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리 시간이 거의 다 되었건만, 아까부터 자꾸만 웃음이 났다.
나는 방실방실 웃는 얼굴로 입가를 가리고 동아리 교실 문을 열었다. 괜히 붕 뜬 기분 때문에 일찍 나와서 교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 참, 아빠한테 연락해야겠다.
나는 자리에 앉아 해맑은 얼굴로 올 여름 생일 선물로 받은 통신구를 꺼냈다.
동그란 구슬의 표면을 슥슥 만지자 통신음이 몇 번 들리고 곧 아빠의 얼굴이 보였다.
시험 기간이라고 그동안 연락을 안 했는데, 그래서인지 아빠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케이트, 시험 끝났나 보구나? 고생했어.
“아빠 아빠. 성적 나왔는데 나 4등 했다.”
내가 손을 흔들며 배시시 웃었다.
아빠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손에 들려 있던 펜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내 통신구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정말? 이야, 우리 딸 대단하네!
“아이…….”
-케이트가 4등 했대! 응, 그렇다니까! 하하!
집무실 밖에다 소리까지 친 아빠가 어지간히 좋은지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아빠, 그런데 나 지금 동아리 시간이거든? 이제 끊어야 될 것 같아. 나중에 내가 다시 연락할게.”
내 말에 아쉬운 얼굴을 하던 아빠가 입술을 내밀었다.
-끊기 전에 뽀뽀.
“아, 뭔…… 무슨 뽀뽀야.”
한참을 내외하던 나는 결국 통신구 표면을 소매로 닦고 입술에 가져다 댔다.
“그럼 끊을게.”
그대로 통신을 종료하려는 내 눈에 문가에 우두커니 서 있는 노아 선배가 보였다.
데구르르.
통신이 종료되는 동시에 내 손아귀를 벗어난 통신구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잠시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통신구를 주워 들며 선배가 오해할 새라 다급히 해명했다.
“아빠예요.”
“……그래?”
노아 선배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내 옆자리 의자를 끌어당겨 앉은 노아 선배가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시험은 잘 봤어?”
“네, 가르쳐 주신 덕분에 성적이 엄청 올랐어요.”
내가 감사하다 웃으며 대답했다.
“선배는 잘 보셨어요?”
“그럭저럭.”
와, 이런 화제에도 평소랑 똑같이 대답하네.
나는 괜한 어색함에 어깨를 문지르며 말했다.
“그래도 시험 끝나니까 좋네요.”
“글쎄, 난 조금 아쉬웠는데.”
시험이 끝났는데 아쉽다니, 미친 건가.
노아 선배의 이해할 수 없는 대답에 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만지작거리던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노아 선배가 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 입을 열었다.
“난 남아서 같이 공부하던 게 좋았거든.”
“아아.”
와, 이건 좀 설레네. 하긴 저 얼굴로 말하는데 뭔들 안 설레겠어.
나는 코를 긁적이며 시계를 바라보았다.
“후우.”
문이 열리고 글로리아와 플로라 선배가 들어왔다.
평소와는 달리 어두운 얼굴로 한숨을 내쉬는 플로라 선배의 등을 팡팡 두드리며 글로리아 선배가 물었다.
“어째 표정이 안 좋네. 시험이 많이 어려웠어?”
“으응, 좀.”
플로라 선배가 의기소침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요새 너무 놀아서 그런가? 이번엔 조금 떨어졌네.”
하긴 시험 기간에도 남자 친구랑 붙어 있는 모습이 자주 보이긴 했다.
금세 표정을 갈무리한 플로라 선배가 내게 인사를 건네며 물었다.
“케이트는 어때? 잘 봤어?”
“아, 네. 2학년 시험은 조금 쉽게 나와서요.”
성적 떨어진 사람 앞에서 너무 자랑하는 것도 좀 그러니까.
내 대답에 플로라 선배는 기운 없이 살풋 웃었다.
“그래? 잘됐네.”
“충분히 잘했어. 다음에는 잘 볼 거야.”
“흥, 수석이 그런 말 해 봤자 별로 안 기쁘거든.”
노아 선배가 위로 한마디를 건네다 플로라 선배의 일침을 듣고 입을 다물었다.
자리에 앉으려던 글로리아 선배가 우두커니 서서 나와 노아 선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내가 노아 선배 옆에 앉아 있는 것이 정말, 정말 불편하다는 표정이었다.
지금 자리를 옮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나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 * *
한 시간 남짓한 시간 내내 플로라 선배는 우울해 보였다. 진행도 자주 버벅거렸고 멍도 때렸다.
저 우울해 보이는 뒷모습을 보니 지난 학기에 그녀가 내게 사탕을 주었던 게 문득 기억이 났다.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 플로라 선배를 불러 세운 내가 딸기맛 막대 사탕을 내밀었다.
“저, 선배. 이거 드세요.”
묘한 표정으로 사탕을 받아든 플로라 선배가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고마워, 케이트. 맛있겠다.”
“그, 또, 되게 맛있는 캐러멜이 있는데요, 지금 있는 건 아니고 주말에 시내에 나갈까 하는데 그것도 사다 드릴게요. 되게 맛있어요.”
“…….”
“기운 내시라는 뜻이었어요.”
내가 옅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푸핫.”
