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110)

“라이너스가 조사한 바로는 그렇게 심각한 수준이 아니고 개체도 적은 편이라지만, 네가 다치면 마음이 안 좋을 것 같거든.”

선배는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선배가 나를 그냥 사람으로서 걱정하는 거라는 걸 알면서도.

“……선배는 참 친절하시네요.”

다정한 사람.

잔인하기도 하지, 어떻게 이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으, 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조를 수도 없게 되어 버리잖아요.”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볼을 긁었다.

“그런데, 다음 학기 진도 보니까 마물 관련 내용도 들어가 있고, 이번에 새로 개조한 마법진도 있고 해서…….”

정말 죄송하지만 꼭 한번 동행하고 싶은데, 안 될까요.

나는 최대한 간절한 얼굴로 선배를 올려다보았다.

“제 한 몸쯤은 건사할 수 있어요.”

“네 실력이 좋은 건 나도 알지.”

다짜고짜 이러는 게 실례라는 건 알았다. 하지만 이런 경험을 언제 또 해 보겠어?

나는 다시 한번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선배 옆에 꼭 붙어 있을게요.”

“…….”

잠시 침묵하던 선배가 가만히 고개를 돌렸다.

“일단 말해 보긴 할게.”

“감사합니다.”

일단 1차는 통과다.

나는 머릿속으로 써 볼 마법진들을 정리했다. 쓰고 싶은 게 산더미였지만 가장 자신 있는 것들만 추렸다.

그나저나 아빠 설득하는 게 가장 일이려나.

“배고프다. 밥 먹으러 갈까요?”

아, 모르겠다. 일단 배부터 채우고 생각하자.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빈 개 밥그릇을 치운 내가 몸을 일으켰다.

* * *

점심 식사 내내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몰랐다.

토벌은 내일인데, 선배는 언제 말할까? 설마 까먹은 거 아냐? 귀찮아서 말 안 하나?

식사가 거의 다 끝나 가는 터라 여러 의문들이 머릿속에 떠다니고 있던 그때.

“케이틀린도 내일 마물 토벌에 동행해도 되겠습니까?”

“켁!”

감자가 목에 걸려 기침이 나왔다. 하필이면 내가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을 꺼낸 선배 때문이었다.

아이고, 깜짝이야.

답답한 가슴을 두드리며 노아 선배가 건넨 물을 들이켠 내가 입을 열었다.

“제 딸은 동의한 사안입니까?”

“예, 제가 부탁드렸어요. 동행할 수 없을까 해서요.”

“케이트……!”

아빠가 놀란 듯 소리쳤고, 라이너스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영애께는 조금 고되지 않을까 생각되는데요.”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절대 폐는 끼치지 않을 거예요. 저 체력도 나쁘지 않고요, 어릴 때 다녀 봐서 그라니아 숲 지리도 알아요.”

아빠, 제발. 설마 아빠 딸이 못 미더운 건 아니지?

가슴을 팡팡 두드리며 호언하던 나는 고민하듯 얼굴을 구긴 아빠를 향해 눈을 반짝거렸다.

“……부탁드립니다, 라이너스 님.”

예상 밖으로 아빠는 진중한 표정으로 라이너스에게 부탁까지 했다.

“제 딸이 못 미더운 아이는 아닙니다. 무슨 일이 생기든 라이너스 님에게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겠습니다.”

“아빠…….”

나는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아빠의 부탁을 들은 라이너스가 적색 눈동자를 빛내며 잠시 고민했다. 에이든이라는 남색 머리의 남자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에이든, 괜찮아?”

“좋을 대로.”

에이든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하자, 라이너스가 잘생긴 얼굴 가득 미소를 띠웠다.

“동행하셔도 좋습니다, 영애. 대신 노아스 곁에서 떨어지시면 안 됩니다.”

“물론이죠!”

나는 그저 허락받은 것이 기뻐서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나저나 노아가 무언가를 부탁하다니 별일이군요. 둘이 친한가 봅니다.”

