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열심히 말을 붙이고 대화를 나누다 보니 다행히 어색한 기류는 시내까지 가는 사이 많이 풀렸다.
주중이고 식사 시간도 아니다 보니 시내는 제법 조용해 걷기 좋았다.
나는 가라앉은 눈으로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노점이 늘어져 있는 시내, 건물 너머로 보이는 너른 하늘.
전부 얼마 전 노아 선배가 있었던 풍경이었다.
“솜사탕?”
“음, 그래…….”
아르한의 질문에 멍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던 내가 저 멀리 보이는 몽글몽글한 분홍빛 뭉치로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 오늘은 그 참한 총각이랑 안 왔네요?”
돈을 받은 노점상 아저씨가 솜사탕을 건네며 한 말이었다.
“……예?”
“왜 그 있잖아요, 머리 하얗고 길고…….”
“아.”
나는 한 손에 솜사탕을 든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방금까지 노아 선배 생각을 하던 걸 들켜 버린 것 같았다.
“흐음.”
고개를 숙여 솜사탕을 한입 베어 문 아르한이 입술 주위를 싹 핥더니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소릴까.”
“아, 아니 그게.”
“마물 토벌하러 왔다더니 그게 아니라 데이트를 했네?”
약간의 오해의 소지가 있는 발언에, 솜사탕을 만들던 노점상 아저씨가 이쪽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 저 바람피우는 거 아니에요, 아저씨.
“아무리 그래도 너무한 거 아니야? 모처럼 나랑 놀러 나왔는데.”
마구 흔들리는 내 눈빛을 본 아르한이 눈썹을 내려뜨리며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그런 게 아니라고 변명하려는데, 어깨를 으쓱한 아르한이 내 손을 끌어당기며 다시 여상히 웃었다.
“이제부터 그 사람 생각은 하나도 안 나게 해 줄게.”
나는 멍한 얼굴로 아르한이 먹여 주는 솜사탕을 베어 물었다. 어째 지난번에 먹은 것보다 더 달았다.
“이크, 여기 묻었다.”
아르한이 솜사탕이 묻었다며 내 입술 옆을 문지르며 작게 웃었다. 그러는 아르한의 입가에도 솜사탕이 묻어 있었다.
“음, 못생겨졌다.”
하지만 얼굴이 잘났으니 이 정도 흠결은 괜찮지.
그에 나는 킬킬 웃으며 아르한의 입술을 꾹꾹 눌렀다.
“아.”
부끄러운지 붉어진 얼굴로 다 먹은 솜사탕 막대기를 휘휘 돌리던 아르한이 내게 물어 왔다.
“이제 뭐 할래.”
“네가 가고 싶은 데 가.”
“으음…… 글쎄. 아무래도 누나가 제일 가고 싶어 할 곳은, 서점?”
“오…… 아니, 네가 정하라니까.”
나는 순간 감탄하려다가 말고 아르한의 어깨를 두드렸다.
“혹시 그 사람이랑도 서점 갔어?”
“음, 응.”
‘그 사람’ 이 누구를 지칭하는지는 알겠다. 아르한이 왜 자꾸 노아 선배를 신경 쓰는 건지는 정말 모르겠지만 말이다.
“자꾸 노아 선배랑 널 비교하지 마.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네가 그러니.”
“으응, 그치만 그 사람 생각 하나도 안 나게 해 주기로 약속했잖아.”
일순 시무룩한 표정에 마음이 약해졌다.
“알았어, 알았어. 자, 가자 가자.”
결국 우리는 시내 끄트머리까지 돌아다니며 디저트를 사 먹었다.
아르한이 케이크며 쿠키며 사탕이며 온갖 것들을 내 입에 넣어 주었는데, 정작 본인은 하나도 안 먹고 흐뭇하게 날 보고 있는 게 조금 부담스러웠다.
“아, 배불러.”
그래도 밥은 내가 샀으니 다행이다.
나는 빵빵해진 배를 문지르며 식당을 나섰다. 하마터면 배가 불러서 저녁도 못 먹을 뻔했지 뭔가.
아르한 이 녀석, 언제부터 내 취향을 이렇게 빠삭하게 알고 있던 거지?
“너 나중에 연애 참 잘하겠다, 야.”
그 말에 아르한은 잠시 멍해지더니 침묵을 고수했다.
얼마 후 아르한이 살풋 웃으며 대답했다.
“누나가 그렇게 생각해 준다니 다행이네.”
저 녀석은 분명 좋은 사람 만날 거다.
나는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길을 따라 걷다가, 문득 낯익은 건물이 눈에 들어와 멈춰 섰다. 제법 진지한 내 표정에 아르한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나는 오래된 약국의 창문 안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오늘도 안 계시네.”
작게 중얼거린 내가 몸을 돌렸다.
“원래 올 때마다 안 계시잖아.”
아르한이 기운 내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도.”
방학 동안 얼굴 한 번쯤은 뵙고 싶었는데.
