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110)

“너……너 이…….”

“오렌지 맛 말고, 그 옆에 있는 거 주라.”

아르한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뻔뻔한 얼굴로 명령했다.

치맛자락에 손을 문질러 닦던 나는 체념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며 버터쿠키를 집어 들었다.

“그래, 다 먹어라 다.”

네 맘대로 하라며 입에 쿠키를 넣어 주는데, 이번에는 쿠키만 이빨로 쏙 빼가는 게 아닌가.

뭐야, 이거 왜 이래?

눈썹을 꿈틀거리며 손을 슬쩍 내리는데, 과자를 씹던 아르한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기대했어?”

“……꺼져!”

나는 제법 힘이 들어간 동작으로 아르한의 팔을 찰싹 때렸다.

“아야야.”

다 자란 녀석이 그 큰 덩치를 웅크리며 엄살을 부리는 모습이 그렇게 징그러울 수가 없었다. 어렸을 땐 그래도 좀 귀여웠는데.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지루해.”

잠시 허공을 향해 멍을 때리던 나는 책을 집어 들고 찌뿌드드한 몸을 일으켰다.

아르한이 양산을 뒤로 젖히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벌써 가려고?”

“응, 솔직히 재미없다. 붕대 때문에 뭐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나는 지루함에 하품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치마에 묻은 과자 부스러기를 탁탁 털었다. 한숨 섞인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그냥 다, 부질없는 것 같아.”

아르한이 양산을 접더니 내 옆 의자에 털썩 앉았다.

“누나 요즘 좀 이상해.”

“야, 내가 뭘…… 어쨌다고.”

나는 말끝을 흐리며 뒷짐을 졌다. 갑자기 찔렸다.

그 책을 읽은 후로 허탈함에 조금 기운 없어지긴 했지. 원래도 가망 없는 감정이라 생각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게 기정사실이 되니 조금 우울해서.

어색한 동작으로 목 뒤를 만지작거리던 내가 아르한을 힐끔 곁눈질했다.

“어휴.”

“……뭐 해?”

나는 녀석의 얼굴을 부여잡고 한숨을 내쉬었다.

넌 아무것도 몰라, 인마.

당황스레 눈을 깜빡이던 아르한이 피식 웃으며 내 손에 얼굴을 부볐다.

“내 얼굴이 마음에 드나 봐?”

“아니……솔직히 그건 아니고.”

입이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지.

나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그 선배 같은 얼굴이 좋아?”

아르한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으나 눈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음.”

선배…… 선배 얼굴 잘생겼지.

진지한 표정으로 턱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옆에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진짠가 보네.”

머리를 길러 볼까.

아르한이 제 짧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중얼댔다.

“야, 너도 잘생겼어. 기죽지 마.”

살짝 풀이 죽은 그 모습이 안타까워 나는 한마디 툭 던졌다.

“거짓말하는 거 아니고?”

“설마 아무도 안 알려 줬어?”

그럴 리가 없는데.

아르한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내가 붉은 눈과 눈을 맞추고 똑바로 말했다.

“너 잘생겼다니깐.”

“…….”

적색 눈이 몇 번 껌뻑거리더니 하얀 얼굴에 붉은 기가 돌았다.

자식, 부끄럽냐.

“……누나도 예뻐.”

“뭐? 푸흡.”

한참 후에 아르한이 조그맣게 내놓은 대답에, 나는 그만 크게 웃고 말았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긴.”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피식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까 우리 지금 둘 다 땡볕에 서서 뭐하는 거지.”

나는 붕대를 감지 않은 손을 들어 햇빛을 가렸다.

“양산…….”

“아냐, 나 갈 거야. 젠킨슨 영애한테 인사만 하고.”

양산을 들려는 아르한을 마다한 나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고맙다, 그래도 오늘 네 덕분에 조금은 재미있었어.”

그래도 집은 갈 거지만.

우리 가문 마차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던 내가 아르한을 향해 몸을 돌렸다.

“너무 아쉬워하지 마. 아카데미에서 볼 거잖아, 그렇지?”

나는 붉은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리며 개구지게 웃었다.

“뭐, 여차하면 네가 우리 집으로 놀러 오던가.”

“……응.”

언제 멍하니 있었냐는 듯 아르한이 그림 같은 미소를 지었다.

“조만간 갈게.”

* * *

그리고 며칠 뒤 아르한은 진짜로 놀러왔다.

“이야, 진짜 왔네.”

나는 저택 문으로 들어오는 아르한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아르한이 눈을 찡긋거리며 웃었다.

“누나가 안 오니까 내가 올 수밖에.”

“넌 꼭 놀아야 하는구나.”

