 열 개를 맛 별로 모아 찻잔 받침 위에 차곡차곡 쌓았다.
그렇게 한참 마카롱 탑에 집중하고 있던 참이었다.
“하.”
내 마카롱 탑을 흘낏 쳐다본 노아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 그런 뻘짓을 할 시간에 조금 더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느냐는 듯한 투였다.
뭐. 뭐. 내가 뭐.
어이가 없어 눈을 깜빡이고 있는데, 부실 공사로 이미 무너질 위기에 처해 있던 마카롱 탑이 결국 운명을 달리했다.
나는 꽤나 열이 뻗쳤기 때문에 빙긋 웃으며 손가락으로 찻잔을 툭 쳐 쓰러뜨렸다.
“어머나, 실수.”
어차피 깨질 혼담, 화풀이라도 해 보자.
테이블 위에 쏟아진 찻물이 똑똑 떨어져 노아스의 바짓가랑이를 적셨다.
“…….”
하지만 노아스는, 다리를 슬쩍 뒤로 빼며 인상을 찌푸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내게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책에 더 깊숙이 코를 박는 건 덤이었다.
하, 새끼, 이걸 참네. 그래, 지금은 너나 나나 초딩이다. 우리 초딩답게 싸워 보자.
나는 찻잔에 다 식은 찻물을 따르며 이를 갈았다.
나로서는 정당하게 수업을 빼먹을 수 있는 이 시간이 제법 달가웠다. 그걸 짜증 나게 만든 건 너야.
자신의 앞섶이 죄다 찻물로 젖어들 때쯤, 그제야 노아스는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홀로 남겨진 나는 낄낄 웃어젖히며 승리의 기분을 만끽했다.
지가 제아무리 남주여도 아직은 애새낀데, 참을 수 있겠냐?
자기보다 스물은 어린 애한테 이러는 거 현타 안 오냐고? 아 몰라, 응애예요.
어린 몸에 갇히니 정신 연령도 같이 어려진 모양인지 이런 유치한 짓들이 너무 재미있었다.
“넌 근신이다!”
“왜요?”
“몰라서 묻는 게야? 유리엘 후작가 영식 옷을 저리 망쳐 놓다니, 생각이 있는 게냐 없는 게냐?!”
“실수 몇 번 한 것 가지고 너무하십니다.”
“이이,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이 못난 것!”
님만 하시겠어요.
나는 호통치는 아버지를 향해 속으로 혀를 벳 내밀었다.
어차피 선대 가주들 때부터 이어져 온 교류는 이딴 어린애들 장난으로 깨어질 결속도 아니었다.
그런데 제법인걸.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또래 귀족들과 갈등을 빚은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가끔 가다 여자가 검술 한다고 무시하고 얕잡아 보는 잡놈들이 있었는데, 난 충분히 그래도 되는 위치였기에 실컷 실력을 발휘해 상대해 주면 보통 내게 발린 애들은 엉엉 울면서 부모님을 불러오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눈알을 굴리며 죄송해용, 실수였어용, 하며 대충 넘어가면 되었다.
그러면 유력한 차기 가주인 내게 밉보여서 좋을 것이 없었기에 귀족 부모들은 적당히 에둘러서 넘어가곤 했다.
그런데 노아스는 뽈뽈 걸어가서 우리 애비에게 이른 것이다.
이 녀석, 열 살 주제에 제법 똑똑하잖아.
그 바람에 혼담은 깨지고 나는 일주일간 근신당했고, 그 일주일 내내 차 따르는 법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