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손님방이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
방금 내 목소리가 다소 컸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황급히 목소리를 낮추었다.
야, 그게 안 되면 어떡해!
내가 입 모양으로 속삭이자 리타가 눈썹을 내려뜨리며 눈짓했다.
이렇게 빨리 올라오실 줄은 몰랐죠.
“에밀리가 침대에 실수로 검댕을 묻혔는데, 그걸 치울 때까지만…….”
“하아.”
리타가 애처로운 얼굴로 소곤거리자 나는 곤란한 얼굴로 미간을 문질렀다.
“선배, 어쩌죠. 손님방이 준비가 아직 안 되었다는데, 다시 자리에 앉기는…….”
“아…… 그다지.”
“싫으시군요.”
나는 납득하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어쩐다.”
싫다는 사람을 계속 여기 붙잡아 둘 수도 없는 노릇.
내가 연신 선배를 흘끗대며 고민하고 있자, 노아 선배가 고개를 슬쩍 숙여 나와 눈을 맞추었다.
“그러면 잠시 네 방에 가 있어도 괜찮을까?”
“예?”
선배가 재빨리 덧붙였다.
“실례가 안 된다면.”
나는 벌렁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속으로 생각했다.
외간 남자를 방에 들이는 건 조금 부담스럽지만 왠지 선배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아빠가 저기 있으니 손님 대접은 내 몫이기도 하고.
맞아, 손님 대접. 그거 말고 다른 의의는 없잖아?
“……알았어요.”
최대한 빨리 준비하도록 해.
리타에게 그렇게 눈짓을 한 내가 노아 선배를 내 방으로 안내했다.
“잠깐만요.”
그 한마디와 함께 방 안으로 들어온 나는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책들을 대충 정리해 책장에 꽂아 넣었다.
이미 리타가 정리한 침대를 괜히 다시 살펴보고, 잡동사니들을 대충 옷장에 우겨 넣은 다음에야 나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들어오세요.”
나는 재빨리 방 안을 다시 스캔했다. 내가 손댔더니 도리어 주름이 진 침대가 거슬리긴 했지만, 그것 외에는 눈에 거슬리는 것이 없었다.
“누가 들어올 줄은 모르고, 청소를 못 해서…… 하하.”
선배가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발을 들이자 나는 슬며시 문을 닫았다.
“앉으세요.”
어지른 티가 별로 안 나는 소파를 선배에게 내준 나는 쪼르르 반대쪽 소파로 가 앉았다.
“방 예쁘다.”
방 안을 둘러본 선배가 살짝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리타 나이스!
나는 어색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그나저나 선배, 말이 조금 많아지지 않았나? 전에는 플로라 선배가 있어야 이 정도 말했는데.
그런 생각과 함께 조금 멍한 얼굴로 앉아 있는데, 소파 한구석에 대충 던져 놓았던 책이 보였다. 붉은색 양장 표지가 익숙했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선배는 반듯하기 그지없는 자세로 앉아 있었다.
“저, 선배.”
나는 바싹 마른 입술을 훑었다.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서두가 적힌 첫 페이지를 펼쳐 들고서, 천천히 책을 들어올렸다.
“이거…… 혹시 보이세요?”
만나는 사람마다 이게 보이냐고 묻고 미친 사람 취급받기를 수십 번, 두 주인공 중 하나인 노아 선배는 어떨지 궁금했다.
만약 보인다고 해도 첫 장에는 그렇게 중요한 내용이 적힌 것도 아니니 괜찮을 것이다.
“……아무것도 안 적혀 있는데.”
두 눈을 깜빡거리던 선배가 안경까지 벗어 들며 말했다.
안경을 벗은 선배의 청순한 모습에 또 심장이 쿵, 하는 것을 느끼다 황급히 책을 탁 덮었다.
“그렇죠?”
“혹시 기대하는 대답이라도 있는 거야?”
조금 예리한 선배의 질문에 찔끔했지만, 나는 하하 웃으며 둘러댔다.
“아뇨, 장난 좀 쳐 봤어요.”
어정쩡하기 그지없는 대답이었지만 지금으로서는 최선이었다.
이로서 메인 주인공에게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습득했다. 조금 창피하기는 하지만.
“그런데 어쩌다 여기에 오게 된 거예요? 처음에 보고 깜짝 놀랐잖아요.”
억지로 말을 붙이려니 조금 힘들긴 했지만 어색한 정적보다야 나았다.
“탑주님이 갈 사람 모집하시길래.”
“아이고, 방학엔 쉬셔야죠.”
“내가 간다고 했어.”
“오.”
나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침음을 흘렸다.
여기까지 마차 타고 오는 거, 꽤 고역인데 말이다.
그런데 선배는 여기 왜 왔을까? 표면적인 이유 말고. 우리 영지는 조그맣고 그다지 존재감이 있는 것도 아니라 와 봤자 얻을 게 없을 텐데.
“저기요, 선배. 여기 오실 때 혹시…….”
나는 평온한 얼굴의 선배를 흘끔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저희 영지라는 거, 알고 계셨어요?”
내가 질문해 놓고서도 후회하는 중이었다.
“…….”
노아 선배가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일 때였다.
“아가씨, 손님방이 준비되었다고 합니다.”
노크 소리와 함께 리타의 목소리가 들렸다. 완벽한 타이밍.
나는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가시죠!”
자리에서 일어난 선배의 등을 나는 황급히 방문 쪽으로 떠밀었다.
“리타가 방으로 안내해 줄 거예요. 편히 쉬세요, 선배.”
내 저돌적인 모습을 처음 본 선배가 잠시 당황하는 듯싶더니 순순히 방을 나섰다.
“이따가 보자.”
“네……! 네.”