그 전에 숙제는 다 했겠지?

내가 응접실로 향하다 말고 아르한을 향해 짐짓 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다 했어……. 누나랑 있으면 가정교사랑 있는 기분이야.”

아르한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 볼멘소리를 했다.

“팔은 아직도 안 나은 거고?”

“음, 완전히 나으려면 이 주 정도는 더 있어야 돼. 개학 전에는 풀겠지.”

나는 팔에 감은 붕대를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응접실에 들어서자마자 소파에 엉덩이를 붙인 아르한이 투정을 부렸다.

“마차를 대는데 글쎄, 제온 경이라는 사람이 나를 엄청나게 노려보지 뭐야.”

“저런, 그랬어? 그러면 안 되지.”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아르한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르한은 귀족, 그것도 백작가의 영식인걸.

“누나네 기사는 날 너무 싫어해.”

“그런 것 같더라.”

아르한이 투덜거리자 나는 순순히 인정하다가도 고개를 갸웃했다.

제온 경은 까닭 없이 저럴 사람이 아닌데.

“네가 열네 살 때 둘이 대련하다 네가 이긴 후로 쭉 그러는 것 같긴 해.”

손도 못 써 보고 졌지.

내가 말하자 아르한은 의미심장한 투로 중얼거렸다.

“글쎄, 정말 그것 때문일까?”

“그냥 귀엽게 봐줘. 경은 우리 가문 기사잖아.”

“귀엽게…….”

아르한이 머리를 흔들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가 소파에 거의 늘어져 있는 나를 보더니 헛기침을 했다.

“음, 사실 놀러 가자고 나온 건데.”

그에 나는 힘이 다 빠져 공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지금은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고, 어제 늦게 자는 바람에 졸리기까지 했다.

“그래……? 네가 업어 주면 갈 수 있을 것 같기도.”

“나 허리 아작 나는 거 아냐?”

“죽고 싶냐?”

나는 웃는 얼굴로 아르한을 노려보았다.

“그 사람이랑은 나갔다며. 왜 나는 안 돼?”

아르한이 소파 등받이에 기대어 불만스러운 얼굴로 툴툴거렸다.

“누나는 그 사람보다 나랑 더 친하잖아.”

그 말에 침대를 굴러다니던 내가 멈칫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 노아 선배랑도 나갔는데 아르한이랑 못 나갈 이유는 없지.

“그래, 나가자. 뭐 할래?”

나가서 뭐라도 사 먹으면 기운이 나겠지.

나는 흐느적거리는 동작으로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차라도 올리라고 해야 했는데. 누나가 나가서 사 줄게.”

여기까지 왔는데 여태 차 한잔도 못 마셨네. 미안해라.

나는 아르한의 등을 두드리며 방을 나섰다.

“누나가 나랑 가 주기만 한다면 사 주는 건 내가 할 수 있지.”

아르한은 내 어깨를 끌어안더니 신이 난 듯 두 눈을 휘었다.

아, 무거워.

“좋다, 오랜만에 누나랑 나가고.”

“그래, 좋겠네. 진정해.”

결국 그렇게 좋다고 팔짝팔짝 뛰던 아르한은 내 방 문턱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워.”

나는 넘어지려는 아르한의 허리를 홱 붙잡아 부축했다.

어렸을 때와는 달리 몸도 커지고 근육이 붙은 바람에 제법 힘이 들었다. 손에 감겨 오는 허리의 감촉이 탄탄했다.

“……!”

화들짝 놀란 아르한이 뒷걸음질 치더니 몸을 홱 돌렸다. 빨간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귀가 붉었다.

내가 허리 부분의 셔츠 자락을 와락 잡아당기는 바람에 셔츠 단추 몇 개가 풀려 있었다.

나는 벌어진 셔츠를 보며 눈을 굴렸다.

“음…… 요즘 날씨가 좀 덥긴 하다만, 그렇게 나가려고?”

뻘쭘하게 머리를 긁적이던 내가 말하자 뻣뻣하게 걸어가던 아르한이 서둘러 옷 단추를 채웠다.

“……가자.”

옷깃을 여민 아르한이 웅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에 나는 씩 웃으며 그를 놀렸다.

“부끄러워? 창피해?”

“아, 진짜. 누나.”

내가 뺀질거리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아르한이 허리 부근을 박박 문질러 대며 낮게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하지 말라니까…….”

“알, 알았어.”

뭐지.

일순 당황해 말을 더듬어 버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하더니만, 왜 저래?

나는 당장이라도 터질 듯 새빨개진 아르한의 얼굴을 보며 당혹스레 머리를 긁었다.

그렇게 잠시 동안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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