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110)

내가 말문이 막혀 가만히 서 있자 글로리아 선배가 나를 향해 두 눈을 깜빡이며 다시 물어왔다.

“환생이 아니면 빙의야?”

“……예?”

“너도 나처럼 다른 세계에서 온 거 아니니?”

난 여기서 선택을 해야 했다.

계속 선배의 말을 들을 것인지, 지금까지의 말을 개소리 취급한 다음 그녀를 들쳐 업고 양호실로 갈 것인지.

상식적인 행동을 고르자면 당연히 후자였지만 나는 내심 궁금했다.

환생은 또 뭐며, 다른 세계란 또 뭐란 말인가. 뭐? 여기가 소설 속?

“저는…… 그런 거 아니에요.”

대답을 기다리며 눈을 깜빡이는 글로리아 선배에게 내가 대답했다.

“저는 처음부터 그냥 케이틀린 블레어였어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물우물 말하던 내가 고개를 홱 들었다.

“그런데 그게 다 무슨 소리예요?”

“아, 그러니까.”

납득한 듯 입을 벌린 글로리아 선배가 마른세수를 하며 중얼거렸다.

“아, 아. 알아들었어.”

“…….”

“와, 이거 되게 창피하네.”

알기는 아는구나.

묘한 기분으로 책상 옆에 우두커니 서 있는데, 글로리아 선배가 의자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일단 앉을까?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심한 동작으로 의자에 앉았다.

옆에 앉은 글로리아 선배가 괜히 주변을 살피더니 내 귀에 대고 은밀하게 속삭였다.

“나는 사실 다른 세계에 살던 사람인데, 칼에 찔려 죽고 눈을 뜨니 전생에 읽었던 소설의 악역이 되어 있지 뭐야.”

그걸 가만히 듣던 나는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웬만하면 상급자, 그것도 선배한테 이런 말 안 하는데, 좀…… 좀 또라이 같았다.

헉, 설마 신종 괴롭힘 수법인가. 기어이 내 입에서 미쳤냐는 소리가 나올 때까지 저러다가 날 모독죄로 집어넣을 심산인가?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기에는 또 글로리아 선배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그럼 선배는 이 삶이 2회차라는 건가요.”

“그렇다니까.”

“…….”

내가 얼굴을 굳히자 글로리아 선배는 진정하라는 듯 손바닥을 펴고 휘저었다.

“안심해, 난 그 글로리아가 아니라니까.”

잠깐, 뭐라고?

나는 등골을 타고 소름이 쫙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다, 당신 누구야! 그 몸에서 나가!”

나는 발발 떨리는 손으로 책을 집어 들고 선배를 향해 무기처럼 겨누었다.

예언서는 그래도 성물이니 무슨 능력이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무 일도 없는 걸 보니 내가 너무 많은 걸 기대했나 보다.

“아니, 아니. 난 글로리아인데 글로리아가 아니야. 난 소설 속 글로리아로 환생했다고!”

“서, 선배 말이 진짜라는 걸 어떻게 알죠?”

“네가 본 책의 내용을 난 알아.”

내가 멈칫하며 팔을 내리는 사이, 글로리아 선배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거 로맨스 소설이지? 노아스가 남주인공, 플로라가 여주인공, 너랑 나는 악녀.”

“…….”

“난 악마도 아니고 악령도 아니야. 그러니까 경계 풀고 앉아.”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의자를 끌어당겼다.

“아직도 못 믿겠다면 말만 해. 난 그 둘이 언제 어디서 키스하는지도 다 아니까.”

“돼, 됐어요.”

내가 발개진 얼굴로 고개를 가로젓자 선배는 유쾌하게 웃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일단은 그녀의 말을 믿어 보기로 했다. 책을 펼치지도 않았는데 나에게만 보이는 내용을 알고 있으니까.

물론 환생이니 뭐니 하는 건 믿기 좀 어렵지만.

“잠깐, 그럼 넌 어떻게 원작의 존재를 안 거야?”

긴 손가락으로 책상 표면을 톡톡 두드리던 글로리아 선배가 불현듯 질문을 던졌다.

“원작……? 아, 이 책을 주웠는데, 아무한테도 안 보이고 저한테만 보이더라고요. 보기에는 마법도 안 걸려 있고 평범한 책인데 말이에요.”