나는 우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외할머니는 엄마가 죽고 나서부터 댁에 계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방랑벽이라도 생기셨는지 약국 문을 닫고 이 영지 저 영지 돌아다니시곤 했다. 그것도 혈혈단신 혼자서.
“자.”
아르한이 내가 우울해하는 걸 보고 아이스크림을 사 왔다.
“너 정말…… 좋은 애구나.”
나는 감격에 휩싸여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달콤한 맛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하늘이 주홍 노을로 물들어 가기 시작할 때쯤에야 우리는 집으로 돌아갔다.
“너무 오래 논 거 아냐? 너 집에 갈 수 있겠어?”
“재워 준다는 뜻인가?”
“그건 아니고.”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며 나무가 울창한 그라니아 숲을 지나는데, 나도 모르게 불안해져서 아르한의 팔을 홱 끌어당겼다.
“조심해. 저기 이제 한 달간은 통행금지야.”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인 아르한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누나는 슬프지 않아? 나름 우리의 추억의 장소잖아.”
“그것도 그렇긴 한데, 아무래도 다시 발 들이기는 좀.”
어렸을 적 아르한과 사과 따먹으며 놀았던 기억이 있기는 했지만, 나는 달콤한 사과보다는 징그러웠던 마물의 모습을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도대체 온 대륙에서 마물이 판치던 제2시대에는 어떻게 사람이 살았던 걸까.
“참 신기해.”
그렇게 중얼거리던 내가 옷깃을 여몄다. 여름이라 괜찮을 줄 알고 얇게 입었는데 조금 쌀쌀했다.
아빠가 보면 또 잔소리하겠네.
“어, 벗지 마, 벗지 마.”
아르한이 제 겉옷 단추를 푸는 것을 본 내가 황급히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아르한은 기어이 벗은 겉옷을 내 어깨에 걸쳐 주며 웃었다.
“자, 레이디.”
“오…… 이러지 않아도 되는걸요, 기사님.”
나는 장단을 맞춰 주며 곤란한 얼굴로 신음하다 말고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걸어온 거리가 꽤 되었기에 저택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정도면 내 빈약한 마력으로도 두 명이 이동할 수 있을 것이다.
“기분이다, 내가 텔레포트 써 줄게.”
“아냐, 난 괜찮아. 하나도 안 추운데.”
“스읍, 누나가 해 준다면 얌전히 받아.”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아르한은 뻘쭘한 얼굴로 다시 겉옷을 받아 갔다.
마법진이 완성되자 밝은 초록색 빛이 번쩍하더니 시야가 뒤집혔다.
“으악!”
내가 좌표를 대충 잡은 바람에 우리는 연무장 한가운데로 이동했고, 훈련을 하던 기사들이 기절초풍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기사들에게 사과를 하고 아르한을 배웅하고 나니 벌써 오후 8시였다.
“아가씨, 머리는 말리셔야지요.”
머리를 감고 바로 침대에 누운 나를 본 리타가 한숨을 폭 내쉬며 수건을 건넸다.
베개가 축축하게 젖어 드는 건 나도 사양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나는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어 말리다 말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이 마치 솜사탕 같았다.
아까 먹었던 솜사탕의 단맛이 아직도 입 안에 남아 있는 듯했다. 초콜릿케이크도, 초코칩쿠키도, 바닐라아이스크림도.
나열해 놓고 보니 너무 많이 먹었네, 살찌는 거 아니겠지 나.
아, 아르한은 내가 뭘 좋아하는지 너무 잘 안다. 이 자식, 언제 그렇게 커 버렸담.
아르한이 잘못한 건 없는데도 갑자기 원망스러워졌다.
나는 불안한 얼굴로 배를 문질렀다.
* * *
남은 방학은 무척 빠르게 지나갔다.
수식도 많이 외우고, 숙제도 다 했고, 가끔씩 찾아오는 아르한도 상대해 주고, 산 책도 읽으면서 나름 알차게 보냈다.
아, 그리고 붕대도 풀었다. 가는 흉터가 실처럼 남아 있긴 했지만 이제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그렇게 적어도 2주 동안은 노아 선배 생각이 안 났다. 아마도.
눈에 보이지가 않아서 그런 걸까. 잠시 비참하고 달콤한 꿈을 꾼 기분이었다.
하지만 꿈은 언제나 깨기 마련이니까.
“지금 가면 겨울 방학은 언제 하니?”
그렇게 말하는 아빠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가방을 메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번에는 날짜 헷갈리지 마.”
마부 톰슨이 어서 타라며 고갯짓하길래 서둘러 마차에 올라탔다.
조그만 창밖으로 아빠와 고용인들, 기사들이 보였다.
“잘 지내요, 경들!”
나는 아쉬운 표정의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제온 경이 손수건을 물어뜯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 내 손에는 새빨간 색의 양장책이 들려 있었다.
이내 나는 창밖에서 시선을 떼며 침을 꿀꺽 삼켰다.
포장되지 않은 길을 지나던 마차가 마구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