라이너스가 노아 선배를 향해 두 눈을 휘며 쿡쿡 웃었다.

그에 내 쪽을 한번 돌아본 선배가 평온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친합니다.”

진짜?

눈치 없게도, 가슴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 * *

“하하…….”

나는 벽에 기대 서 연신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나 진짜 답 없다.

괜찮아, 다음 학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거리 두면 돼. 어차피 선배는 나한테 아무 감정 없어. 난 그냥 조금 친한 후배야, 알겠지?

“하나, 둘, 셋.”

봐, 선배가 일주일 후에 떠난다고 해도 방학은 3주나 남았다. 그동안 좀 정신없이 살면 단념할 수 있을 거야.

마침 다다음주에 젠킨슨 저택에 초대받은 참이다. 아마 에코도 오겠지? 신나게 떠들고 크리켓도 치면서 잊어 버려야지.

“벌써 나와 계시는군요, 영애.”

“설레서 늦을 수가 있어야죠.”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뒷짐을 졌다.

라이너스가 내 손에 들린 것을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영애 것인가요?”

“아, 네에. 이번에 새로 필기해 둔 게 많아서요. 혹시 이따가 제 마법을 조금 봐주실 수 있나요?”

나는 내가 가진 공책 중 가장 두꺼운 마법진 필기 노트를 들어 보이며 웃었다.

지난 학기 동안 새롭게 배우고 익힌 마법진을 모두 정리해 두었다.

그러나 나는 배운 마법진을 모두 외우고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난 베테랑이 아니기 때문에 보다 다양한 마법을 사용하려면 참고 자료가 필요했다.

“내가 봐줄게.”

노아 선배가 나와 라이너스 사이에 끼어들며 말했다.

인기척도 없이 또 어디서 나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도 참 예쁘다.

움직이기 편하게 하기 위해서인지 하나로 묶은 은색 머리. 긴 은색 속눈썹과 반짝이는 황금안. 십 점 만점에 십 점. 장관이고 절경이었다.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박수를 치고 싶은 것을 애써 참고 내가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이에요, 선배.”

“너도. 잘 잤어?”

“설레서 조금 설쳤어요.”

“가도 괜찮은 거야?”

“자, 잡담은 나중에.”

우리의 대화를 끊은 라이너스가 노아 선배의 등을 쭉쭉 밀었다.

에이든은 이미 마당에서 텔레포트 마법진을 그리고 있었다.

우리가 오는 것을 눈치챈 그가 몸을 일으켰다.

“준비됐으면 출발하지.”

우리가 모두 범위 안에 들어가자 마법진이 푸르게 빛나기 시작했다. 시야가 어지럽게 얽히더니, 이내 좀 전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라니아 숲의 입구였다. 정말 어릴 때 놀러 다닌 것이 전부였지만 그래도 조금은 기억이 났다.

“이쯤에 있던 사과나무 사과가 엄청 달았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돌아본 곳엔 역시나 내 기억 속의 사과나무가 있었다. 모양도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어쩐지 신기해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라이너스가 내게 물어 왔다.

“마물의 핵을 찾으려면 꽤 중심부까지 들어가야 할 겁니다. 어떻게 들어가는지 아시나요, 영애?”

“아, 네, 알아요. 저쪽으로 더 가면 돼요.”

나는 초록 잎이 드리워진 덤불 쪽을 가리켰다.

“맞아.”

한 손에 마도구를 든 에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방법이 있었구나. 그나저나 마도구 되게 고급이다.

여기서는 구경도 못 해 볼 수준의 마도구를 구경하며 계속 발걸음을 옮기는데, 오싹, 하고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뭔가 계속 도는 것 같지 않아요?”

나는 어쩐지 어두워진 주위를 둘러보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노아 선배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주위를 이리저리 살피던 내가 미간을 좁혔다.

그 사과나무. 어쩐지 저게 유난히 자주 보이는 것 같단 말이지. 잎사귀가 늘어진 모양부터 가지 길이까지 똑같아.