“그러게.”

내가 건넨 책을 펼쳐 든 글로리아 선배가 태연한 얼굴로 책을 닫았다.

“나한테도 안 보이네.”

“네, 그래서 이걸 예언서라고 생각했…… 잠깐, 안 보이는데 어떻게 아셨어요?”

“예언서? 아, 내가 전생에 그 책을 여러 번 읽었거든. 표지만 보고도 알지.”

내 물음에 태연하게 대답한 선배가 턱을 괸 채 씩 웃었다.

“나 이상한 사람 아니니까 그렇게 긴장 안 해도 돼요. 자꾸 그런 표정 하면 나 좀 슬프다.”

“……아, 네.”

“그렇지.”

어깨에 힘을 빼고 굳었던 표정을 풀자, 잘했다며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은 글로리아 선배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법 진중한 표정에 괜히 나까지 긴장이 되었다.

“그런데 너 혹시…… 노아스 좋아하니?”

“……네에.”

나는 얼굴을 붉히며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해요. 제 분수에 안 맞는다는 건 알지만.”

“……너 진짜 귀엽다.”

글로리아 선배가 내 볼을 조물거리며 말했다.

으아, 이거 뭐야.

“그럼 혹시 그, 플로라랑 노아스를 이어 주려 한다거나…….”

“그 정도로 속없지는 않아요.”

생각을 아예 안 해 본 건 아니지만.

나는 초연하게 눈을 내리깐 채 웅얼거렸다.

“음, 그래. 우리 클리셰에 말려들지 말자. 이미 원작은 물 건너간 지 오래인데.”

글로리아 선배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더니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가만히 앉아 있다가 문득 드는 생각에 고개를 들었다.

“잠깐만요, 선배는 노아 선배를…… 안 좋아하세요? 좋아하는 게 아니었나요?”

“어우, 내가 그 재수탱이를 왜.”

글로리아 선배가 질색하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진심으로 싫다는 듯한 그 모습에 내 표정도 함께 일그러졌다.

어라, 그럼 왜?

“그때 저한테 막…… 안 어울린다고 하시고.”

내가 더듬거리자 글로리아 선배가 긴 속눈썹을 나풀거리며 당연하다는 듯한 투로 대답했다.

“음? 그야 당연히 걔한테 네가 과분하다는 뜻이었지.”

내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이 선배가 미쳤나. 저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야?

혼란스러움에 머리를 부여잡고 싶은 걸 참고 속으로 곱씹고 있는데, 선배가 우수에 젖은 그윽한 눈빛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있잖아, 나 너 되게 좋아했다?”

“네?”

갑자기 웬 고백.

안 그래도 구겨져 있었던 내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참으로…… 외로운 덕질이었지.”

글로리아 선배가 제법 아련한 얼굴로 씁쓸하게 한숨을 내쉬며 눈가를 문질렀다.

“외모 묘사도 얼마 없고, 특전 굿즈도 없고, 일러스트도 없고…….”

사실 그녀가 하는 말의 반 이상은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냥 그러려니 했다.

어쩐지 이 대화에 짙은 회의감이 들기 시작할 무렵, 선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넌 내 최애야.”

“최……애가 뭔데요?”

“최고로 애정하는.”

뭐라고.

나는 밀려오는 당혹스러움에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주인공도 여주인공도 다 제치고 콕 집어서 나라니. 기분이야 좋지만 이게 무슨 일이람. 분명 내가 읽은 바로는 무지 찌질하고 별거 없는 캐릭터였는데, 나.

“넌 네 이야기니까 다르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난 네가 되게 귀여웠어.”

글로리아 선배가 깔깔 웃으며 백금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꼭 다른 사람 이야기를 전달하는 듯한 화법이 아까부터 조금 의아했지만 크게 신경이 쓰일 정도는 아니라,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선배를 올려다보았다.

그제야 차갑고 무섭게만 보였던 얼굴의 인상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웃으니까 차가운 게 아니라 시원해 보이네.

눈을 내리깔고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는데, 갑자기 글로리아 선배가 내 어깨를 꼭 쥐며 말했다.

“너 하고 싶은 대로 살아, 얽매이지 말고.”

