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110)

방금 전까지도 멀쩡히 공부하던 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펜을 휙휙 돌렸다.

시험은 한 달도 안 남았는데, 이거 큰일 났네.

“……모르겠어.”

분명 한 페이지 전까지만 해도 엄청 기본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이렇게 어려워졌지?

그 페이지를 몇 번씩이나 다시 넘겨 가며 읽어 보았지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 설마 내가 필기를 놓쳤나? 이거 어떡하지.

나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식은땀을 흘렸다.

사실 아카데미에 오기 전까지 나는 내가 천재인 줄 알았다.

우리 영지에는 마법사가 나뿐이었다. 엄하지 않은 가정 교사, 사랑을 퍼부어 주는 가문 사람들과 아빠. 사람이 오만해지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당연히 나 정도면 아카데미도 편하고 쉽게 다닐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첫 시험부터 예상과는 다른 난이도에 크게 충격을 받았고, 합격은 했지만 점수는 장학금 근처에도 못 갔다.

여기 학비는 우리 아빠 돈이다. 그래서 지난 학기를 마지막으로 학비 아까울 일 만들지 말자고 생각했건만!

아악, 어쩐지 다른 것들이 좀 쉽다 했어. 이거 모르면 다른 응용문제들 주르륵 다 못 푸는데.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 없이 절규했다.

옆에 아는 친구들이 있었다면 필기를 보여 달라 했겠지만 지금 나는 기숙사 방에 혼자 있었고 슬슬 동아리에 가야 할 시간이었다.

결국 눈물을 삼키며 책을 덮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나중에 물어보자.

* * *

“안녕하세요…….”

나는 한 손에 끝내지 못한 공부를 들고 동아리실로 들어섰다.

노아 선배와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던 글로리아가 나를 보자마자 일어나더니 노아 선배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는 뭐 그러려니 하며 그 옆에 앉았다.

어째 글로리아도 노아 선배도 아무 말 없이 조용했기에 읽다 만 그 부분을 찾아 책을 펼쳤다.

한창 열중하고 있는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서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캐러멜이 놓여 있었다.

나 주는 건가?

나는 글로리아를 힐끗대며 눈치를 보았다. 정확하게 내 앞에 놓인 걸 보니 맞는 것 같았다.

혹시 내가 먹을 거 주고 싶게 생겼나?

아, 몰라. 먹을 거 주는 사람 좋은 사람.

나는 캐러멜을 입 안에 쏙 집어넣었다. 웬만큼 미친 게 아니라면 아카데미에서 독살을 저지를 확률은 0에 가깝다는 믿음에서 기인한 행동이었다.

“……!”

맛있다.

포장지를 보니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기억해 뒀다가 나중에 사 먹어야지.

포장지를 버리는 대신 교복 주머니에 집어넣은 나는 다시 시선을 교과서에 고정했다.

다시 입술을 이리저리 짓씹으며 이해를 해 보려 노력하고 있는데, 이번엔 노아 선배가 말을 걸어왔다.

“뭐 어려운 거 있어?”

“아, 요 이론……이 부분이 조금 헷갈려서요.”

“알려 줄까?”

“정말요?”

나는 화색을 띠며 고개를 들었다. 마침 내심 기대하고 있었기도 했다.

내가 아는 바로는 선배는 학년 수석을 놓친 적이 거의 없으니, 내가 어려워하는 이 이론도 무척 잘 알 것이 틀림없었다.

전교 1등의 족집게 과외라니.

노아 선배가 선뜻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끝나고 잠깐 남을 수 있으면.”

“아, 당연하죠.”

내가 선뜻 고개를 끄덕이자 한쪽 턱을 괴고 있던 글로리아가 눈알을 굴리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작은 소리였지만 분명히 들렸다.

“자기가 뭔데…….”

온몸의 피가 싸하게 식는 것 같았다.

눈앞에 휘리릭 하고 주마등이 스쳤다.

방금은 캐러멜 주더니, 왜 사람을 이렇게 들었다 놨다 하는 거지.

