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110)

* * *

마차는 꼬박 하루를 달려 겨우 아카데미에 도착했다.

울렁거리는 속을 부여잡고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도라의 얼굴이 보였다.

“야, 너 팔 다쳤다며.”

“뭐?”

그녀의 질문에 내가 어벙한 얼굴로 되묻자 도라가 두 눈을 깜빡거렸다.

“마물한테 당해서 팔 부러졌다면서.”

“진작 나았지. 도대체 어디서 무슨 말을 듣고 온 거야. 에코가 그러디?”

아니, 애초에 부러진 것도 아니거든?

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눈알을 굴리며 짐 가방을 꺼냈다.

“허어, 그래? 엄청 과장하길래 난 또.”

“그동안 잘 지냈어? 이모님은…….”

순서가 어째 잘못된 것 같지만, 어찌 됐든 오랜만에 만났으니 인사를 하려던 내가 멈칫하며 몸을 굳혔다.

교문을 향해 엄청나게 큰 마차 두 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각각 아이비 백작가와 유리엘 후작가의 문양을 달고 있어, 누가 타고 있는지는 유추하기 쉬웠다.

플로라 선배가 마차에서 내리자, 폭신해 보이는 분홍색 머리카락이 그녀를 따라 허공에 살랑거렸다. 부드러우면서도 아찔한 모습이었다.

이내 노아 선배의 모습도 보였다. 입 아프니 설명은 생략하겠다. 늘 그렇듯 눈부시게 예뻤다.

함께 서 있는 두 사람은 그야말로 반짝반짝 자체 발광을 하고 있었다. 그마저도 플로라 선배 주위로 사람들이 벌떼같이 모여들면서 이내 보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쪽을 못 봤는지, 인사가 없다.

아니지, 봤다고 해서 인사할 이유도 없지만.

나는 잠시 두 사람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마침 도라가 로웰 왕국에 다녀온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로웰 왕국 귀족들이 그렇게 잘생겼더라.”

“아하.”

어쩐지 그녀의 얼굴이 쫙 폈더라. 그런 이유에서라면 납득이 갔다.

“한 달 동안 눈 호강이나 하고 왔지. 영애들도 엄청 예쁘던데?”

도라가 회상하듯 눈을 감고 웃음을 흘렸다.

그쯤 되니 나도 궁금해져 더 말해 보라고 하려는데, 그녀가 갑자기 진지해진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야, 나 그 사람도 봤다?”

“누구?”

갑자기 낮아진 그녀의 목소리와 분위기에 내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 왜 있잖아, 작년 2학기에 로웰 왕국 신학교에 교환 학생으로 갔던 선배. 이번 학기에 돌아온다는.”

도라가 이름을 떠올리려는 듯 인상을 쓰며 관자놀이를 문지르다가, 손가락을 뻗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맞다, 저 사람!”

“음?”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좇아 시선을 돌리자, 아이비 백작가와 유리엘 후작가에 버금가는 규모의 커다란 마차가 보였다.

그 앞에 서 있는 키 큰 백금색 머리카락의 여학생도.

하얀 마차 겉면에 새겨진 커다란 사자의 문양도 이목을 집중시켰지만, 그것보다도 더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그녀의 외모였다.

둥근 어깨선을 따라 폭포처럼 쏟아지는 반짝이는 백금색 머리칼, 차가운 바다색 눈동자. 세상 혼자 사는 것처럼 우월한 외모였다.

셔츠 단추는 대충 풀어져 있었고 넥타이도 어딜 갔는지 없었지만 그마저도 그녀에게 무척 잘 어울렸다.

여학생의 눈부신 미모에 감탄하며 당황스레 눈을 끔뻑이던 내가 입을 살짝 벌렸다.

아, 기억났다.

검술학부 3학년 글로리아 루피너스.

재무 대신의 딸이자 명문가인 루피너스 후작가의 소가주인 그녀는 한때 노아 선배와 혼담이 오가던 사이였다.

내가 읽었던 책 속에서 아직도 선배에게 미련이 남아 집착하며 플로라 선배를 괴롭히던 악역이기도 했다.

그녀의 괴롭힘은 성적 관련 수작질과 따돌림, 교수 매수 등 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큰 스케일을 자랑했다.

한마디로 반드시 피해야 할 인물들 중 하나였지만, 지금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와, 겁나 예뻐.

나는 입을 헤벌리고 글로리아 선배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웬만해서는 이런 말 잘 안 하는데, 감히 노아 선배와 비빌 수 있는 미모였다.

나야 그녀의 얼굴에 헬렐레했지만 도라는 다소 다른 쪽으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도라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검을…… 닦고 있네.”

길쭉한 은빛 검신이 여름 햇살에 비춰져 번쩍 하고 빛났다.

우리는 동시에 침을 꿀꺽 삼켰다.

도라가 미약하게 몸서리를 쳤다.

“어우…….”

