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케이트, 노트 놓고 갔어.”
“아…….”
나는 붉은색 책을 건네며 친절하게 웃는 플로라 선배를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역시 플로라 선배한테도 안 보이는구나. 확실해. 플로라 선배는 글자라면 뭐든 읽어 보는 사람이니까.
그녀가 지향하는 전통적인 고대어가 섞인 순문학이 아니라 욕망에 충실한 로맨스 소설에 가깝지만.
“감사합니다.”
“케이트, 잠시만.”
책을 받아 들고 몸을 돌려 떠나려는데, 플로라 선배가 나를 불러 세웠다.
“네?”
“방학 동안 탈퇴 생각해 보라고 해 놓고 은근슬쩍 넘어가서 미안해. 솔직히 말해서 너를 놓치고 싶지 않았거든.”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지.
플로라 선배가 조금 의기소침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혹시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싶으면……”
“아니에요, 저 계속 있으려고요.”
“정말?”
“네, 활동도 재밌고 문학 점수도 올랐고.”
나는 확 밝아진 플로라 선배에게 쑥스럽게 대답했다.
에라, 될 대로 돼라. 아마 죽어도 저 얼굴에 대고 싫은 소리는 못할 텐데 뭐.
“그래? 다행이다, 정말.”
얼굴을 붉히며 배시시 웃던 플로라 선배가 어딘가를 바라보곤 황급히 머리카락을 넘겼다.
“어, 나 부른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엔 흐릿한 인상의 남학생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그쪽을 흘깃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 선배 연애 중이셨죠.”
플로라 선배는 지금 연애 중이었다.
노아 선배와 이어져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지만 책의 도입부에서도 선배는 애인이 있었다. 지금까지도 몇 명 있었고. 그리고 노아 선배가 그걸 질투하다가 플로라 선배가 헤어지자마자 들이대는 게 본격적인 사건들의 시작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슬슬 전개가 시작된다는 소리였다. 안타깝지만 저 귀여운 커플은 곧 깨질 테고.
“응, 나 가 볼게!”
내 어깨를 두드리며 푸스스 웃은 플로라 선배가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갔다.
나도 발걸음을 옮기다가, 문 바로 밖에 서 있는 글로리아 선배를 보고 꼴사나운 비명과 함께 주저앉았다.
“흐악!”
곧이어 밀려오는 창피함에 주섬주섬 몸을 일으킨 내가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깜짝이야. 어, 언제부터 계셨어요?”
“넌 내가 무섭니?”
독심술 하세요?
글로리아 선배가 맥락 없이 툭 던진 말에 나는 입을 턱 벌렸다.
“난 너 마음에 드는데.”
뒤이은 말은 더 충격적이었다.
뭐지?
지난번엔 노아 선배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경고까지 해 놓고, 갑자기? 나 갖고 노는 건가? 큰 육식 동물이 작은 초식 동물을 잡아먹기 전에 흔들면서 가지고 노는 것처럼?
“어, 음…….”
나는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대답을 모색했다. 그래 봤자 나온 건 영 시원찮았지만.
“가, 감사합니다?”
“뭐? 푸하하하.”
내가 엉거주춤 내뱉은 말에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린 글로리아 선배가 슬쩍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 좀 귀엽다.”
예?
좋은…… 뜻이죠?
제가 귀엽다는 건, 제 숙제를 후관 연못에 빠뜨리거나 따돌림을 주도하거나, 제 서랍에 시험 답안지를 넣어 놔서 0점 처리되게 한다거나…… 하지는 않으신다는 뜻이죠?
“감사합니다.”
나는 냉큼 고개를 숙였다.
글로리아 선배가 만족스레 미소 지으며 내 머리를 다시 쓰다듬었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침을 삼켰다.
조금 덜 무서워지긴 했는데 뭔가…… 아니, 이건 남주인공한테 해야 하는 행동 아닌가?
왜 정작 노아 선배한테는 아무것도 안 하면서 애꿎은 나를 꼬시려고 하는 거지?
아직까지는 글로리아 선배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조금 놀라웠다. 그럼 왜 동아리에 들어온 거지?
물론 순수하게 문학에 관심이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뭔가 그건 조금 아닌 것 같은걸.
“너 뭐 봐?”
“검술학부 훈련.”
나는 도라에게 대충 대답하고서 창틀에 턱을 괸 채로 연무장 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글로리아 선배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워낙 실력이 독보적이다 보니 아카데미 측에서 그녀의 개인 연무장을 따로 마련해 준 모양인지, 주위엔 그녀밖에 없었다.
글로리아 선배가 무어라 중얼거리자, 그녀가 들고 있던 검이 얼음으로 뒤덮였다.
나는 눈을 크게 뜨며 창문 밖으로 몸을 쭉 뺐다.
“……!”
소드 오러, 검을 오래도록 수련해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자만이 쓸 수 있는 검기.