나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 미동 없는 노아 선배를 흘긋 돌아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 못 들은 걸까, 아니면 못 들은 척하는 걸까.

어쨌든 선배가 자기 때문에 곤경에 빠진 후배를 모른 척할 리가 없을 거라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암, 그렇지. 그렇고말고.

“나도 껴도 될까?”

글로리아가 언제 그랬냐는 듯 상냥하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더 이상 책을 붙잡고 있을 필요는 없어 보였기에 내려놓았다. 무거웠던 마음이 한순간에 편안해졌다.

“벌써 다 와 있어?”

놀란 얼굴의 플로라 선배가 교실 문을 열었다.

“어허, 부장이 이렇게 늦어도 되는 거야?”

글로리아 선배가 짐짓 장난스럽게 소리치자, 연인과 인사를 나눈 플로라 선배가 머쓱하게 웃었다.

“글쎄, 너희가 다들 너무 빨리 오는 게 아닐까?”

나는 플로라 선배의 손을 한번 다정히 잡고서 멀어져 가는 남학생을 창문 너머로 힐끔 바라보았다.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내가 뭐 플로라 선배를 엄청 잘 아는 건 아니었지만, 저렇게 매번 같이 다닐 정도로 다정한 사이인 줄은 몰랐다.

하지만 예언서에 적힌 대로 흘러간다면 플로라 선배와 저 남학생과 헤어지겠지. 아마 좋은 끝은 아닐 거야.

선배는 괜찮으려나? 어찌 됐든 지금은 서로 저렇게 좋아하고 있잖아.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주인공이라고 마냥 좋은 건 아니구나.

플로라 선배가 부러웠던 마음이 조금은 사라졌다.

* * *

“혹시 아직도 모르겠으면 말해. 작년에 필기했던 게 방에 있을 거야.”

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공책을 내려다보았다. 그토록 어려워했던 이론이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아녜요, 완전 이해했어요. 이제 문제도 풀 수 있을 것 같아요.”

선배, 진지하게 교육자 쪽으로 진로를 생각해 봐도 좋을 것 같다. 얼굴로 홀리면 수강생들도 많이 모을 수 있을 텐데.

“시험 완전 잘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시답잖은 상상을 하던 나는 깔끔하기 그지없는 필기를 내려다보며 감탄했다.

“가끔 이렇게 같이 공부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노아 선배가 들고 있던 펜의 끝부분을 만지작거리며 작게 읊조렸다.

“아…… 네. 시험 기간이기도 하니까요.”

나는 묘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공부하자는 뜻인가?

“혹시 괜찮으면 계속 같이 공부할래?”

그렇구나.

“글로리아 선배도 같이 하시면…….”

“응, 나도 낄래.”

내가 슬쩍 눈치를 보며 꺼낸 말에, 책만 편 채 딴짓을 하고 있던 글로리아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플로라는 남자 친구 때문에 안 하려나?”

글로리아의 예상과는 달리 플로라 선배는 당연하다는 듯 승낙했다.

“아니? 나도 같이 할래. 어디 부장을 빼놓고 너희들끼리만 하려고 했어.”

그렇게 얼렁뚱땅 공부 모임이 만들어졌다.

시험 기간인 것을 감안해 동아리 활동을 평소보다 일찍 끝내고, 동아리 교실에 남아 네 명이서 공부를 했다.

왜 이렇게 됐는지 조금 어리둥절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좋은 일이었다.

부원들은 내가 하고 있는 걸 전부 이미 했던 선배들이고, 모두 나보다 잘하면 잘했지 못하는 사람들은 없으니까.

가끔씩 모르는 게 생겨 물어보면 노아 선배는 정성을 다해서 설명해 주었다.

하는 것도 없으면서 단물만 쏙쏙 빼 가는 기분이 들어 굉장히 미안했으나 노아 선배는 덤덤한 얼굴로 시간이 남는다며 괜찮다고 했다.

선배 셋 사이에 껴 있자니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어서 집중도 잘 되었다.

