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110)

“으으…….”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고 비척비척 일어났다.

새벽까지 이상한 악몽에 시달리느라 잠을 설치다시피 한 탓이었다.

책의 내용들이 이상하게 뒤섞인 꿈이었다. 아직도 눈앞에 퇴학 통지서가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아직은 이른 시간이었지만 노아 선배를 피하려면 지금 나가야 했다.

“……뭐야, 너 벌써 가게?”

내가 내는 소리에 잠이 깼는지 도라가 눈을 비비며 잠긴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응, 깨워서 미안. 나 먼저 가 있는다.”

“몇 신데…….”

“아직 더 자도 돼. 넌 천천히 와.”

내 말을 알아들은 건지 도라의 숨소리가 점점 안정되더니, 이내 색색 코고는 소리만이 들렸다.

나는 가방에 책들을 쓸어 담고 방을 나섰다.

“하암.”

아무도 없는 빈 교실에 혼자 앉아 있자니 잠이 밀려왔지만, 가져온 책을 뒤적이다 보니 시간은 금방 갔다.

“흐암…… 컥.”

다시 한번 크게 하품을 하려던 내가 숨을 들이켰다.

교실 창 너머로 긴 은색 머리카락이 언뜻언뜻 흔들리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살그머니 근처 책상 아래로 몸을 수그리며 숨을 죽였다. 이로써 선배는 나를 볼 수 없다.

하하, 이번 학기부터 시간표가 바뀌었다고. 찾을 테면 찾아보시지.

“너 뭐 해?”

휘적거리는 동작으로 교실 문을 연 도라가 멀뚱한 얼굴로 물었다.

“쉿.”

그에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도라의 바로 뒤에 노아 선배가 있었다. 그녀의 키가 커서 새삼 다행인 부분이었다.

“케이틀린 친구 맞지?”

이 근처를 두리번거리던 노아 선배가 도라를 발견하곤 이쪽으로 걸어왔다.

히익. 나는 다시 몸을 움츠렸다.

“네. 케이트 찾으세요?”

고개를 끄덕인 노아 선배가 도라에게 물었다.

“어디 있는지 알아?”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그런데 케이트는 왜요?”

나와 잠시 시선 교환을 한 도라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도라 나이스.

노아 선배는 잠시 침묵하다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 얼굴 보고 싶어서.”

나는 숨을 멈췄다.

도라 또한 다소 멍한 얼굴로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렇군요. 보면 말씀드릴게요.”

“응, 귀찮게 해서 미안.”

도라는 노아 선배가 멀어져 갈 때까지 밖에 서 있다가, 이내 교실 문을 쾅 열어젖혔다.

들뜬 표정의 그녀가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야, 축하한다! 이게 무슨 일이냐.”

나는 묘한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그녀가 무슨 오해를 한 것이든 간에 아니라고 말해 줘야 하는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냥 기분이 굉장히 이상했다.

* * *

요 며칠 노아 선배를 피해 다녔던 나는 지레 찔려서 불안한 얼굴로 연신 시계를 확인했다.

일부러 동아리 시간보다 일찍 온 참이었다. 설마 지금 있지는 않겠지.

“안녕, 오랜만이네.”

……있구나.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의자에 앉아 있던 노아 선배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나는 어색한 동작으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되게 일찍 오셨네요.”

“너도.”

진정해. 평소랑 똑같이 행동하는 거야. 또 등신같이 이상한 짓 하지 말고. 혹시 왜 피해 다녔냐고 물어보면 모른 척, 모른 척…….

“저, 선배. 이거 저희 집에 놓고 가셨더라고요.”

엉거주춤 걸어간 내가 책상 위에 카드 모양 책갈피를 내려놓았다.

책갈피를 집어 든 선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까맣게 잊고 있었네.”

“그리고 이거요. 책갈피가 중간에 끼워져 있는 걸 보니 다 못 읽으신 것 같던데…….”

나는 말끝을 흐리며 선배가 읽다가 놓고 간 책을 내밀었다. 책을 받아 든 선배가 눈을 껌뻑거리더니 작게 웃었다.

“고마워. 마침 찾고 있었는데, 수도에서도 구할 수가 없더라고.”

“빌려드릴게요. 다 읽고 돌려주세요.”

나는 선뜻 웃으며 책을 내려놓았다.

마법 책만 읽을 것 같았는데, 선배 은근히 소설도 좋아하는구나. 하긴 그래서 동아리도 하는 거겠지?

저건 어렸을 때 내가 많이 읽던 책이었다.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내용의 로맨스 소설이었지만, 외울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왜냐하면.

“그거 저희 엄마가 쓰신 거예요.”

나는 책의 저자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니퍼 블레어. 보이시죠?”

선배가 부담 가득한 얼굴로 표지를 만지작거렸다.

“……이런 걸 나한테 빌려줘도 돼?”

“아빠 방에 몇 권이나 더 있어요.”

내가 괜찮다며 손사래를 치자 책을 받아든 노아 선배가 살풋 웃었다.

“고마워. 깨끗이 읽고 돌려줄게.”

나는 팔을 긁으며 가만히 침을 삼켰다.

이게 아닌데. 왜 피해 다녔나고 물어볼까 봐 자꾸 다른 말을 걸게 되네.

내가 의자를 끌어당겨 앉자 노아 선배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

“팔은 이제 괜찮아?”

“그럼요, 완전 멀쩡해요.”