나도 말로만 들었지, 눈으로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완전 멋지다, 예쁘고.
글로리아 선배가 푸르게 빛나는 검을 휘두르자 스무 개쯤 되는 짚단이 한 번에 썰려 나갔다.
썰린 그 볏짚단의 단면은 꽁꽁 얼어 있었다.
한여름에 보기엔 몹시 진귀한 풍경이었다.
와, 저걸로 몸이라도 썰리면 다시 붙지도 못하겠는데.
이어 몇 번 검을 휘두르고 나서 검을 내려놓은 그녀가 두 손바닥을 맞대고 문질렀다.
무어라고 불평하던 그녀가 내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황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그녀는 내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듯했다.
잠시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글로리아 선배가 몸을 돌려 떠나 버렸다.
“……멋있다.”
입을 가린 손을 내린 내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루피너스 소후작이 거의 마스터의 경지에 다다랐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긴 했다.
그런데 저 정도일 줄이야.
나는 창틀을 두드리며 멍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검술에 무슨 식견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글로리아 선배의 검술은 혼을 빼놓을 만큼 대단했고 검을 휘두를 때 그녀는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다. 처음으로 선배에게서 인간미 비슷한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동안 그녀를 피도 눈물도 없는 절대적인 악의 축으로만 생각해 왔구나.
그 생각에 왠지 모를 창피함이 밀려와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그래, 너무 병적으로 경계하는 건 자제하자. 그러면 나도 힘들어.”
결국 글로리아 선배도 똑같이 빨간 피가 흐르는 18살짜리 여학생이고, 무엇보다 아직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걸. 물론 악행을 한다면 그때는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지금도 책의 내용과 다른 점이 여럿 있다.
그중 하나는 나고, 하나는 글로리아 선배다.
글로리아 선배가 우리 동아리에 들어왔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노아 선배나 플로라 선배보다 나한테 더 관심이 많은 것 같고. 방해물을 하나둘씩 치워 가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음…… 그리고 노아 선배도 조금 바뀌었던가. 갑자기 내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으니. 물론 오래 가진 않을 테지만.
이제 그 예언서라는 게 정말 무조건적인 진리인지도 이젠 잘 모르겠다. 큰 틀이자 가장 중요한 두 선배의 이야기면 모를까, 나머지 자잘한 내용들은 바뀔 수도 있는 것 같으니 말이다.
아, 그냥 진짜 모르겠다. 내가 왜 이런 골 때리는 고민을 하고 있어야 하지?
“흐읍.”
나는 찌뿌둥한 목을 문질렀다.
그래, 너무 오버하지 말고 그냥 가만히 있자. 이렇게 된 거 학비 아깝지 않게 공부나 더 열심히 하고.
* * *
아무것도 안 하기로 생각한 후부터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 잠도 잘 잤다.
그래,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어.
생각해 보면 내가 그렇게 눈 돌아가서 남을 괴롭힐 일도 없을 것 같은데, 예언서 따위 모르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조금 슬프더라도 눈물을 삼키며 조용히 마음을 접을 수 있을 텐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그냥 복도를 지나고 있던 중이었다.
“안녕.”
정말 거짓말처럼 노아 선배를 맞닥뜨렸다. 정갈하게 맨 넥타이며 하나로 묶은 은색 머리카락이 여느 때처럼 시선을 끌 만큼 아름다웠다.
나는 인사를 건네는 선배를 향해 여상스레 웃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노아 선배를 피해 다니는 것 역시 이쯤에서 관두기로 했다.
그냥 평소처럼 지내고 싶었다. 선배가 애인이 생긴다고 해서 연까지 끊을 이유는 없었으니까.
물론 좀 씁쓸해지는 건 각오해야겠지만.
책의 내용이 이루어지고 나서도 지인으로는 남을 수 있겠지?
뭐, 둘이 사귀게 되면 옆에서 박수나 짝짝 치고 있어야지.
그 자리에 서서 뜸을 들이던 선배가 문득 입을 열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네, 물어보세요.”
나는 두 손으로 들고 있던 책을 꼭 쥐고 최대한 선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모양 좋게 자리 잡은 입술이 두어 번 벙긋거리더니, 마침내 노아 선배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혹시 글로리아가 괴롭혀?”
“……네? 아뇨.”
멀뚱히 눈을 껌뻑거리던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저었다.
막말로 아직까지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까.
내 머리를 쓰다듬고 귀엽다고 하고 교실까지 데려다주고……. 이렇게 말하니까 되게 다정하게 들리네. 나한테는 호러였는데.
“귀, 귀엽다고도 해 주셨어요.”
내가 떠듬떠듬 대답하자 선배가 답하듯 중얼거렸다.
“꼴에 보는 눈은 있구나.”
“예, 예?”
꼴에, 요?
