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글로리아 루피너스 (1)
고작 아이스크림이 뭐라고 이 밤에 집을 나섰을까.
내 입을 틀어막는 우악스러운 손길에 진저리를 치며 나는 생각했다.
나는 주말에 아이스크림을 사러 나온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일평생 누군가에게 원망을 살 일이 딱히 없었다는 뜻이다.
“우읍……!”
어두운 골목길을 지나던 중 뒤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 불안하기는 했다. 워낙 어두운 밤이었으니까.
그래서 괜히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걸었는데,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가 내 입을 틀어막고 나를 제압했다.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더니 남자는 내 배를 세게 가격했다.
얼얼한 통증에 꽉 다문 잇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몸이 돌이라도 된 듯 딱 굳어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었다.
고통에 신음하고 있자니 텔레비전에서 나오던 묻지 마 살인 뉴스가 떠올랐다. 설마하니 살면서 내가 이런 일을 당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막상 내 현실이 되니 살려 주세요, 그 흔한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
차가운 쇠붙이가 배를 찌르고 내장을 헤집었다. 너무 아프면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토할 것처럼 속이 마구 울렁거렸고 질끈 감은 두 눈엔 눈물이 핑 돌았다.
“흐윽…….”
나는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쓰러진 채 피비린내 나는 숨을 내뱉었다.
죽을 때가 되면 주마등이 스친다거나 엄청난 회한이라도 느낄 줄 알았는데, 살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때 희미한 가로등 불빛을 받아 칼날이 번쩍 빛났고 다시 고통이 찾아왔다. 입 안에 피가 고이는 건 금방이었다.
코끝에 맴도는 피비린내가 짙어지는 것과 동시에 눈이 점점 감겼다.
흐려지는 시야 속 바닥을 나뒹구는 내 액정 깨진 휴대폰과 검은 비닐봉지가 보였다.
아마 나는 그렇게 죽었을 것이다.
* * *
제법 자명해 보이는 사실을 굳이 추측형으로 말한 것은 내가 얼마 후 다시 정신을 차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무척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지만 숨쉬기도 편했고 아픈 곳도 없었다. 굉장히 비싼 병원인가 보다 생각하며 나는 눈을 떴다.
“……?”
요상한 무늬의 벽지, 곳곳에 놓인 시대착오적인 가구들, 캐노피가 드리워진 침대.
병원에 많이 가 본 건 아니었지만, 이 중세 유럽풍의 공간이 병실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확실했다.
이 작고 통통한 팔다리며 조그마한 몸이 원래 내 것이 아니라는 것도 확실했고.
어두운 골목길에서 어떤 개자식에게 칼 맞아 죽었던 나는 놀랍게도 웬 아기의 몸에 들어와 있었다.
“으아앙……!”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냐면, 울었다. 엄청 울었다. 지칠 때까지 자지러지게 빽빽 울어 젖혔다.
이도 머리털도 제대로 안 난 아기의 몸으로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으니까.
그랬더니 웬 메이드복을 입은 여자들 한 무더기가 달려와 웃기지도 않은 방울 장난감을 흔들며 안절부절못했지만 신경도 쓰지 않고 계속 울었다.
으아아아아앙.
그렇게 목에서 피 맛이 날 정도로 울다가 제풀에 지쳐서 잠들었다.
부디 이게 꿈이기를 간절히 바라며 퉁퉁 부은 눈을 다시 감았던 기억이 났다.
생각해 보니 이것도 어느덧 18년 전이었다.
* * *
플로라와 노아스는 친구였다.
서로가 서로의 유년기 전부를 차지했고, 나이가 들고 나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친구. 친구라는 암묵적인 선을 먼저 넘은 것은 노아스였다.
“걔 말고 나는 어때, 플로라.”
“노아…… 우린 친구잖아.”
친구.
놀랍게도 그 한마디에, 늘 차분하던 금색 눈동자가 불타올랐다.
“이래도 우리가 친구야? 말해 봐, 플로라.”
“나는…… 네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 윽!”
손목이 붙들린 플로라가 고통스레 신음했다.
“그놈의 친구, 친구. 너는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
“플로라, 한 번만 더 그 빌어먹을 친구 소리를 꺼냈다가는.”
노아스가 진득한 손짓으로 플로라의 입술을 훑었다.
“직접 이 예쁜 입술을 막아 버릴 거야.”
#아카데미물 #고수위 #소꿉친구 #집착
* * *
……에 환생했다.
<장미를 감싼 안개>.
응, 무슨 말 하려는지 알아.
조금 남사스럽지만 나는 이 소설에 반쯤 미쳐 있었다.
소꿉친구였던 두 남녀 주인공이 몇 번의 삽질 끝에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폴인럽’하는 내용의 클리셰 알차게 버무린 로판 소설.
내가 환생한 이 세계가 그 소설 속이라는 걸 알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저택은 루피너스 후작저였고, 나는 그 집안의 적장녀 글로리아였다.
문제는 그 글로리아가, 남주인공을 향한 소유욕에 들끓어 여주인공을 심하게 괴롭히다 개빡친 남주인공에게 제거당하는 악역이라는 거였다. 뭐 죽지는 않는다만.
죽었다 깨어나니 소설 속 악역이 되어 있었다, 라.
제법 클리셰적인 이야기인 데다 가끔 돈 많은 부자로 환생하게 해 주세요, 하고 바란 적도 있지만 그게 실제 내 이야기가 되니 마냥 달갑지만은 않았다.
아, 그보다 환생이라뇨. 환생이라뇨……. 난 무신론자란 말이에요.
처음에는 내가 그렇게 허무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매일같이 울었고, 빽빽 소리를 질러 댔다. 그 탓에 내 시녀들만 죽어났지만.
