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나는 건강한 사람이었다.
17년 동안 크게 아파 본 적도, 어디가 부러진 적도 없었다.
그런 내가 붕대를 감을 정도로 다쳤다니, 나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제법 놀랄 일이었다.
“그러게 왜 되도 않는 짓을 했어.”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나는 에코의 눈을 피하며 어물쩍 웃었다.
아까부터 멀뚱히 서 있던 갈색 머리의 여자가 물었다.
“그럼 크리켓은 못 하는 거예요?”
“아니, 돌리아. 너무한 거 아니에요?”
나는 환자라고요.
지금 여기, 젠킨슨 백작저만큼 정원이 넓은 곳은 없고 그녀가 언제나 크리켓에 진심이라는 건 알았지만 좀 서운했다. 나 다쳤는데.
“오늘은 못 해요. 붕대 아직 풀면 안 된다고요.”
“해도 될 것 같은데…….”
베일리 영애가 투덜거리며 배트를 쥐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움직이지 말라 그랬단 말이야.”
“의사가요?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어…….”
순간 아니요, 할 뻔했다. 움직이지 말라고 한 건 선배인데.
그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붕대에 적힌 글씨를 내려다보다 조그맣게 웃었다.
옆에서 베일리 영애와 에코가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팔이 아니라 머리를 다친 게 아닌지…….”
“다 들리거든요.”
테이블에 팔을 올린 채 내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턱을 괴고 앉아 있는데, 누군가가 테이블에 물이 담긴 컵을 내려놓았다.
“누나, 다쳤어?”
“너도 있었구나.”
나는 아르한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연하다. 젠킨슨 백작 영애는 발이 넓으니 남부 귀족 자제들은 거의 다 초대받았을 테지.
“옆에 마탑 마법사가 있는데도 마물한테 달려들다가 다쳤대요!”
“돌리아!”
나는 베일리 영애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빽 소리쳤다.
크리켓 안 한다고 복수하는 건가, 지금.
“흐응.”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흘린 아르한이 음산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저게 무슨 소리야?”
“아니 뭐…….”
눈을 도르륵 굴려 시선을 피하려는데, 아르한이 설명해 보라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 노아 선배가 우리 영지에 왔었거든. 그런데 선배 탓은 아냐. 그냥 내가 혼자 뻘짓 하다 다친 거야.”
내가 횡설수설 말하는 사이, 어느새 아르한이 얼굴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누나 옆에 있었는데.”
아르한이 내 팔에 감은 붕대를 내려다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손이 슬쩍 팔 위로 올라왔다.
“아무것도 안 하고.”
약간 욱신거리는 통증에 내가 미미하게 얼굴을 찡그렸다.
“누나 다치는 걸 보고만 있었다?”
“아야.”
내가 신음을 흘리자 언제 정색했냐는 듯 아르한이 씩 웃으며 손을 뗐다.
“안 되겠네, 그 사람. 무능해.”
“내가 주의 안 해서 그랬다니깐.”
“왜 자꾸 그 사람을 옹호하고 그래. 질투 나게.”
옹호는 무슨, 진짜 내 잘못인데.
나는 은근슬쩍 내 머리카락을 넘기는 아르한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팔짱을 꼈다.
“사복 입은 건 오랜만이네.”
나는 말끔한 차림의 아르한을 훑었다.
이번에는 단추가 제대로 채워져 있었다. 쟤는 그냥 교복이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닐까.
아르한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내가 입을 열었다.
“교복이 싫니?”
“응?”
“아니야.”
나는 대충 얼버무리며 고개를 돌렸다.
마카롱처럼 인기가 많은 디저트들은 이미 동이 난 후라, 조금 애매한 과자들만이 남아 있었다.
“으흠.”
오렌지맛 쿠키는 어떤 맛일까 궁금해하고 있는데, 계속 서 있던 베일리 영애가 작게 헛기침을 했다.
“그래서 크리켓은요?”
아르한이 매끄럽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누나 대신 제가 하겠습니다, 돌리아 양.”
“어머, 그래요? 마침 우리 편 숫자 부족했는데 잘 됐네.”
베일리 영애는 얼굴 가득 화색을 띠며 아르한에게 배트를 쥐여 주었다. 크리켓을 할 수 있어서 마냥 기쁜 듯했다.
목적을 달성한 그녀가 떠나자, 나는 야외 테이블에 홀로 남겨졌다. 어쩐지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옆 테이블에서 영애들이 자수를 놓으며 놀고 있었다. 그중에 익숙한 얼굴이 많길래, 슬쩍 끼려다가 이내 내가 자수를 더럽게 못한다는 걸 깨닫고 관뒀다.
“에휴.”
내가 친구 없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러고 있어야 하지.
나는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며 책을 꺼냈다.
지난번에 간 서점에서 산 소설책이었다.
읽다 만 곳을 찾아 페이지를 넘기던 내가 멈칫했다.
책 중간쯤에 파란색 책갈피가 끼워져 있었다. 혹시 구겨질까 아무 책에나 넣어 뒀는데, 그게 이거였던 모양이다.
아카데미에서 만나면 전해 주던가 해야지.
센 햇빛에 눈을 찡그리고 한 손으로 책갈피를 만지작거리며 책장을 넘기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마침 여름 볕이 조금 따가웠던 참이었기에 잘 됐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저기서 보니까 여기가 햇빛이 세더라고. 돌리아 양 거 빌렸어.”
아르한이 웃는 얼굴로 안 어울리는 레이스 양산을 들고 서 있었다.
나는 의자를 그쪽으로 끌며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벌써 승부 났어?”
“응, 내가 이겼어.”
“오, 멋진데.”
아니나 다를까, 베일리 영애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배트를 흔들고 있었다.
그녀에게도 아르한에게 다행인 일이었다. 베일리 영애는 한번 시작하면 자기가 이길 때까지 하니까.
“내가 들까?”
“괜찮아, 누나 팔 다쳤잖아.”
아르한이 양산을 이쪽으로 기울이며 눈웃음을 지었다.
“고마워.”
나는 햇빛을 피해 아르한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가만히 서 있던 아르한이 내 접시를 보고 눈을 빛냈다.
“맛있겠다, 그거.”
“오렌지? 별로던데.”
쿠키 주제에 달지도 않고 시큼한 게 내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그냥 먹어 볼래. 먹여 줘.”
아르한이 한 손에 양산을 들고 몸을 숙이며 미소 지었다,
“나 이거 들고 있잖아.”
“흠.”
나는 쿠키를 집어 아르한의 입에 집어넣었다. 재빨리 집어넣고 손을 빼려는데, 입술이 그대로 턱 닫혔다.
“손 좀 빼게…….”
입 좀 벌려 봐.
그렇게 말하려던 차였다.
할짝.
물컹한 살덩이가 손끝을 훑고 지나갔다.
“!”
나는 몸을 파드득 떨며 치맛자락에 손을 문질러 닦았다.
축축한 느낌이 아직도 남아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게.”
아르한이 한쪽 손으로 입가를 문질러 닦았다. 쿠키를 씹고 있는지 발음이 조금 뭉개졌다.
“맛없다, 이거.”
붉은색 눈동자가 미미하게 일그러지며 웃음을 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