이번 시험은 범위가 유독 넓었고, 교실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나는 밤잠을 줄여 가며 공부에 몰두했다. 기숙사 방에서도 공식을 중얼중얼 외우고 있으면 꼭 뭐에 홀린 것 같다며 도라가 무서워했다.

밤을 하도 새다 보니 코피도 몇 번 터졌다. 잠깐 조는 사이 코피가 흐르는 바람에 새벽에 잠에서 깬 도라가 핏자국을 보고 기겁을 하며 바닥에 넘어졌다.

“흐아악!”

그 소리 덕에 나도 잠이 달아났다. 태연하게 콧구멍에 천 조각을 쑤셔 넣고 다시 펜을 잡는데, 도라가 심장 부근을 부여잡고 신음했다.

“너 거기 앉아서 피 흘리고 있는 거 진짜 무섭거든? 이제 제발 좀 자.”

“너 먼저 자.”

도라의 우는소리에 나는 코 주변을 슥슥 닦고는 콧방울을 지그시 눌렀다. 빨리 멎어야 다시 문제를 풀 수 있다.

결국 그날은 얼마 못 가 잠들긴 했지만, 그렇게 어느 때보다 열심히 공부를 했기 때문인지 시험 날에는 주저 없이 답을 적어 내려갈 수 있었다.

이거, 이거, 만점 받는 거 아냐?

나는 속으로 방정맞게 웃으며 펜을 놀렸다.

이번 시험은 정말 느낌이 좋았다.

* * *

“끝났다!!”

도라가 필기를 한 보충 학습지를 모으더니 북북 찢어 허공에 뿌렸다. 저거 며칠 전부터 저러네.

오늘 복도에 성적이 붙었대서 같이 보러 가려고 했는데, 그녀에게는 성적보다 시험이 끝났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것 같았다.

“그거 10등까지만 나오는 거 아냐? 어차피 없을 텐데 뭘.”

그렇군.

도라와 달리 나는 은근히 기대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에 슬쩍 복도로 나갔다.

역시나 복도 한곳에 학생들이 몰려 있었다.

나는 까치발을 하고 우글우글한 학생들 너머를 올려다보았다.

낑낑거리며 커다란 종이를 훑어 내리던 내가 멈칫하며 입을 벌렸다.

4라는 숫자 옆에 너무나도 또렷하게 내 이름이 있었다.

“……4등?”

나는 멍한 얼굴로 중얼대다가, 내 옆에 서 있는 아이를 붙잡고 소리쳤다.

“나 4등이다!”

“어, 어? 축하해.”

내게 어깨를 붙들린 여학생은 모르는 아이였지만 당황한 얼굴로 선뜻 축하해 주었다. 고마워.

걸음마 떼자마자 최고의 가정 교사가 붙고 과목별로 온갖 교육 다 받아 온 고위 귀족들 사이에서 수석은 바라지도 않았다.

4등이라도 한 게 어디야. 제일 잘 봤던 게 1학년 때 6등 한 거였는데, 2등이나 올랐네.

기숙사 방으로 향하는 길, 나는 방정맞은 스텝을 밟으며 실실 웃음을 지었다. 누가 때려도 웃을 수 있을 것 같다.

“왔어? 네 이름 있던?”

“헤헤.”

“몇 등이라고?”

“헤헤.”

“말을 해.”

침대에서 책을 읽고 있던 도라가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나는 수줍게 손가락 네 개를 들어 보였다.

“4등? 진짜?!”

눈이 휘둥그레진 도라가 책을 내려놓고 입가를 가렸다.

“그렇게 피 흘린 보람이 있었네!”

“그렇지.”

나는 괜히 코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11번 문제도 맞춘 거야? 교수님이 완전 작정하고 내셨던데.”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줍게 웃었다.

노아 선배랑 공부했던 게 딱 나와서 옳다구나 하고 답안을 썼던 기억이 났다.

“잘됐네. 주말에 에코랑 맬러리랑 시내로 놀러 가자.”

“그래, 기분 좋으니까 내가 밥 살게.”

나는 침대 위를 뒹굴며 엄지를 들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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