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퀭해진 얼굴로 하품을 했다.
“하암.”
밤새 잠을 설친 탓에 1교시부터 죽을 것 같았다. 잠 깨느라 물을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모른다.
뭘 먹으면 더 졸릴까 봐 점심도 거르고 벤치에 앉아 물로 배를 채우고 있었다.
“윽.”
구름이 바람에 흘러가자 가려져 있던 해가 드러났다.
쨍한 햇살은 이내 딱 좋은 정도의 온기를 나누어 주었다. 애석하게도 햇살이 따뜻하니 더 졸렸다.
가만히 앉아 있자니 눈이 멋대로 막 감기기 시작했다.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몸에 힘을 뺐다.
조금만, 조금만 눈 붙이자. 누가 깨워 주겠지…….
* * *
“흐업.”
나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생각보다 너무 오래 자 버렸다. 다행히 시계를 보니 아직 점심시간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도 잠시, 왜 불편한 벤치에서의 낮잠이 이리도 편안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일어났어? 조금 더 일찍 깨울 걸 그랬나.”
“……!”
내가 왜……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 있지?
등골이 서늘해졌다. 옆을 홱 돌아보았다.
그와 동시에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삐걱거리는 동작으로 입을 열었다.
“선배……?”
내가 베고 잤던 어깨의 주인은 바로 노아 선배였다.
짜잔.
나 설마 침 흘리고 잔 건 아니겠지?
나는 기겁하며 입 주변을 더듬었다. 다행히 내 얼굴도 선배의 어깨도 뽀송하고 깨끗했다.
“이게 무슨…… 상황이죠?”
“매점에 들렀다가 책을 돌려주러 왔더니 자고 있더라고.”
선배가 빌려 갔던 책을 내밀며 대답했다. 매점에서 사 왔는지 포장된 빵도 함께 있었다.
“벤치에 기대는 것보다는 내 어깨가 나을 것 같았어.”
설명하는 말투가 너무 덤덤해서 내가 괜히 과민 반응 하는 것 같았다.
“아, 감사합니다…….”
나는 머쓱한 얼굴로 엉망이 된 머리를 정리했다.
“점심은 왜 굶었어.”
“너무 졸려서…… 먹으면 수업하다 졸까 봐요.”
말하고 있자니 자꾸 하품이 나오려고 해서 고개를 숙였다.
내가 입가를 가리고서 중얼거렸다.
“이런 추태 보여서 죄송해요.”
“추태 아니야. 그리고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그냥 챙겨 주고 싶었어.”
노아 선배가 빵 포장지를 부스럭부스럭 뜯으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넌 그런 존재야.”
“……아, 제가요? 선배한테요?”
선배가 포장을 뜯은 빵을 건네며 한 말에, 나는 어벙한 얼굴로 되물으며 손가락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선배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입을 벌린 채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오우, 몰랐네요.”
일단 먹으라고 준 것 같으니 빵을 베어 물었다. 맛은 있었지만 옆에서 자꾸만 시선이 느껴져서 체할 것 같았다.
“그렇구나.”
나는 재빨리 혼자 되뇌며 선배의 말에 깊은 감명을 받은 척했다.
아무 반응이라도 보이지 않으면 분위기가 굉장히 이상해질 것 같았다.
“켁, 콜록.”
그렇게 먹다 보니 당연한 수순처럼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정말 고맙게도 점심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고, 나는 목구멍에 때려 부을 물과 돌려받은 책을 챙기며 선배에게 인사했다.
“이거 감사, 합니다, 콜록.”
그리고 잽싸게 교실을 향해 달렸다. 늦기도 했지만 먹다가 사레들린 게 창피하기도 해서였다.
“콜록, 콜록!”
달리면서 물을 마시니 또 사레가 들렸다.
“콜록, 콜록, 윽…….”
나는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얼굴이 뜨거운 건 아무래도 계속 기침을 해서겠지.
