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110)

헐레벌떡 달려가는 아담한 몸 뒤로 병아리색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비틀거리는 동작이 영 불안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꼭 그것뿐만이 아니더라도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는 게 못내 아쉬웠다.

그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노아스는 그걸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이야, 이게 누구야.”

그러던 중 등 뒤에서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하면서도 기분 나쁜 목소리에 노아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여기 서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노아스?”

검술 수업을 마쳤는지 편한 옷차림의 글로리아가 땀에 젖은 머리를 털고 있었다.

짐짓 친한 척 다가오는 그녀를 보며 노아스는 미미하게 얼굴을 구겼다. 언제나처럼 히죽히죽 웃는 저 표정에 소름이 돋았다.

“흐음.”

기분 좋은 웃음을 띤 파란 눈동자가 복도 끝을 향했다.

글로리아가 킬킬 웃으며 놀랍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저 앨 보면서 청승 떨고 있었어?”

노아스는 인상을 쓰며 글로리아와 닿은 어깨를 움츠렸다.

“땀 냄새 나니까 비켜.”

그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실실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보자, 척 보니까 뭔지 알겠네.”

“…….”

“이 내가 충고 하나 해 줄게.”

노아스는 글로리아의 말을 듣지 않으려 노력했다. 어차피 그녀가 내뱉는 말의 대부분은 개소리이니 힘들 것도 없을 터였다.

“마음이 있으면 망설이지를 마, 이 멍청아.”

노아스의 어깨에 팔을 얹은 글로리아가 입꼬리를 올려 히죽 웃었다.

그녀의 푸른색 눈이 언뜻 선득하게 빛났다.

“너 그러다 뺏긴다?”

* * *

노아 선배의 이유 모를 플러팅은 로맨스 소설을 읽었다 생각하기로 했다.

아니, 그런데 생각해 보면 좀 어이없고 화나는 포인트가 아닐 수 없었다.

좀 흐지부지된 고백이긴 하지만 어찌 됐든 거절하다시피 해 놓고서 갑자기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놨다……. 심지어 아직은 아니지만 어쨌든 짝이 될 여자도 있으면서.

아니, 이거 몹쓸 놈 아닌가?

그렇다고 왜 멋대로 다정하냐고 멱살 잡고 화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속으로 씩씩대며 복도를 걷다 어쩐지 꿀꿀한 기분에 입에 집어넣을 단것을 사기 위해 매점으로 향하려던 참이었다.

계단을 내려가다 계단을 올라오던 아르한과 딱 마주쳤다.

“누나.”

“아, 오랜만.”

눈알을 굴리며 인사를 건네려는데 아르한이 선수를 쳤다.

“어떻게 한 번도 안 찾아올 수 있어? 서운하다, 정말.”

그러고 보니 얘도 개학 날 이후 처음 보나.

아차 싶어 뒷머리를 긁적이며 변명했다.

“좀 바빴어.”

“바쁘다고 나를 잊었어?”

아르한이 너무하다며 눈썹을 내려뜨렸다.

평소라면 왜 그러냐고 질색했을 테지만 이번 일은 서운했을 법했기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 마침 매점 가는 길이었는데. 가자.”

내가 과자 사 줄게.

나는 아르한의 팔을 끌어당기며 매점으로 향했다.

먹고 싶은 거 다 고르라고 했고 아르한은 익숙하게 과자를 쓸어 담았다.

다가오는 시험과 노아 선배에 대한 스트레스에 나도 먹을 것 여럿을 골라 계산했다.

“하아.”

나는 한숨을 내쉬며 전투적으로 초콜릿 포장을 뜯었다.

“무슨 일 있어?”

벤치에 앉아 팔자 좋게 과자를 우물거리던 아르한이 붉은 눈을 껌뻑거렸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도 남자니 그런 심리를 더 잘 알지 않을까?

눈썹을 꿈틀거리던 내가 입을 열었다.

“야, 내가 아는 사람 이야긴데.”

“응?”

“그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고백을 했대. 그리고 차였거든? 근데 그 찬 사람이 자꾸…… 좀 들이댄대.”

나는 초콜릿을 우악스레 씹어 삼키며 말을 이었다. 달콤 쌉싸름한 맛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무슨 뜻일까, 그게…….”

그러고 보니까 왜 이렇게 반응이 없지.

한참 떠들었는데 이상하게 조용하길래 옆을 보니 아르한은 과자를 베어 물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누나 차였구나?”

“…….”

“유리엘 후작가 그 사람이야?”

나는 아르한을 죽어라 노려보았다.

“큭큭…… 푸흡.”

“행복하냐?”

거 되게 좋아하네.

내가 싸늘하게 묻자 작게 헛기침을 한 아르한이 아첨을 시작했다.

“그 사람 눈이 없나 봐, 누나를 차다니.”

“……그건 아냐. 눈이 얼마나 예쁜데.”

나는 선배의 벌꿀색 눈을 떠올리며 툴툴거렸다.

안경 너머의 그 색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빛이라도 받으면 얼마나 영롱하게 반짝이는지 잘 알고 있다.

“미안하다, 귀찮지?”

몽롱한 얼굴로 생각을 하던 내가 입맛을 쩝쩝 다시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얘가 뭔 잘못을 했다고 대낮에 나한테 붙들려서 과자 몇 개를 대가로 내 연애 상담이나 해 주고 있나.

“아냐.”

아르한이 짐짓 상냥하게 웃어 보였다.

“일단 내 생각을 말하자면.”

내가 먹던 초콜릿을 입으로 베어 문 그가 혀를 내어 입술을 핥았다.

“몹쓸 놈인 것 같아.”