뭔가가 이상하다고 느끼고 있는데, 사과나무를 향해 다가간 선배가 진지한 투로 말했다.

“이건 결계야.”

“결계요?”

내가 뜨악한 얼굴로 되물었다.

“결계 오랜만이네요.”

이상하게 라이너스도 에이든도 태평한 얼굴이었다.

나, 나만 지금 불안해? 결계를 칠 수 있는 마물이라면 꽤나 상급일 텐데. 맙소사, 그런 게 지금 우리 영지에 있었다고?

저렇게 태연할 걸 보니 충분히 자신이 있다는 뜻이겠지만.

“그럼 어떡…….”

그렇게 말하려던 참이었다.

땅에 금색 마법진이 내려앉고, 사과나무와 그 주변 땅이 마치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금색 마력은 노아 선배의 것인데.

나는 입을 살짝 벌린 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상위 마법을 시전해 놓고서 평온한 얼굴로 서 있는 노아 선배에게서 약간의 위압감을 느낀 나는 슬쩍 뒷걸음질 쳤다.

그때, 부스럭하고 나뭇가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응?”

내가 밟은 부분은 유난히 나뭇가지가 많이 모여 있었다. 마치 무슨 문양을 그려 놓은 것처럼.

“……엥?”

호기심에 주위를 둘러보는데, 별안간 나를 둘러싼 나뭇가지들이 발광을 하기 시작했다. 검붉은 색으로 번쩍번쩍.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이거 텔레포트 마법진이구나. 아, 망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눈앞에 보인 것은, 당황한 얼굴로 이쪽으로 손을 뻗는 노아 선배였다.

슉.

나는 손에 든 책을 구명줄인 양 꽉 움켜쥐었다.

머지않아 속이 다 뒤집어질 것 같은 감각이 나를 덮쳤다. 아무리 상위 마물이라지만 어쨌든 마물이 그린 것이니 수식과 문자의 배열도 고르지가 못했다. 당연히 전송이 들쑥날쑥하니 어지러웠다. 거슬려서 죽을 것 같았다. 진짜 더럽게 못 그리네. 시험 봤으면 0점이다, 0점.

“윽.”

나는 띵해 오는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일으켰다.

여기가 어디지?

뿌연 시야에 무언가가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푸르른 나무들로 가득했던 풍경이, 칙칙한 동굴로 바뀌어 있었다.

“……?”

노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환경에 당황하고 있는데, 시야에 흐트러진 은색 머리카락이 들어왔다.

“선배?”

어지러운 듯 이마를 짚은 노아 선배였다.

“……괜찮아?”

“선배도 여기로 오신 거예요? 방금 뭐였죠?”

옆에 선배가 있다는 사실이 문득 안심이 되어서 나불거리기 시작했다.

“결계가 부서지지마자 마법진이 발동했어요. 결계에 틈이 있었던가 아니면…….”

실컷 떠들다 보니 그제야 손에 무언가가 닿아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아.”

우리는 손을 꼭 쥐고 있는 상태였다. 이동해 올 때 선배가 나를 잡다 보니 이랬나 보다. 맞닿은 온기가 괜히 부끄러웠다.

나는 황급히 손을 빼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아니야.”

아까부터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던 선배가 동굴 안쪽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오히려 덕분에 빨리 끝날 것 같은걸.”

선배를 따라 동굴 안쪽으로 시선을 돌린 나는 입을 살짝 벌렸다.

“……!”

그랬다.

동굴 안에 엄청난 숫자의 마물이 동그란 형상으로 모여 있었다.

“수, 수가 적은 게 아니었네요?”

다 여기 뭉쳐 있었던 거야.

나는 질겁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너는 안 데려오는 건데.”

선배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옷에 묻은 흙을 털어 냈다.

“아까 그 결계를 부수면 자동으로 이쪽으로 오게 되어 있었나 봐요.”

분명 사과나무가 사라지자마자 나뭇가지가 빛났지. 그전까지는 마력의 존재도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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