* * *
나는 교실 앞에 선 채 침을 꿀꺽 삼켰다.
글로리아 선배와 함께하는 두 번째 동아리 시간이었다.
다행히 지난 시간에는 아무 일도 없었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나도 내 삶이 있으니 무작정 따라다니는 건 힘들겠지만, 적어도 동아리 내에서 플로라 선배와 함께 있을 때 벌어지는 악행은 막을 수 있을 거다.
그런 생각을 하며 교실 문을 열자마자 먼저 와 있던 글로리아 선배와 눈이 딱 마주쳤다.
거짓말 안 하고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안녕.”
그녀가 눈을 휘어 웃으며 손짓했다.
“이리 와, 여기 내 옆에 앉아.”
유혹하는 듯한 목소리가 쓸데없이 고혹적이었다.
전설 속의 세이렌이 존재한다면 저런 목소리를 가지고 있을까? 가까이 가면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다가가고 싶은.
물론 이 경우에는 가까이 안 가도 위험하긴 하다만.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발을 내디뎠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지?”
하얗고 기다란, 검을 휘두르느라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이 내 머리카락을 슬쩍슬쩍 만지작거리며 정리해 주었다.
“네, 네에.”
“푸훗, 왜 무서워해.”
웃음소리가 꼭 무슨 현악기 같았다.
그녀가 나비처럼 풍성한 속눈썹을 장난스레 깜빡거렸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랬는데도 계속 시선이 느껴졌다.
위가 쓰려 오는 것 같았다.
“책은 읽어 왔어? 어우, 난 너무 어렵더라고.”
“그러게요. 저도…… 네.”
나는 애써 수긍하며 말끝을 흐렸다.
눈앞에 백금색 머리카락이 찰랑거리자 시원한 냄새가 풍겼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내 교복 냄새를 맡아 보았다. 기숙사 빨랫비누 냄새가 났다.
그나마 세탁한 지 얼마 안 돼서 빨랫비누 냄새라도 나는 거겠지.
플로라 선배는 장미꽃 향, 노아 선배는 재스민 향, 글로리아 선배는 쿨 워터 향.
선배들은 다 향기로운데 왜 나만 현실적이야.
나는 속으로 툴툴대며 불만스레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케이트는 매번 먼저 와 있네! 열심히 하는 것 같아서 보기 좋아.”
어느새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온 플로라 선배가 배시시 웃으며 내 등을 두드렸다.
나는 옅은 미소로 응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플로라 선배 옆에 서 있는 노아 선배를 보니 가슴이 살짝 아려 왔지만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글로리아 선배는 턱을 괴고 차가운 미소를 띤 채 노아 선배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치를 보던 내가 노아 선배와 플로라 선배를 향해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까 오늘 커플 룩이시네요. 아우, 너무 잘 어울리세요.”
자신의 옷을 슬쩍 내려다본 노아 선배가 멀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건 교복이야.”
“에이, 노아. 뭘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해. 케이트가 농담을 하나 보다.”
플로라 선배는 노아 선배를 한번 흘기고선 내게 웃어 주었다.
그러면서도 더 언급을 안 하는 걸 보니 정말 별로였구나.
그래, 이상하게 수작부리는 애보단 그냥 유머 감각 더럽게 없는 애가 되는 게 낫겠다.
아, 나 왜 나댔지.
옆에서 피식 소리가 나서 보니, 글로리아 선배가 애써 웃음을 참고 있었다.
“너랑 나도 커플 룩이네.”
“네…….”
나는 애써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전 그냥 두 분이 명찰까지 똑같이…… 달고 계시길래, 네.”
뭔가 변명을 해보려다 또 분위기가 싸해지길래 다시 입을 다물었다.
글로리아 선배가 제 넥타이를 쥐고 내게 속닥거렸다.
“우린 넥타이가 똑같다, 그지?”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재미없었다는 거 알겠으니까 이제 그만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