그제야 아르한은 노아 선배를 싫어하고, 이 녀석이 하는 말에는 객관성이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다.

“거절해 놓고서 여지를 주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해.”

“그런가…….”

하지만 아르한이 하는 말도 맞는 것 같아서 멍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근처 기둥 앞에 서 있는 노아 선배를 본 나는 눈을 부릅떴다.

그쪽을 보지 못했는지 아르한은 계속 나불대고 있었다.

“상대가 얼마나 힘들겠어. 이기적이고 생각이 없는 거지.”

야, 입 다물어. 일단 몇 개는 맞는 말이긴 한데.

나는 창백해진 얼굴로 아르한의 입을 틀어막았다.

선배는 순식간에 이기적이고 생각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어디부터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등골이 서늘했다.

“아, 뭐야.”

나를 본 선배가 이쪽으로 다가오자 보란 듯이 피식 웃은 아르한이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 사람 이야기 맞구나? 누나가 하던 말이.”

“…….”

귀에 대고 말할 거면 소리 좀 낮추지.

나는 간지러운 귓가를 벅벅 문지르며 아르한의 눈을 피했다.

누나 소리를 들은 선배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동생?”

아르한의 얼굴이 팍 구겨지자 나는 그의 머리를 꾸욱 누르며 다소곳하게 대답했다.

“전 외동입니다.”

그러는 동시에 나는 내 몫의 과자까지 안겨 주며 아르한에게 입 모양으로 들어가라고 말했다.

“누나?”

가만있어 봐, 자식아. 내가 너 살리려고 이러고 있잖니.

“다음에 내가 꼭 찾아갈게. 너 몇 반인지 내가 안다. 종 치려고 하니까 얼른 가 봐.”

내가 다급하게 속삭이며 아르한의 등을 밀자, 아르한은 영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내 말에 따랐다. 의외로 고개를 까딱여 노아 선배에게 인사도 했다.

“안녕하세요. 자주 뵙네요, 선배.”

뒤돌아 있는 상태로 헝클어진 머리를 착착 정리한 내가 다시 휙 돌아섰다.

“응…….”

왜 이렇게 대답에 매가리가 없지. 뭔데.

어쩐지 기운 없는 선배의 대답이 당황스러웠지만 차분함을 가장했다.

“쟤가 가끔 가다 막 나가기는 하는데 나쁜 애는 아니에요.”

“그렇구나.”

평온하기만 한 선배의 대답에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심했다. 역시 못 들은 모양이다.

그렇게 내가 방심한 사이, 선배가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그래서 걘 동생이 아니면 누구야.”

어이쿠, 그게 더 중요하신 건가요.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참.

가만히 서서 어색하게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는데, 어째 선배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낮게 가라앉아 더 섹시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혹시 애인?”

예쁘게 주름이 진 분홍색 입술이 바로 눈앞에서 달싹였다. 아찔하기 그지없는 광경에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침을 꿀꺽 삼켰다.

반칙이야, 반칙이라고. 저런 얼굴로 물어보면 국가 기밀도 불겠다.

아, 자칫하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놓쳐 버릴 뻔했다.

나는 곧이어 수전증 환자처럼 손을 달달 떨며 애처로우리만치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 얼굴 좀…… 치워 주시면.”

“…….”

노아 선배는 의외로 순순히 물러났다. 숨결 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나는 눈을 찔끔 떴다.

와, 씨. 좀 설렜다. 이제야 숨 좀 쉬네.

참았던 숨을 크게 훅 들이쉰 나는 벌렁거리는 가슴에 손을 얹고 입을 열었다.

“애인은, 아니에요. 어우, 애인이라뇨.”

애인이라니.

손가락 빨던 시절부터 알면서 서로 못 볼 꼴 다 보고 자랐는데 그런 놈과 애인이라니. 닭살이 돋으려고 했다.

“그냥 어릴 때부터 알던 사이에요.”

“친하겠네.”

“예에, 뭐 그렇죠.”

나는 영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원래 진짜 친한 사람들끼리는 친하냐 물으면 영 시원찮은 대답이 나오는 법이지.

노아 선배는 어쩐지 불편한 표정이었다.

“그냥 궁금했어.”

선배가 고개를 돌리고 중얼거렸다.

“꼭 대답할 필요는 없었는데. 강요하려던 건 아니었어.”

그러시구나.

뭐 어쩌라고.

선배는 가끔 알아듣기 어려운 소리를 할 때가 있는데, 그게 요즘 들어 더 심해진 것 같다.

선배는 이어서 무슨 말을 하려는 듯 몇 번 입을 벙긋거렸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척이나 곤란하다는 듯 은색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도대체 저 예쁜 머리통 속에는 무슨 생각이 들어 있을까.

나는 뱁새눈을 뜨고 선배를 올려다보았다.

선배는 뒷목을 문지르며 내 눈을 피하고, 나는 선배를 계속 째려보다시피 하는 사이에 종이 쳤다.

“……갈게. 나중에 보자.”

기운 없는 목소리로 인사한 선배가 몸을 돌렸다. 지금 보니 안색마저 파리했다.

뭐야, 체했나?

나는 인사를 하고 돌아서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저러지? 오전까지는 멀쩡했는데.

어라, 혹시 내가 아르한이랑 붙어 있는 게 질투가 나서 그런 거라면…… 정말 좋겠네.

“씨이.”

그런 망상을 하고 있자니 갑자기 조금 억울했다.

예언서니 뭐니 하는 걸 발견하기 전부터 나는 선배를 좋아했다고.

나는 신발 밑창을 바닥에 문지르며 분을 삭이다, 문득 종소리가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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