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아야.”
소독약이 상처 부위에 쪼르르 흘러내렸다.
내가 찔끔 나는 눈물을 훔치자, 아빠가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분명히 약속했다. 네가 다쳐도 책임을 묻지 않을 거라고.”
“알아요…….”
“그러니까 네 행동의 책임은 네가 져야지, 케이트. 그렇지?”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할수록 괜히 끼어들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 우울해졌다.
“그럼 쉬어라.”
복잡한 얼굴로 내 상처를 내려다보던 아빠가 라이너스와 에이든을 데리고 나갔다.
노아 선배만이 아직도 침대맡에 서 있었다.
“선배는…….”
선배는 나가서 안 쉬시나요.
그렇게 물으려는데, 선배의 얼굴이 갑작스레 가까이 다가와 나는 숨을 훅 들이쉬었다.
“왜…….”
유리알 너머 금색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선배가 잠시 숨을 고르는 듯 말을 멈추더니, 이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왜 그랬어.”
모르긴 몰라도 저 얼굴에 담긴 감정이 걱정이라는 건 알겠다.
그래도 헛된 착각은 들지 않았다. 선배는 친절하니까. 선배는 좋은 사람이니까.
나도 선배가 나 때문에 다쳤다면 미안해 죽었을 거다.
나는 넉살 좋게 웃으며 붕대 감은 팔을 들어 보였다.
“선배 얼굴 다치는 것보다는 제 팔 조금 흉 지는 게 낫죠.”
그러자 선배가 조그맣게 한숨을 토해 냈다.
“너는…….”
귀족 여성의 몸에 난 상처는 단순한 흉 그 이상을 의미했다. 몸에 난 흉터는 나중에 결혼할 때 불리한 요소로 작용되니까.
하지만 내가 무슨 명문가에 시집갈 것도 아니니, 이 정도 상처는 사소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수도 고위 귀족인 선배는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가만, 그럼 선배 지금 죄책감이 장난 아니겠구나. 자기보다 약한 후배가 자기 지키겠답시고 다친 상황이니 말이야.
젠장, 그럼 거기서 가만히 있어야 했나? 하지만 그 얼굴 다치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고.
그렇게 속으로 오만 생각을 다 하며 눈썹을 꿈틀대고 있던 참이었다.
“서, 선배.”
“아프잖아.”
선배가 내 눈가에 찔끔 맺힌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아까 소독할 때 아파서 났나 보다.
심장이 또 대책 없이 두근거렸다.
“그건 그냥 생리적인, 아니 아프기야 했지만…….”
하도 당황스러워서 말이 횡설수설 나왔다.
흠흠, 헛기침과 함께 목을 가다듬은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마음의 짐을 지워 드렸다면 죄송하지만, 저는 선배가 안 다쳐서 정말로 기뻐요.”
이어 나는 뒷목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노먼 씨도 금방 낫는다고 했어요. 아마 다음 학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붕대를 풀 수 있을 거예요.”
선배는 계속 가만히 서 있었다. 다소 복잡한 기색을 띤 금안이 옅게 떨렸다.
어쩐지 숨 막히는 분위기에 한 손으로 침대 시트를 꼭 부여잡는데, 그제야 선배는 몸을 돌렸다.
“……푹 쉬어.”
닫히는 문틈으로 보이는 선배의 얼굴이 문득 어두운 보였던 건 착각일까.
* * *
일주일 동안 외출 금지 당했다.
그거야 상관없지만 문제는, 오늘이 일주일의 마지막 날이자 시내에서 장이 열리는 날이라는 것이다.
“아빠, 제바알…… 응?”
“글쎄 안 된대도.”
서류를 처리하던 아빠가 완고하게 거절했다.
언제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예쁘다더니, 아빠 미워.
“같이 갈 사람도 없잖니.”
“왜 없어! 리타가 있는데!”
내 시선을 받은 리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전 이미 리나랑 가기로 해서…….”
너 정말 그러기야?
아빠가 여전히 엄한 얼굴로 말했다.
“사람이 붐빌 텐데, 호위해 줄 사람 없이 혼자 가는 건 안 돼.”
“피이.”
입술을 삐죽이고 있자니 문득 드는 생각이 있어, 나는 아빠의 책상을 짚으며 눈을 빛냈다.
“그럼 노아 선배랑은? 선배랑은 가도 돼?”
선배는 외부인에, 장이 있는 줄도 모르잖아. 이 기회에 불편한 분위기도 조금 풀고, 영지도 소개해 주고 하면 되겠다.