사실 소설을 읽기 전부터 나는 글로리아 선배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제국을 주름잡는 가문의 장녀인데 당연하지.

하지만 학년이 다른 데다 그녀가 로웰 왕국에 일 년 동안 교환 학생으로 떠나 있던 탓에 한 번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아무래도 고위 귀족이다 보니 다가가기 어렵기도 했다.

심지어 성격이 그다지 좋지 못하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책에서 그걸 사실이라고 못 박아 버린 것이다. 무서워.

“왕국에서 만났다며. 인사도 안 했어?”

“아잇, 뭔 인사를 해. 친하지도 않은데.”

자신은 피하기에 바빴다며 도라가 몸을 파드득 떨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다시 시선을 교문 쪽으로 돌렸다.

검을 검집에 집어넣은 글로리아 선배가 긴 다리를 우아하게 뻗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플로라.”

그런 그녀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플로라 선배였다.

글로리아 선배가 말을 걸자마자, 플로라 선배를 둘러싼 인파가 순식간에 뒤로 물러났다.

“리아! 보고 싶었어. 잘 지냈지?”

아무것도 모르는 플로라 선배는 그저 웃으며 글로리아 선배의 손을 잡았다.

안 돼요. 도망쳐요, 선배.

어떻게 보디랭귀지로라도 그녀에게 알릴 방법이 있으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거리가 너무 멀었다.

고로 나는 발만 동동 구르면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나야 늘. 반갑다.”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플로라 선배와 인사를 나눈 글로리아 선배가 눈알을 도르륵 굴려 노아 선배에게 고정했다.

“그리고 노아스 너도.”

새파란 눈동자가 가늘게 휘어졌다.

“나 없는 새 아주 잘 지냈나 봐. 좋아 보이네.”

알고 있었지만 역시 그랬군.

나는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쭙잖게도 동병상련 같은 것이 느껴졌다. 스케일과 수준의 차이지, 그녀나 나나 비슷한 역할이니까. 최후가 퇴학인 것도 똑같고.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노아 선배는 고개를 살짝 까딱하는 것 외에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까칠하긴.”

건조한 반응에 모양 좋게 자리 잡은 입술이 예쁜 곡선을 그렸다.

마지막으로 플로라 선배에게 웃어 보인 글로리아 선배가 검을 찬 채로 몸을 돌려 떠나갔다.

“푸헙.”

그녀의 모습이 멀어지자마자 나는 참고 있던 숨을 토해 냈다.

갑자기 분위기가 탁 풀린 것 같았다.

“어우.”

도라가 왜 그리 몸서리를 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고 생각하며, 나는 내려놓았던 가방을 집어 들었다.

“케이트!”

도라를 따라 본관으로 들어가려는데,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았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노아 선배의 얼굴이었다.

“안녕…….”

“케이트, 오랜만이야! 잘 지냈지?”

나지막한 노아 선배의 인사는 플로라 선배의 우렁찬 인사에 묻혀 버렸다.

“아, 안녕하세요.”

나는 도라에게 먼저 들어가라 손짓하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괜찮아? 노아가 그러는데 다쳤다며.”

눈썹을 내려뜨린 플로라 선배가 내 팔을 살며시 쥐었다.

“내가 있었으면 치료해 줄 수 있었을 텐데.”

“에이, 아니에요. 신성력을 그런 데 낭비하면 안 되죠.”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뒷짐을 졌다.

“노아가 방학 동안 너희 영지에 있었다면서. 나 빼고 노니까 좋았어?”

플로라 선배가 짓궂게 웃으며 입가를 가렸다.

아니라고 부정하려는데, 곧바로 다음 화제로 넘어갔다.

“아참, 좋은 소식이 있어.”

“네?”

“흐흐.”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린 선배가 뿌듯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새로운 부원을 모았어. 우리 이제 4명이나 된다?”

“와아?”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눈알을 도륵 굴렸다.

여전히 웃음을 띤 플로라 선배가 다정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착하고 좋은 아이야. 다음 시간에 소개시켜 줄게.”

“그, 그렇군요.”

“좋은 소식이지?”

나를 바라보는 연하늘색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그, 선배. 사실 저는…….”

나는 뒷말을 흐리며 노아 선배를 힐끔거렸다.

내가 탈퇴하는 것에 대해 플로라 선배만큼 강경히 반대하진 않았던 선배였기에 뭐라 한마디 해 주기를 기대했건만, 노아 선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사실 지금이라도 탈퇴하겠다고 말할 수는 있었다. 동아리라는 연결 고리가 없으면 노아 선배와도 플로라 선배와도 마주칠 일 없겠지. 자연스럽게 예언서의 내용에서도 벗어나게 될 테고.

“응? 무슨 일이야?”

그러나 플로라 선배의 웃는 얼굴을 보자마자, 거짓말처럼 그녀가 당하게 될 온갖 괴롭힘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지독한 죄책감이 느껴졌다.