나는 붕대를 푼 팔을 들어 보였다. 한 달 넘게 감고 있었기에 조금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예상보다 더 빠르게 나았어요. 원래부터 큰 상처가 아니기도 했고요.”

“다행이다.”

선배가 예의 그림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까 개학식 이후로는 처음 보네.”

“그, 그런가요.”

나는 어색하기 그지없는 동작으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요즘 잘 못 본 것 같은데.”

노아 선배가 조용한 어투로 넌지시 물었다.

“왜 그동안 피해 다녔어?”

“……!”

내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황금색 눈을 처연하게 두어 번 깜빡인 노아 선배가 물었다.

“혹시 내가…… 싫어?”

“아, 아뇨?”

싫을 리가, 오히려 그 반대지.

나는 머리카락이 공중에 휘날리도록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 다행이고.”

잠시 눈치를 보던 내가 입을 열었다.

“그, 그런데 왜 자꾸 데리러 오시는 거예요?”

노아 선배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보고 싶어서.”

나는 작게 숨을 들이쉬며 입술을 깨물었다.

저기, 갑자기 너무 훅 들어오시는데요.

그런 내 얼굴을 본 선배가 조용히 물었다.

“혹시 불편하면…….”

“음, 조금요.”

나는 선배의 눈을 슬금슬금 피하며 말을 이었다.

“선배도 선배의 생활이 있는데, 솔직히 죄송하고 부담스러워서요.”

슬쩍 올려다본 선배의 얼굴은 언뜻 보면 평소와 똑같아 보였다. 하지만 2년째 선배를 보아 온 나는 알았다.

눈썹이 미세하게 찡그려진 것으로 보아, 저건 언짢아하는 표정이란 것을.

너, 너무 나댔나.

잠시 말이 없던 노아 선배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감사합니다.”

됐다, 이로서 하나는 없앴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심했다.

“불편하다면 좀 더 빨리 말해도 됐을 텐데.”

불현듯 중얼거리던 선배가 민망한 듯 안경을 만지작거렸다.

“……허.”

나는 조그맣게 입을 벌린 채 들릴 듯 말 듯 탄식을 흘렸다.

아, 선배는 미안해하고 있는 거였구나. 이거, 괜히 또 내 쪽에서 미안해지네.

머쓱한 얼굴로 셔츠 깃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문가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 둘 다 일찍 와 있었네?”

누군가의 팔짱을 낀 플로라 선배가 생글생글 웃으며 교실로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케이트는 처음 보지? 자, 서로 인사해.”

“아, 안녕하세…….”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인사를 하려던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문가에 서 있는 건 긴 금발을 하나로 묶은 키 큰 여자였으니까.

그녀가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

신입 부원이라는 게, 글로리아 선배였어?

“이번 학기에 로웰 왕국에서 돌아온 글로리아야.”

플로라 선배가 뭐라 설명하는지는 잘 들리지도 않았다.

설마 벌써부터 플로라 선배를 찍었나? 아니면 노아 선배 때문인가? 혹시 둘 다인가?

아니, 그것보다 책 속에서 글로리아 선배의 동아리는 사교 클럽이었는데.

내가 혼란한 얼굴로 서 있는 사이, 글로리아 선배가 긴 다리를 뻗어 이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안녕, 네가 케이틀린이구나.”

“네……네!”

그녀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나는 작게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예상했던 것과 달리 내 손을 으스러져라 꽉 잡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온도가 낮은 손에서는 어딘가 두려운 오라가 풍겼다.

고수는 그런 하수 따위 쓰지 않는다는 건가.

그런데 왜 이쪽을 보고 저렇게 서늘하게 웃는 거지?

나를 대판 조질 생각을 하며 만족스러워하는 건가?

나는 어색한 웃음을 띤 채 그대로 서 있었다.

“흐응.”

글로리아는 한참 후에야 내 손을 놓고 작게 웃음을 흘렸다.

“안녕, 노아스. 우리 참 오랜만이다, 그렇지?”

노아 선배 앞 책상을 두 팔로 짚은 그녀가 생글 웃었다. 짙은 바다색 눈동자가 냉소를 띠었다.

“누가 자꾸 쥐새끼처럼 피해 다니는 바람에 말이야.”

악녀표 플러팅은 좀 살벌하구나.

다소 살벌한 글로리아의 플러팅에도 노아 선배는 천하태평 한 얼굴이었다.

“비켜.”

그러더니 한 술 더 떠서, 글로리아에게 명령조로 말하는 게 아닌가.

“뭐?”

“거기 케이틀린 자리야.”

아아, 그러지 마세요, 선배. 제발…… 그렇게 다정하게 제 팔자를 꼬지 말아 주세요.

손톱을 딱딱 깨물며 울상을 짓고 있는데, 글로리아가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푸흡, 푸하하.”

글로리아는 호탕하게 웃으며 찔끔 나온 눈물을 닦았다.

“아이고, 무서워 죽겠네. 알겠어, 알겠어.”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여전히 노아 선배를 날카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얘들아,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운 건 알겠지만 이제 앉을까?”

어색한 미소를 띤 플로라 선배가 둘을 중재했다.

“내가 너 봐서 참는다, 플로라.”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글로리아가 내게 손짓했다.

“여기 앉아. 자리 뺏어서 미안.”

“아, 아녜요. 그냥 거기 앉으세요.”

나는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고 후다닥 다른 자리에 눌러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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