“라이너스 님이랑 에이든 님도 같이 가면 좋겠다, 그렇지?”
어색하지도 않고 딱이야.
내가 완벽하다며 두 손을 모았다.
“…….”
아빠가 펜에 잉크를 묻히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하렴, 그러면.”
“진짜? 와!”
“돈 너무 많이 쓰지 말고.”
손뼉을 치며 좋아하던 내가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별일이네. 아빠가 선배를 마음에 들어 하나? 아니, 라이너스를 마음에 들어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아빠의 집무실을 나왔다.
* * *
선배는 아빠의 서재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대부분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는 걸 보면.
그 사실을 안 아빠도 흔쾌히 서재 사용을 허락해 주었고 말이다.
“선배.”
오늘도 방에 없길래 서재에 찾아온 참이었다.
나는 근처 탁자에 차와 쿠키를 내려놓으며 미소 지었다.
“드시고 하세요.”
앉아서 책을 읽던 선배가 당황에 물든 얼굴을 했다.
“고마워. 이런 것까지 가져다줄 필요는 없는데.”
원래 시녀가 하는 일이긴 하지. 그런데 오늘은 제가 할 말이 있거든요.
“오늘 시간 있으세요?”
선배의 얼굴에 한 가닥 의문이 깃드는 것을 본 나는 눈알을 굴리며 열심히 설명했다.
“시내에서 장이 열리거든요. 아, 별건 아니고 그냥 음식 같은 거 팔고 노는 거예요.”
“그렇구나.”
“음, 그런데, 그러니까…….”
이거 하나 물어보는데 이렇게 긴장될 일인가.
나는 두어 번 헛기침을 한 다음 입을 열었다.
“혹시…… 같이 가실래요?”
내가 붕대를 감은 이래 선배와 대화를 나눈 적이 별로 없었다. 마주칠 일이 없어서 그랬을 뿐이지만 그동안은 왠지 전보다 어색해진 것 같았는데, 오늘 함께 놀면서 그걸 풀 수 있지 않을까?
침묵하던 선배가 흘깃, 내 팔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팔은 이제 괜찮은 거야?”
“물론이죠. 사실 이제 풀어도 되는데.”
괜찮다는 표시로 팔을 붕붕 흔들자, 선배의 동공이 커졌다. 낯빛도 조금 파래진 것 같았다.
내가 슬그머니 팔을 내리자 그제야 선배의 표정이 조금 편안해졌다.
선배가 한층 편안해진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난 좋아.”
“물론 라이너스 님이랑 에이든 님도 함께요.”
다들 고생하셨잖아요.
혹시나 선배가 부담스러울까 봐 나는 곧바로 덧붙였다.
“…….”
“앗, 좋다고 하신 거 맞죠? 그럼 두 분께도 여쭈러 가 볼까요?”
나는 신이 나 손뼉을 치며 라이너스의 방으로 향했다.
“네?”
“죄송합니다, 영애.”
내 기대와는 다르게 라이너스는 단칼에 거절하고 말았다.
나는 조금 의기소침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안 가세요? 재미있는데…….”
“죄송합니다, 영애. 탑주님께 올릴 보고서를 써야 해서…….”
덜 쓴 보고서를 손에 든 라이너스가 미안한 얼굴로 대답했다.
에이든 또한 노아 선배의 얼굴을 흘깃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그렇군요.”
나는 고개를 떨구며 중얼거렸다.
옆에 선 선배를 힐끗거리던 내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럼…… 취소인가?
쳇, 아쉽게 됐네. 리타한테 먹을 거나 사 와 달라고 부탁해야지. 뭐가 좋을까, 솜사탕? 꼬치구이?
“……뭐 하세요?”
한창 먹을 걸 생각하고 있는데, 선배가 몸을 돌리길래 내가 물었다.
“나가려는데.”
그러자 선배가 두 눈을 깜빡이며 물어왔다.
“단둘이서는 가기 싫어?”
“아아니, 그게 아니라.”
아, 아아. 아아?
나는 그제야 납득하며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아, 저희 둘이요.”
선배가 태연한 얼굴로 턱짓했다.
“갈까?”
이렇게 적극적인 걸 보면 선배도 내심 놀고 싶었나 보다.
그래, 방학인데도 토벌 나온다고 쉬지도 못하고 놀지도 못했을 텐데 도움받은 입장으로서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지.
“……네.”
조금만 즐기다 오는 거야. 어차피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와야 하니까.
날이 저물기까지 약 3시간, 딱 그만큼만 놀고 오는 거다.
나는 머릿속으로 시간을 계산하며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