아, 선배…… 선배.

“자, 잘됐네요!”

나는 속으로 울음을 삼키며 웃음을 지었다. 한쪽 손으로 엄지까지 치켜들면서.

“그렇지? 너도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어.”

예상대로 플로라 선배는 세상 행복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혹시 내가 다른 말 못 하게 저러는 건가 생각이 들 정도로 해맑았다.

“아, 이제 들어가 봐야겠다. 안녕, 케이트.”

“안녕.”

플로라 선배에 이어 노아 선배도 인사하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반쯤 해탈한 얼굴로 마저 인사를 하다가 둘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무렵, 그대로 주저앉았다.

아오, 이놈의 오지랖.

“아으…….”

이 호구야.

나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아니 그런데, 솔직히 아는 사람이 괴롭힘을 당하는 걸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건 사이코패스잖아.

조금씩 봐 가면서, 진짜 심하다 싶으면 슬쩍 피하게 해 드려야지.

아무리 그래도 선배가 당하는 걸 그냥 두고 볼 순 없어. 암, 그럼 인간 말종이지.

그래, 너무 자책하지 말자. 아직 늦지 않았어. 진짜 너무 거지같으면 그때 가서 탈퇴하는 거야.

“아.”

개학식 늦겠다.

열심히 자기 합리화를 하다 문득 시계를 확인한 나는 가방을 들고 부리나케 본관으로 들어갔다.

“왜 이렇게 늦었어. 교수님이 눈치 주시는 거 봤어?”

“에이, 아직 시작 안 했잖아.”

고맙게도 내 자리를 맡아 준 친구들에게 웃어 보이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너 팔…….”

맬러리가 입가를 가린 채 중얼거렸다.

내 팔 다친 게 최고의 이슈라니 도대체 얼마나 재미없는 방학을 보낸 거니.

“보다시피 멀쩡해.”

가느다란 흉터가 남은 팔을 들어 보이자, 고개를 끄덕인 맬러리가 말을 이었다.

“에코가 그러는데, 너희 영지에 마물이 나타났고 노아 선배가 토벌하러 왔다며?”

“뭐? 그런 말은 안 했잖아.”

도라가 두 눈을 흥미로 빛내며 고개를 홱 돌렸다.

나는 진정하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아니, 그러니까…….”

땡땡땡.

유리종이 맑은 소리를 내자, 시끄럽게 떠들던 학생들이 삽시간에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한 달간의 방학은 잘 보내셨는지요?”

단상 위로 올라온 교장 선생님이 인자한 얼굴로 연설을 시작했다.

학생들의 원망 어린 시선이 보이지 않는지, 몇 분이 되도록 교장 선생님의 훈화는 계속 이어졌다.

슬슬 학생들의 눈이 풀려 갈 무렵, 나도 몸에 힘을 빼고 의자에 늘어졌다.

저는 아카데미의 미래 비전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습니다.

점심 언제 먹나, 시계를 찾아 눈알을 굴리던 그때였다.

“헉!”

몇 줄 앞에 있는 글로리아의 새파란 눈동자가 이쪽을 향해 있었다.

순간 번개를 맞은 느낌이었다. 거짓말 안 하고 비명을 지를 뻔했다.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사회적인 자살을 하고 싶지 않아 가까스로 참았을 뿐.

글로리아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나는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늘어져 있던 몸에 힘이 팍 들어갔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글로리아는 돌아서 있었지만, 아직도 나를 바라보던 파란 눈동자가 눈에 선했다.

나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왜?”

왜, 왜? 나 저 선배 모르는데? 말도 섞어 본 적 없는데? 아니, 얼굴 제대로 본 것도 오늘이 처음인데?

나는 입술을 마구 짓씹으며 몸을 바르르 떨었다.

맙소사, 혹시 지난 학기에 소문난 거 아냐? 나랑 노아 선배랑 계속 같이 다녔다고?

망했군.

나는 조용히 머리를 쥐어 싸맸다.

사실 눈 한 번 마주친 거 가지고 이러는 게 조금 과민 반응 같기는 하지만, 무서운 걸 어쩌냔 말이다.

“아야, 씁.”

어쩐지 입술이 따끔하더라니, 찢어져서 피가 나고 있었다.

나는 찢어진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인상을 썼다.

이런 나약한 정신으로 플로라 선배를 도우려 했다니.

아냐, 너무 나대지만 않으면 괜찮을 거야, 너무 나대지만 않으면…….

그래도 따돌림은 조금 무서운데.

나는 처량한 얼굴로 도라를 돌아보았다.

“너네 나 안 버릴 거지……?”

“얘가 미쳤나.”

평소와 똑같은 도라의 한마디에 조금 안심이 되는 것도 같았다.

나는 두 손을 맞잡고 속으로 계속해서 되뇌었다.

쫄지 말자, 쫄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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