선배가 내 쪽을 몇 번 흘깃거리더니 몸을 돌려 걸어갔다. 열린 문 사이로 하나로 묶은 은색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하아아…….”
나는 닫힌 방문에 기댄 채 쪼그려 앉아 한숨을 내쉬다가, 괜히 눈에 띤 붉은색 책을 집어던졌다.
거지같아, 진짜.
* * *
내가 아카데미에 있는 동안 우리 집 사냥개 로저가 새끼를 낳았다.
출산하는 동안은 옆에 있어 주고 싶었는데, 아쉬워라.
“누나 옷 물어뜯는 거 아니야.”
걱정이 무색하게도 로저와 다섯 새끼들은 건강했다.
나는 마당에 주저앉은 채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꼬물이들을 지켜보았다.
지금은 라이너스와 대화하고 있을 우리 아빠는 젊었을 적 사냥을 즐겨 했다.
사냥용 총들을 모아 둔 방도 있었고, 저택에서 키우는 개들도 리트리버나 하운드, 테리어 등의 사냥개였다.
지금은 바빠서 못 하는 탓에 이 녀석들은 날마다 포동포동 살만 쪄가고 있지만.
나는 끙끙대는 녀석의 턱을 긁어 주며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너희처럼 알기 쉬웠으면 좋겠다.”
분명 착각이 아니었다. 노아 선배가 달라졌다.
선배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왜 갑자기 저렇게 다정하지? 왜 나한테 잘해 주고?
만약, 정말 만약의 경우 하나가 떠올랐지만 이내 지워 버렸다. 전혀 말이 안 되는 소리였기에.
“에효.”
마법사들이 여독을 풀어야 하기 때문에, 본격적인 마물 토벌은 내일부터 시작이다.
나는 쩝,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나도 가고 싶다.”
그날 무섭기도 했지만 공격 계열 마법을 실제로 써 본 것은 처음이라 굉장히 신기했다.
위험한 일인데 이렇게 말해도 되나 싶기도 하지만 조금 재미있기도 했다.
안 그래도 기껏 개발했는데 쓸데없어서 슬펐던 마법진들이 한가득인데.
마탑을 목표로 할 거라면 이런 경험을 쌓아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나는 꼬리를 마구 흔드는 벤의 턱을 긁으며 푸념했다.
“가고 싶다, 가고 싶어…….”
“어딜?”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돌아보았더니 노아 선배가 있었다.
“아, 선배.”
하마터면 흙투성이 땅 위에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나는 벤을 끌어안은 채 몸을 일으켰다.
“어쩐 일이세요?”
“자작님이 식사하라고 들어오라고 하시네.”
선배가 저택 쪽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아, 시간이 벌써.”
강아지들을 안아 든 내가 시계를 흘긋하곤 선배를 돌아보았다.
“먼저 들어가세요. 저는 얘네 밥 좀 주고 갈게요.”
“도와줄까?”
“그럼 감사하지만…….”
내가 채 말도 하기 전에 선배는 이미 다른 강아지를 안아 들고 있었다.
능숙한 손길이다. 동물을 많이 다뤄 봤나?
그래 뭐, 도와준다는데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말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새끼들을 안았다.
순간 벤은 밥그릇을 따로 쓴다는 것을 기억해 낸 내가 몸을 돌렸다.
“아, 걔는 여기로…….”
선배 손에 안긴 강아지가 혀를 길게 내밀더니 선배의 얼굴을 핥기 시작했다. 하얀 뺨 위로 끈적한 침이 묻어났다.
“야…….”
어디 나도 아직 못 해 본걸.
……이게 아니라!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신났나 봐요.”
나는 벤을 향해 딱밤을 날리는 시늉을 했다. 여전히 좋다고 헥헥거리고 있었다. 어이구.
“너희도 밥 먹자.”
벤과 로저를 비롯한 다른 개들을 불러들이고 있는데,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그나저나 귀한 후작가 도련님이 이런 거 하고 있어도 되나? 나야 얘네들 보는 게 좋아서 한다지만, 선배는 손님인데.
보통 토벌하러 와서 이런 것도 해 주느냐 물어보려 옆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걱정은 곧장 사라졌다.
저택 벽에 기대어 선 선배가 밥을 먹고 있는 강아지들을 향해 웃고 있었다. 따뜻한 금색 눈동자가 점심 햇살에 반짝였다.
선배 동물 좋아하나 보다.
……귀여워. 귀여운 거 옆에 귀여운 사람.
나는 계속 멍하니 선배를 바라보았다.
“얘 이름이 뭐야?”
“걘 벤이고요, 로저, 브라운, 폴이요.”
선배의 물음에 밥을 먹는 녀석들을 일일이 가리키던 내가 황급히 덧붙였다.
“제가 안 지었어요.”
“귀엽다.”
선배가 더요.
멍한 얼굴로 강아지들을 쓰다듬는 선배를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선배는 마탑주랑도 친하고, 지위도 높지. 실력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럼 선배가 여기서 약간 실세 같은 느낌 아닌가?
“선배님. 그, 부탁이 있는데요.”
머릿속으로 정리를 끝낸 내가 쭈뼛쭈뼛 말을 꺼내자 선배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마물 토벌이요, 저도 같이 가면 안 될까요?”
저질렀다.
심장이 두근대는 것을 느끼며 주먹을 꾹 쥐고 있는데, 입술을 몇 번 달싹이던 노아 선배가 입을 열었다.
“조금 곤란하네.”
“예?”
선배가 미간을 조금 좁히고서 내게로 눈길을 돌렸다.
“위험하니까 가지 말라고 하고 싶은데, 그러면 혹시나 너를 무시하는 것처럼 들릴까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