내가 두 살이 되기까지 말도 잘 못 하고 뭘 먹기만 하면 토하고 뭐만 하면 엉엉 우는 바람에 다들 내가 백치인 줄 알았다고 한다.
생물학적 아버지란 놈이 어머니에게 뭐 저런 걸 낳아 놨냐며 윽박지르던 게 아직도 기억에 선명했다.
당연한 거 아냐, 나는 미친 살인마한테 찔려서 죽은 참이라고요. 나를 죽인 그 개자식은 부디 잡혔으면.
뭐 세 살이 되고 나서는 뭘 배우는 속도가 남들보다 빨랐으니 아버지인 후작은 안심하고 어머니와의 이혼을 물렀다.
나는 자라나면서 진심으로 원래의 내 집을 그리워했다.
물론 루피너스 후작가는 제국에서 손꼽는 명문가에 부자였고 글로리아는 엄청난 미인이니 나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거나 다름없었지만, 그걸 상쇄하고도 남을 만한 크나큰 결함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엄청난 콩가루 가정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처음 아기의 몸에서 눈을 떴을 때부터 그렇게 느꼈다.
하체 가벼운 아버지와 그 때문에 늘 우울한 어머니.
아버지의 일탈 덕에 내 아래로는 배다른 동생이 둘이나 있었다.
그 둘의 엄마이자 아버지의 첩이었던 여자가 죽고 동생들은 가진 것 하나 없이 후작저에서 쫓겨날 뻔했는데, 그걸 당연하게 여기는 이곳의 가치관에 기겁한 나는 아버지를 볶고 어머니를 설득해 이복동생들을 후작 영애 영식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어린이들은 행복해야 하니까.
나를 무척 따르는 두 동생들은 아버지의 관심을 받는 나를 부러운 시선으로 보곤 했고, 나는 그럴 때마다 쓰게 웃으며 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버지는 어디까지나 가주로서 나에게 ‘투자’하는 것이었고, 그 속에 친딸을 향한 사랑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아기였을 때, 왜 하필 딸이냐고 불만스레 중얼거리던 게 기억이 났다.
여자가 작위를 이으면 안 된다는 법은 제2시대 이후로 사라졌고 지금도 여성이 가주로 있는 가문은 상당했다. 정말 구시대적인 발언이었다.
지금도 매일같이 꼰대 같은 발언과 가부장적인 태도로 내 기분을 있는 대로 잡치는데 앞장서고 있었다.
사실 딱히 아쉬울 건 없었다. 나도 아버지라는 인간을 돈 나오는 지갑, 그 이상으로도 이하로도 생각해 본 적 없으니 말이다.
정을 붙이는 것도 하기 나름이지, 행동거지가 저따위인데 어떻게 안 싫어하고 배겨.
멀쩡하고 좋은 사람이었어도 아버지라 여길까 말까 한 판에.
내가 이미 가치관이 확립된 환생자라 멀쩡한 거지, 정말 이렇게 태어난 사람이라면 약간 돌아 버릴 수도 있는 환경이었다.
원작의 글로리아가 꼭 잘했다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녀의 행동이 아주 조금 납득이 간달까.
하여튼 나는 이 콩가루 집안의 장녀였고 하나뿐인 후계자로 키워졌다.
집안의 상태가 조금 불만스럽기는 하지만 다행인 게 딱 하나 있었다.
바로 나는 다른 빙의, 환생자들처럼 원작 루트를 타지 않으려 노력할 필요가 그다지 없었다는 점이다.
왜냐. 글로리아의 말로는 그냥 강제 퇴학에서 그쳤기 때문이다.
불명예이긴 하지만 그뿐, 다른 소설에 나오는 악녀들의 끝보다는 훨씬 나았다. 돈과 권력 덕분이려나.
하기야 아카데미에서 무슨 그리 빡센 처벌을 내리겠냐만은. 최대가 퇴학이지 뭐.
새삼 그 많은 로판 중에서도 아카데미물에 환생한 게 정말 다행이라 느꼈다.
다른 소설 보면 악녀의 최후는 사형이며 투옥이며 막 되게 하드코어 하던데.
그렇지만 글로리아는 드레스에 찻물 쏟고 암살 시도하고 음모와 모략에 미쳐 있는 다른 악녀 언니들과는 좀 결이 다르게 추악했다.
내가 학교 폭력 가해자라니.
죄질로 치면 암살 시도보다야 가볍겠지만, 죄의 특성상 좀 더 현실감 있어 더 악질로 느껴졌다. 적어도 현대에서는 제정신 박힌 인간이라면 암살 시도는 안 하니까.
어휴, 대체 왜 그랬어.
나는 거울에 비친 우아한 미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혀를 쯧쯧 찼다.
물론 나는 여주인공 플로라를 괴롭힐 생각이 요만큼도 없다.
아니지, 사실 나는 남주와 여주에게는 직접적인 관심이 없었다.
환생했으니 남주를 꼬셔서 연애해 보겠다?
노, 노. 자기들끼리 알아서 잘 사쇼.
그도 그럴 것이 원작에서의 내 최애는 여주도 남주도 악역도 아니었다.
바로 에피소드 두 개쯤에 간간이 등장하는 엑스트라였다.
이름은 케이틀린 블레어, 노아스와 같은 학부의 후배.
노아스를 짝사랑해 플로라를 허술하게 괴롭히는, 분량도 짠 데다 악역이었지만 속사정이 자세하게 나오고 조금 비굴하고 찌질한 모습이 귀여웠기 때문에 나름 팬층이 있는 캐릭터였다.
작가가 고료를 더 당기려고 분량을 억지로 늘렸는지 후반부에서 취급이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중간중간 등장하는 감초 같은 인물.
우리 애는 질투하는 것도 어설프게 플러팅하는 것도 너무 큐티하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