뜬금없는 소리에 눈을 깜빡이자, 그녀가 그에 답하듯 말을 이었다.

“노아스 그 막돼먹은 놈에겐 네가 너무 아까워. 그놈은 결국 네게 상처를 줄 거야. 너도 알지? 그 장면.”

그 장면, 그걸 내가 어떻게 잊어. 보는 것만으로 눈물이 핑 돌았는데.

이상하게 글자만 보고서도 노아 선배의 싸늘한 목소리며 눈빛이 다 연상돼서 얼마나 괴로웠는데.

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살짝 들었다.

“노아스 그딴 새끼 차 버리고 행복하자, 응?”

“네……?”

그런데 어째 논점이 조금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그놈이 원작에서 어떻게 행동했는지 생각만 해도 내 치가 다 떨린다. 나 작가한테 항의 메일 넣을 뻔했잖아. 넌 그보다 훨씬, 훠얼씬 더 가치가 있어.”

글로리아 선배의 말을 듣던 내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저, 실례라는 건 아는데요.”

“응?”

“제가 노아 선배를 좋아하는 게, 꼭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처럼 말씀하셔서요.”

나는 그녀의 손을 내 어깨에서 슬그머니 떼어 놓았다.

“저는 그냥 노아 선배가 좋은 거지 거기에 보답받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얽매여 있다고 생각한 적도 없고요.”

“…….”

“네, 저는 그냥 노아 선배가 좋아요.”

언젠가는 접어야 할 마음이라는 건 알지만.

흘끗 눈치를 보던 내가 마침내 본론을 꺼내 놓았다.

“그……리고 죄송한 말씀이지만 제가 누굴 좋아하는지는 선배님 소관이 아닌 것 같아요.”

그 무슨 소설을 읽었다는 글로리아 선배 입장에서는 내가 오래 알고 지낸 지인 같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냥 생판 남이었다.

그리고 나쁜 의도는 아닐지언정 그런 사람이 내 연애사에 이러쿵저러쿵하는 건 솔직히 조금 그랬다.

고개를 들어 선배의 눈을 마주한 내가 침을 꿀꺽 삼켰다.

히익.

어두워진 푸른 눈이 고민하듯 가늘어졌다.

그렇게 몇 초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글로리아 선배가 입을 열었다.

“그렇네.”

“예?”

“그런 생각을 못 했어. 미안.”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글로리아 선배에, 나는 제법 놀라 볼을 긁적였다.

‘감히 내 말에 토를 달아? 넌 죽었어.’ 같은 반응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이것 또한 적잖이 놀라웠다.

권세 높은 후작가 아가씨가 이리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줄은, 또 내 입장을 생각해 줄 줄은 몰랐기에.

물론 그, 환생? 어쨌든 속은 책의 글로리아 선배와 다른 사람이라는 건 알지만.

“어우, 내가 너무 친한 척했나 보다. 미안해. 원작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정말 처음이라.”

글로리아 선배가 민망한 얼굴로 헐렁한 넥타이를 만지작거렸다.

그에 나는 홀린 듯이 입을 열었다.

“저도 잘못했어요.”

처음 봤을 때, 마차에 기대 검을 닦고 있던 그녀가 생각났다.

개학식 때 눈을 마주친 것도, 계속 노아 선배와 날 떨어뜨리려 한 것도.

그땐 정말 나쁘고 무서운 사람인 줄로만 알았는데, 속사정을 듣고 나니 그냥 내가 멍청이인 거였다.

“사실 저도 선배가 되게 나쁜……무서운 사람인 줄 알았거든요. 저 책엔 그렇게 나왔으니까.”

사실 내가 선배에게 뭐라고 할 처지는 아니었다.

나도 책만 읽고 쫄아서 마주칠 때마다 공포에 질려 개다리춤을 추다시피 했으니, 그녀 입장에서도 많이 불쾌했으리라.

“응? 아냐.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지.”

호쾌하게 웃어 보인 글로리아 선배가 백금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씩 웃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우린 비밀을 공유하고 있네. 앞으로는 친한 척해도 되지?”

“아, 그럼요.”

나는 환하게 웃으며 그 손을 맞잡았다.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섬뜩했던 저 파란 눈이 더 이상은 무섭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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