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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쯤 지나자 어째 점점 분위기가 달아오르더니, 아니나 다를까 술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농부 아저씨들이 자꾸 선배한테 술을 권하는 걸 내가 다 막아 냈다.
학생한테 이게 무슨 짓이야. 좋은 사람들이지만 가끔씩 막 나간단 말이지.
나는 본격적인 술판이 되기 전에 선배를 데리고 나왔다.
여름이었지만 달아오른 분위기를 뒤로 하고 나선 거리는 다소 춥게 느껴졌다.
“아.”
지금 시간은 8시.
시계를 확인한 내가 반사적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역시 하늘이 예쁜 노을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타들어 가는 해와 붉은 구름. 하얀 건물이 햇빛을 받아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나는 밖에서 보는 노을을 정말 좋아했기에, 이 시간에 딱 맞춰 나오게 된 것이 기꺼웠다.
“선배, 저기 좀 보세……요.”
옆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하던 내가 몸을 굳혔다.
선배는 이미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금색 눈동자가 노을과 같은 빛을 띠었다.
찰나였지만 은색 머리카락에 비친 노을이 붉게 일렁였다. 나는 그 빛을 좇아 두 눈을 깜빡였다.
이내 선배의 은발이 다시금 노을 색을 띠었다. 언뜻 찬란한 금색으로 빛나는 것 같기도 했다.
예쁘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신기하게도 그 순간에는 내가 있는 장소며 시간이며 온도 따위는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해가 다 질 때까지 멍한 얼굴로 선배를 바라보았다.
* * *
“생각보다 늦었구나.”
“시내는 오랜만이라서 조금 많이 놀았어.”
내가 아빠에게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사용인들도 나보다 먼저 돌아와 있는 걸 보니, 조금 민망하긴 했다.
“피곤하겠구나. 이제 들어가서 쉬어야지.”
“으응.”
나는 아빠의 말에 그대로 들어가려다 말고 몸을 돌렸다.
“선배, 오늘 재미있었어요. 같이 나가 주셔서 감사해요.”
선배는 여상스레 미미한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
“나도 즐거웠어. 데려가 줘서 고마워.”
“흐흥.”
몸을 깨끗이 씻고 나온 나는 침대에 몸을 털썩 뉘였다.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을 곱씹었다. 솜사탕 먹는 선배, 책 읽는 선배, 선배와 노을. 다 엄청 예뻤어.
몸이 노곤노곤해져 눈을 반쯤 감는데, 침대맡에 놓인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이젠 익숙해진, 붉은색 표지의 이름 없는 책.
“아이고, 아가씨. 침대 다 젖어요.”
수건을 들고 혼비백산 달려오는 리타에게, 아무 말 없이 책 표지를 쓸던 내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거, 리타 네가 빼 놨어?”
“아, 그거 중요한 거 같던데 침대 밑에 떨어져 있어서요. 먼지도 다 닦아 놨어요.”
“……고마워.”
쥐어짜 낸 듯 가는 내 목소리에 리타가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뭘요. 제 일인걸요.”
그래, 딴마음 품지 말자. 어차피 이건 찰나의 꿈일 뿐이야.
다음 학기가 되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릴.
나는 두 손에 책을 꼭 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선배가 떠나기까지 하루가 남았다.
그동안은 선배와 마주칠 일이 그렇게 많지가 않았다. 식사 자리에서 만나도 형식적인 인사만 건넸고.
묘하게 달라진 내 태도에 선배는 조금 의아한 듯 보였지만 자세히 묻지는 않았다.
“좀 있으면 풀 텐데.”
내 팔에 감은 붕대에 글귀를 끄적이던 리타가 고개를 슬쩍 들며 대답했다.
“이러면 더 빨리 낫는댔어요. 아가씨 요새 울적하시잖아요. 팔 못 쓰셔서 그렇죠?”
“응, 그렇지.”
나는 삐걱거리는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리타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내 어깨를 토닥거렸다.
“다른 사람들 보고도 해 달라고 할게요. 여기 계세요, 아가씨.”
곧 내 붕대에는 리타부터 마부 톰슨까지 모든 사용인의 낙서가 그려졌다.
글귀로 빼곡한 붕대를 내려다보며 복도를 지나던 참이었다.
“아, 선배.”
서재에서 방으로 돌아오던 선배와 딱 마주쳤다.
“점심 맛있게 드셨어요?”
가볍게 인사를 건네려는데, 선배가 글씨 가득한 붕대를 유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이러면 빨리 낫는다고 그러길래요.”
나는 뻘쭘하게 웃으며 팔을 들어 보였다.
노아 선배가 어디선가 펜을 꺼내 들고 조심스레 물었다.
“나도 해도 될까?”
“아? 네, 그럼요.”
나는 흔쾌히 한쪽 팔을 내주고 시선은 다른 곳에 고정했다.
쓱쓱, 펜이 붕대 위를 스치는 소리만이 들렸다.
“나을 때까지는 가급적이면 움직이지 말고.”
“네, 그럴게요.”
목소리에서부터 걱정스러움이 느껴져서 조금 고마웠다.
다 적은 듯해 팔을 내려다보니 주인처럼 단정하고 수려한 필체가 보였다.
얼른 나아.
나는 덜 마른 잉크가 번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팔을 내렸다.
* * *
오늘은 선배가 마탑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고작 일주일이었는데 그 사이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막상 떠난다니까 조금 아쉽기도 하고, 허전하기도 하고.
“여기 짐이요.”
내가 리타에게서 짐 가방을 받아 들어 내밀자, 선배가 황급히 내 손에서 가방을 낚아챘다.
“조심해. 다쳤잖아.”
괜찮다고 말해 봤자 소용없을 것 같아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움직이지 마.”
선배가 마지막으로 내 붕대를 내려다보며 옅은 숨을 토해 냈다.
“제발.”
“옙.”
나는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가 내 팔을 볼 때마다 너무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아서 이젠 내가 다 미안할 지경이었다.
만족스러운 듯 조금 풀어진 표정의 선배가 내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아카데미에서 보자.”
마차 문이 닫혔다. 말이 투레질을 했다.
내가 묘한 기분으로 앞머리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사이, 다그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마차는 멀어져 갔다.
* * *
읽던 책을 도로 꽂아 놓기 위해 서재에 들어선 나는 몸을 굳혔다.
아무도 없었다. 바람에 휘날리는 커튼 외에는 아무 기척도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선배가 지내던 기간 동안 늘 들리던 책 넘기는 소리도 없었다.
그 정적인 풍경이 굉장히 묘했다.
나는 책을 제자리에 꽂아 넣고 바람이 들어오는 창문을 닫았다.
커튼을 정리하고 몸을 돌리니, 창가에 책 한 권이 펼쳐진 채 놓여 있었다.
그대로 덮으려는데 페이지 사이에 무언가가 끼워져 있었다.
“어.”
그건 책갈피였다.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지만 누구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책은 노아 선배가 마지막으로 읽던 책이었고, 책갈피는 생김새부터 왠지 노아 선배 것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카드처럼 생긴 장식 없는 책갈피에서는 미미하게 선배 냄새가 났다.
어쩐지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아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