조금이나마 기운을 차린 듯 유쾌하게 웃으며 선배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나는 주말에 틀린 것들 복습하느라 기숙사 문턱도 못 밟을 것 같네. 대신 사다 줘.”
플로라 선배가 사탕 포장을 뜯어 입에 넣더니 분홍색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마침내 그녀와 인사를 하고 기숙사로 돌아가려는데, 어째 손이 굉장히 허전해 발걸음을 멈추었다.
“헉! 책!”
맙소사, 그 책을 놓고 왔네.
나는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리며 허둥지둥 돌아섰다.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빨간 표지의 양장책, 예언서.
동아리 책도 아니고 그걸 놓고 오면 어쩌자는 거야.
이마를 팍팍 치며 다급히 교실로 돌아왔더니, 교실 안에는 글로리아 선배가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깜짝이야, 왜 아직도 있대.
교실 문을 열려던 내가 멈칫하며 뒷걸음질 쳤다. 슬쩍 보니 선배의 표정이 영 좋지가 않았다.
무슨 일인지 의문이 듦과 동시에 굉음이 들렸다.
쾅.
글로리아 선배가 책상을 내리치며 욕설을 내뱉자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백금색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썩을!”
나는 흠칫하며 몸을 움츠렸다.
역시 무서운 사람이었어.
침을 꿀꺽 삼키며 안을 들여다보니 일단 내 책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재수 없어. 자기가 뭔데, 옆에 딱 붙어서 실실…….”
글로리아 선배가 짐승이 포효하듯 으르렁거렸다. 다행히 책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런데 저거 내 얘기 맞지? 망했네.
나는 눈을 감은 채 연신 가슴을 쓸어내렸다.
무섭다. 무서워 죽겠다. 서슬 퍼런 분위기에 꼭 눈보라라도 몰아칠 것 같았다.
“그것한테 넘겨줄 수는 없지, 암.”
와, 정말 소설 속 악녀의 정석 같은 대사다.
혀를 내두르며 어떻게 할지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일순간 갑자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뭐지?
나는 소심한 동작으로 교실 안을 다시 힐끔 들여다보았다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글로리아 선배가 붉은 표지의 책을 유심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
심장이 철렁했지만 어차피 나한테만 보인다는 걸 상기하고 간신히 다시 진정할 수 있었다.
지금은 분위기가 좋지 않아 보이니 글로리아 선배가 나갈 때까지 어디에 있을까 생각하던 중, 교실 안에서 반가움에 젖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이거 초판 한정 양장본이잖아!”
책을 손에 든 글로리아 선배가 두 눈을 반짝였다.
“……?”
순간 굳어 있던 몸에 힘이 탁 풀렸다. 땀에 젖은 손으로 생명 줄처럼 붙잡고 있던 동아리 책이 미끄러졌다.
“그런데 이게 왜 여기에 있담.”
글로리아 선배가 책을 이리저리 훑어보며 혼잣말을 했다.
땅에 닿기 전에 간신히 책을 붙잡은 나는 두방망이질하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문에 몸을 기댔다.
그런데 너무 세게 기댄 탓일까, 아니면 동아리 교실 문이 안쪽으로 여닫는 구조라는 걸 깜빡한 탓일까, 끼익 하는 스산한 소리와 함께 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
망했다! 망했다! 망했다!
문에 착 달라붙은 채 글로리아 선배와 마주하게 된 나는 울상을 지은 채 속으로 절규했다.
“너……?”
아 모르겠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시원하게 물어보자.
소리에 놀란 듯 당황한 표정의 글로리아 선배를 향해 내가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저기, 혹시 그게…… 보이세요? 그게 사실은 그, 책……인데요.”
“아, 이거 네 거야?”
나는 인사도 잊고 그렇게 묻는 글로리아 선배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혹시 그 내용이 보이시는 거예요?”
“……너도?”
나를 마주한 바다색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너……! 세상에, 너도 아는구나!”
들고 있던 책을 내팽개친 글로리아 선배가 비명을 지르며 내 손을 맞잡아 왔다. 그녀의 눈이 반가움으로 번들거렸다.
“……!”
세상에, 나 말고도 저게 보이는 사람이 있었어. 그럼 선배도 여신에게 선택받은 사람인가? 아니면 같은 예언서가 여러 개 있는 건가?
혼란스러웠지만 나는 코끝이 절로 찡해지는 느낌에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저만 아는 줄 알았어요.”
“나도 나만 아는 줄 알았어.”
글로리아 선배가 세상 애틋한 표정을 짓고서 나를 얼싸안았다.
새파란 청안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반짝였다.
“여기가 소설 속이란 걸.”
“네에……예?”
붉은 입술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뜬금없는 소리에 나는 눈을 깜빡이며 당황한 낯을 했다.
지금 뭐라고……?
“있잖아.”
표정을 갈무리할 새도 없이 내 어깨에서 손을 뗀 글로리라 선배가 내 귀에 속삭였다.
나는 당황스러웠지만 그녀가 하는 말에 주의를 바짝 기울였다.
“혹시 너도 환생했니?”
“……예?”
내 집중이 무색하게도 글로리아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당최 이해할 수 없는 헛소리였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세요.
입꼬리가 바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절로 다시 울상이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