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110)

“흠흠.”

조금 편안해진 얼굴의 플로라 선배가 헛기침을 하더니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다들 책은 읽어 왔지?”

이제 시작이구나. 그런데 왜 벌써부터 이렇게 힘들지?

“응, 어렵더라. 고대어는 왜 섞여 있는 거래?”

글로리아 선배가 책 페이지를 팔랑팔랑 넘기며 투덜거리자, 플로라 선배가 웃으며 친절한 투로 설명했다.

“작가가 학위까지 있을 정도로 고대어에 정통한 사람이었거든.”

왜 마법과 문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에서는 고대어를 잃지 못하는 걸까.

나는 우울한 얼굴로 꼬불거리는 글씨를 내려다보았다.

“어우, 난 제목도 못 읽겠어.”

나는 글로리아 선배의 불평에 극히 동감했다. 옛날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삶을 살고 있던 걸까?

“하하.”

작게 웃은 플로라 선배가 흐르는 듯한 유창한 발음으로 제목을 읽자, 글로리아 선배가 놀란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와, 너 혼자 혀 구조가 다르니?”

나는 불현듯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참으며 입가를 가렸다.

나도 그런 생각 해 본 적 있는데.

“아냐, 노아도 잘할걸?”

부끄럽다며 손을 내저은 플로라 선배가 노아 선배를 가리켰다.

“한번 읽어 봐, 노아.”

노아 선배는 내 쪽을 흘깃 보더니, 시선을 책 표지에 고정한 채 제목을 읽었다.

“……우와.”

나는 놀람을 숨기지 못하고 입을 벌렸다.

발음이 굉장히 섹시했다. 그러니까 혀 놀림이…… 아니, 이렇게 말하니까 어감이 조금 이상하네.

혀 놀림…… 읽은 바로는 그것도 좋았었지, 아마.

“케이트? 뭐 해?”

“네, 네!”

멍을 때리다가 플로라 선배가 나를 세 번쯤 부르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나는 헛기침과 함께 뜨거운 양 볼을 만지작거렸다.

* * *

“잘 가, 다들 책 읽어 오는 거 잊지 말고!”

“네, 선배. 안녕히 계세요.”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려던 나는 교실 창으로 복도를 보고 흠칫했다.

늘 한산했던 동아리 교실 앞이 사람들로 우글우글했다. 그리고 대부분 여학생들이었다.

이게 웬일이람.

나는 평소와는 사뭇 다른 풍경에 당황하면서도 꾸역꾸역 교실을 나섰다.

“우왁!”

그러던 중 인파에 떠밀려 비틀거리던 나를 누군가가 부축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왼쪽 팔은 노아 선배에게, 오른쪽 팔은 글로리아 선배에게 잡혀 있었다. 양쪽 팔을 잡혀서인지 꼭 연행당하는 것 같았다.

“가, 감사합니다.”

미소를 띤 채 내 팔을 놓은 글로리아 선배가 한 여학생에게 다가갔다.

“너희 내가 따라다니지 말랬지.”

“에이, 선배니임.”

그랬다. 글로리아 선배는 어디까지나 내가 봤던 책 속에서나 악인이지, 남들이 봤을 땐 그냥 예쁘고 멋지고 가문 좋고 검술 잘하는 인기인이었다. 너무 잘나서 성격이 안 좋다는 뒷말이나 좀 붙은.

그 책을 몰랐다면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테지.

“저희랑 매점 가요, 네? 가뜩이나 사교 클럽 안 들어오신다고 해서 얼마나 놀랐는데요. 선배님 자리도 일부러 마련해 뒀는데.”

그 여학생이 속상하다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음, 어떡하지?”

내 쪽을 돌아본 글로리아 선배가 스산한 웃음을 흘리더니 내 손을 홱 잡아챘다.

“난 얘랑 약속이 있어서.”

“네?”

그거 금시초문인데요, 선배님.

내가 어벙하게 되묻자 푸른 눈동자가 나를 빤히 응시했다.

“혹시 시간 없니?”

“아닙니다!”

나는 사색이 된 얼굴로 즉답했다.

“시간이 있다는 거지?”

“아무렴요!”

노아 선배가 영 의심스러운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저, 저 가 볼게요.”

죄송해요, 선배. 선배 안 따라간다고 큰일 나지는 안잖아요. 이쪽은 큰일 나요.

“둘이 벌써 친해졌구나!”

그 와중에 플로라 선배는 나와 글로리아 선배를 보면서 기뻐하고 있었다. 부원이 늘어난 것이 적잖이 좋은 모양이었다.

“안녕, 플로라. 안녕, 노아스.”

그 둘을 향해 팔랑팔랑 손을 흔든 글로리아 선배가 몸을 팩 돌렸다.

“가자. 2학년 교실까지 데려다줄게.”

왜 선배들은 나를 데려다주지 못해서 안달인 걸까.

“아, 감사해요.”

갑자기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그렇게 무서운 사람은 아닌가?

그렇게 긴가민가하고 있는데, 글로리아 선배가 교복 주머니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친구, 이거 먹을래?”

그녀의 손에는 사탕이 들려 있었다.

설마 독 탄 건 아니겠지. 아니야, 먹을 거 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인데.

나는 버벅거리는 동작으로 사탕을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글로리아 선배가 안 먹느냐는 듯 푸른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

“…….”

강렬한 시선에 결국 나는 사탕 포장지를 주섬주섬 까서 입에 넣었다.

딸기 맛 사탕은 쓸데없이 맛있었다.

“그래? 다행이네.”

“앗.”

설마 내가 입 밖으로 냈나?