나는 선배의 말본새에 경악했다.
너 누구세요. 분명 노아 선배는 욕 따위는 쓰지 않는 젠틀 그 자체란 말이야.
“아니야.”
선배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그런다고 제가 들은 말이 없어지는 게 아니거든요.
“조심해, 걔 성격이 이상해.”
“그렇군요.”
이어진 선배의 말은 조금 납득할 수 있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던 내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끝인가요?”
내 물음에 귀엽게 입술을 몇 번 오물거리던 노아 선배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네가 귀여운 건 맞아.”
“…….”
꼴에 보는 눈은 있는 글로리아 선배와 노아 선배의 식견에 따르면 나는 귀엽단다.
뭔 소리야 이게.
나는 코끝을 움찔거리며 손목을 벅벅 긁었다. 설레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색하게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내가 속으로 곱씹었다.
귀엽다고…… 할 수 있지, 응.
글로리아 선배도 나한테 귀엽다고 한 적 있는데, 뭐.
나는 속으로 알아서 납득하며 선배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계속 보고 싶었지만 그건 실례라 중간중간 시선을 떼며 감상했다.
문득 차라리 그 책이 후회물이고 선배가 어마어마한 개새끼라면 어땠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럼 처음부터 좋아할 일도 없었을 테고, 정 떼기도 쉬웠을 텐데.
그런데 워낙 조용한 탓에 영 속을 알 수가 없어서 그렇지 선배는 보기 드물 정도로 좋은 사람이란 말이지.
그리고 사람이 설레는 말도 곧잘 하니까 내 심장이 이렇게 막, 쿵떡쿵떡하는 거 아니야.
“항상 느끼는 건데 선배는 말을 참 예쁘게 하시는 것 같아요.”
좀 과해서 설렐 정도로요.
마지막 말을 삼키고서 나는 눈알을 슬쩍 굴리며 작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고마워.”
약간의 비꼬는 의미도 있었는데 선배는 마냥 좋다고 웃었다.
황금색 눈이 반달로 접히는 그 웃음이 너무 순수하고 예뻐서 그냥 칭찬했다 쳤다.
그래요, 뭐. 선배가 좋다면 됐어요.
“음, 저 갈게요.”
군침을 쩝쩝 다시며 애써 웃던 내가 뒷목을 문지르며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그냥 말 걸고 싶었어.”
등 뒤에서 들린 노아 선배의 목소리에 그대로 돌아서던 내가 내 발에 걸려 휘청거렸다.
쓰러지기 전에 손을 뻗어 벽을 짚으려는데, 어째서인지 부유감이 느껴졌다.
“아…….”
커다란 손 하나가 내 허리를 부축하고 있었다.
어, 어떡해. 내 허리 더 굵어지지는 않았겠지?
나는 숨을 훅 들이켜고 재빨리 균형을 되찾으려 버둥거렸다.
“가, 감사…… 아니 그…….”
선배가 손을 놓고 나서도 천 너머로 느껴지던 감각이 선연해 괜히 몸을 배배 꼬았다.
노아 선배도 나 못지않게 놀랐나 보다. 나를 잡았던 손을 등 뒤에 숨기고 당황한 표정을 짓는 걸 보면.
하긴 애가 갑자기 이상한 스텝을 밟더니 넘어지려 그러는데 당연하지.
“……놀라게 해서 미안.”
또 지레 사과하는 우리 선배. 이렇게 착해서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 나갈꼬.
“가, 갈게요.”
나는 뒷걸음질을 치다 그대로 돌아서 빠른 걸음으로 도망쳤다. 기둥을 짚은 덕에 이번에는 비틀거리지도 않았다.
창피해 죽겠어.
노아 선배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오고 나서야 나는 손에 얼굴을 묻었다.
양 뺨이 뜨끈뜨끈하니 달아올라 있었다.
뭐지? 진짜 뭐지? 뭔데 저렇게 잘생기고 예쁜 거야,
……방금 나 좀 설레지 않았나? 솔직히 좀 좋았잖아.
나는 코를 긁적이며 생각했다.
그래, 그냥 즐기자. 계 탔다 생각하고.
주먹을 꽉 쥐고 잠시간 인상을 쓰던 내가 결론을 내렸다.
내가 뭐 특별하게 오해할 만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혼자서 저러는 거잖아. 날 찬 거나 다름없으면서 저러는 게 조금 괘씸하기는 하지만 응, 얼마 안 갈 테니 즐기자…….
“음.”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금세 안정을 되찾았다.
음, 그래. 그러면 되지.
갑자기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느낌이었다.
질투한답시고 나대지만 않으면 될 일을, 내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차피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주제에.
혼자 설레고 혼자 진정하고 별 난리를 다 치는구먼. 원래 사랑이 이런 건가.
나는 스스로가 한심하다 생각하며 머리를 긁적이다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