당황한 얼굴로 입가를 가리고 있는데, 글로리아 선배가 내 얼굴을 가리키며 유쾌하게 웃었다.

“하하, 얼굴 빨개.”

“하하…….”

나는 영혼 없는 얼굴로 웃음을 흘렸다.

정색했다 웃었다, 보통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게 조금 하릴없이 걷다 보니 2학년 층에 와 있었다.

“다, 다 왔네요.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이고 바로 꽁무니를 빼려던 그때였다.

글로리아 선배가 어쩐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를 불러 세웠다.

“얘, 있잖아.”

문득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본 내가 숨을 멈췄다.

글로리아 선배는 안하무인 깡패가 아니었다.

오히려 뒤에서 온갖 음모를 꾸며 놓고서는 플로라 선배의 곁에서 친구를 자처할 정도로 뻔뻔하고 악랄했다.

책 속의 그녀는 그야말로 철저하고 계산적인 악녀의 모습을 보여 주곤 했다.

그래,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꿀꺽.

나는 차갑게 식은 눈빛을 느끼며 침을 삼켰다.

가라앉아 짙어진 파란색 눈이 여전히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넌 걔랑 안 어울려.”

‘걔’가 누구를 지칭하는 건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알았다.

너처럼 볼품없는 애는 노아 곁에 설 자격이 없어, 뭐 그런 뜻이겠지.

역시, 드디어 본격적으로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 건가.

“그럼 수업 잘 들어, 예쁜아.”

글로리아 선배가 언제 싸늘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 싱긋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예쁜이라는 호칭이 원래 이렇게 살벌했던가? 원래 애칭 아니야?

“……안녕히, 가세요.”

나는 잘 떼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인사했다.

마지막으로 손을 흔든 글로리아 선배가 멀어져 갔다.

악녀 가라사대, 내 남자한테서 떨어져라.

나는 쪼그려 앉아 마른세수를 했다.

인생…….

“와, 이거 어떡해.”

찍혔다. 아무리 봐도 제대로 찍혔다.

나는 울상을 지으며 머리칼을 마구 헝클었다. 웃음기를 띤 푸른 눈을 떠올릴 때마다 심장이 거칠게 두방망이질을 했다.

아니, 친한 척하면서 사탕 줄 땐 언제고 갑자기 그렇게 무서워지기 있어? 강약 조절 장난 아니네.

입술을 깨물자 느껴지는 통증에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나라도 플로라 선배를 도와야 해. 글로리아 선배가 동아리에 들어왔으니 플로라 선배가 더 위험해졌다.

“그래…….”

아무리 글로리아 선배라고 해도 멀쩡한 귀족한테 막무가내로 나갈 수는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나는 플로라 선배만큼 눈치 없지 않으니까.

그러고 보니 책에 따르면 선배들은 다 완벽한데 딱 하나씩 다 부족하단 말이지.

플로라 선배는 조금 눈치가 없고, 노아 선배는 의외로 호구 기질이 조금 있는 것 같고, 글로리아 선배는 인성이…….

“너 거기서 뭐 해?”

“앗.”

어느새 생각이 딴 길로 빠져 버렸다.

교실에서 나온 도라가 나를 멀뚱멀뚱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도라의 옷깃을 쥐고 칭얼거렸다.

“너희 진짜 나 안 버릴 거지?”

“얘는 지난번부터 계속 뭐라는 거야.”

내 팔을 끌어당겨 나를 부축한 도라가 낑낑대며 핀잔을 주었다.

“일어나, 수업 가야지.”

“응…….”

나는 코를 훌쩍이며 머리를 흔들었다.

“보니까 동아리에서 무슨 일 있었네.”

맬러리가 내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처량한 얼굴로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했다.

“글로리아…… 선배가 들어왔어.”

“너네 동아리에?”

“웬일이래. 사교 클럽 일리아가 반드시 가입시키겠다고 난리던데.”

친구들은 조금 놀란 듯했지만 그뿐, 생각보다 덤덤한 반응이었다. 당연했다. 글로리아 선배의 실체를 알고 있는 건 나뿐이니까.

“사랑의 경쟁자가 생겨서 그래?”

“내 걱정은 안 되니?”

“그 선배가 잡아먹니?”

도라가 뚱한 표정으로 되묻자 맬러리가 맞장구를 쳤다.

“그래, 그 선배가 조금 인상이 살벌하긴 하지만 그렇게 기겁할 것까지야. 소문처럼 그렇게 무서운 사람도 아니라는 것 같던데.”

내 치마를 털어 주던 도라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조금 잘되나 했더니 그것도 아니구먼? 하여간 노아 선배도 이상해.”

그녀가 끝에 덧붙인 말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나는 배에 힘을 주고 꽥 소리 질렀다.

“선배 욕하지 마!”

“…….”

어이가 없다는 듯한 얼굴의 도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야,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도라가 내 엉망인 옷깃을 정리하며 날카롭게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보단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는 게 더 행복하대.”

“…….”

“이제 너도 새사람 찾는 게 어때.”

맬러리가 도라의 어깨를 두드리며 핀잔을 주었다.

“어우, 야. 새사람은 무슨…… 이혼한 것도 아니고.”

“고맙다.”

나는 얼굴을 문지르며 웅얼거렸다.

“수업 들으러 가자. 공부는 해야지.”

“맞아, 이번 범위 장난 아닐 것 같더라.”

표정을 갈무리한 내가 맞장구를 치며 발걸음을 옮겼다. 내 손은 아직도 친구들의 옷자락을 꽉 쥐고 있었다.

극악무도한 악녀 선배가 나를 찍고 지독하게 괴롭혀도, 너흰 나 외면하면 안 된다.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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