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날 밤 이후로 마물의 출현이 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저런 게 하나가 아니라니 소름이 돋았다.
밭을 망치는 멧돼지나 노루도 만만찮게 골치인데, 차라리 그것들이 백 마리 나오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제 그만하셔도 돼요.”
리타의 말에 나는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부스스했던 머리가 조금은 정돈되어 있었다.
머리를 몇 번이나 빗었는지 모른다. 그 덕에 평소에는 부스스했던 머리카락에 실타래처럼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교복이 아닌 옷은 오랜만인지라 어색했지만, 곧 괜찮아지겠지.
“응, 괜찮다.”
오늘은 마탑에서 토벌단이 오는 날이었다.
혹시 늦지는 않았을까 황급히 일어나다 그만 화장대에 무릎을 박아 버렸다. 나는 무릎을 벅벅 문지르며 복도를 달려갔다.
“아직 안 왔지?”
그새 흐트러졌을까 다시 머리를 정돈하며 내가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가 푸스스 웃으며 내 어깨를 끌어당겼다.
“이제 오는 것 같구나.”
“!”
저기 비탈길 끝에서 하얀색 마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가슴이 다시 쿵쿵 뛰었다.
이내 마차가 미끄러지듯 저택 앞에 도착했다.
나는 아빠의 어깨를 콩콩 두드리며 들뜬 표정을 지었다.
“내린다, 내린다…….”
슬쩍 열린 마차 문 너머로 은백색 포니테일이 흔들렸다. 어, 어쩐지 익숙한 모습이었다.
다음 순간, 나는 입을 턱 벌렸다.
“……서, 선배가 왜.”
선배가 왜 여기 계세요?
하지만 다음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마차에서 내린 노아 선배가 이쪽을 향해 살짝 미소 지었다.
갑자기 위가 아파 오는 것 같았다.
선배를 따라 두 명의 인영이 더 내렸지만, 그런 게 지금 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선배가 왜 여기 있지? 왜?
물음표 수십 개가 머릿속에 떠다녔다.
“케이트, 아는 사람이니?”
나는 아빠의 물음에도 대답하지 못하고 계속 목석처럼 굳은 채로 서 있었다.
현실을 부정하며 눈을 몇 번이나 비볐지만 역시나 달라지는 건 없었다.
“……!”
나는 황급히 내가 입은 옷을 내려다보았다. 더럽거나 하자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냥 집에서 입고 다니는 평범한 옷이었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드레스까지는 아니어도 조금 더 좋은 옷을 입을 걸 그랬다. 그나마 머리는 말끔하게 빗었으니 다행이려나.
“안녕.”
어느새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온 선배가 나와 눈을 맞추더니 인사를 건넸다.
벌꿀색 눈이 곱게 휘어졌다.
“오랜만이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두어 번 뻐끔거렸다.
다시 말하지만 속이 쓰렸다.
금방이라도 위에 구멍 뚫릴 것 같았다.
* * *
자초지종은 이랬다.
마법 천재였던 노아 선배는 어렸을 때부터 마탑과의 교류가 잦았고, 이번 방학도 마찬가지로 마탑에 방문했다고 한다.
그래서 마침 선배가 어지간한 마법사보다도 실력이 있고 좋은 경험이 될 듯해 현장에 데리고 나왔다, 고…….
탑주님, 왜 그러셨어요.
“아카데미 선배라고? 하하, 이런 우연이 있나!”
탁자에 앉은 아빠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빠야 신기한 우연이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어쩐지 노아 선배의 시선이 따가울 정도로 노골적인 터라, 계속 바짝 긴장한 채 차렷 자세로 있자니 자리가 가시방석이었다.
“유리엘 영식이시라니, 명성은 잘 알고 있습니다.”
아빠가 내 등을 두드리며 웃음기 띤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마침 저희 딸도 마법사가 아니겠습니까? 오늘 마탑에서 마법사들이 온다고 얼마나 설레 했는지!”
“아, 아빠.”
그걸 왜 얘기해.
내가 아빠를 곁눈질로 흘겼다.
“녀석, 부끄러워하기는.”
아빠의 저 푼수 같음이 이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아니, 그냥 이 상황 자체가 그냥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허리를 세운 채 어색하게 손가락을 꼬물거리고 있는데, 마침 다과상이 차려졌다.
드디어 손에 무언가 쥘 것이 생겼다는 사실에 쾌재를 부르던 그때.
“케이틀린.”
시녀가 잔에 차를 따르자마자 스푼을 집어 든 노아 선배가 물었다.
“각설탕?”
“……네.”
무슨 의도에서인지 선배는 각설탕까지 직접 넣어 주었다. 그러더니 스푼으로 휘휘 저어 다 녹이기까지 해서 건네주는 게 아닌가.
“감사합니다…….”
“뭘.”
이럴 줄 알았으면 거절했을 텐데, 내가 좀 달게 먹어서.
선배가 기껏 설탕까지 타 준 차인데,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선배 사복을 입은 건 처음 보네. 머리 묶은 것도 오랜만이다. 와, 선배 귀걸이도 하는구나. 잘 어울리네.
길고 하얀 목가에서 언뜻언뜻 흔들리는 파란 물방울 모양 보석을 빤히 바라보던 내가 고개를 홱 숙였다.
정신 차려, 이거 아냐. 근데 진짜 잘 어울린다. 그만. 선배 너무 잘생겼어. ……제발 그만해!
내 안에서 예상치 못한 자아 분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게 다 선배가 쓸데없이 잘생긴 탓이었다.
내가 이렇게 나약했나 자괴감에 몸부림치던 그때, 어디선가 와삭와삭 소리가 들렸다.
“?”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슬쩍 고개를 드니, 밤하늘 같은 남색 머리카락과 밤샘을 일주일은 했을 것 같은 다크서클을 가진 남자가 말없이 연신 과자만 주워 먹고 있었다. 어째 속도가 무지 빠르다.
그 모습이 신기해 흘끗흘끗 바라보고 있는데,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남자가 동작을 멈췄다.
나는 황급히 도로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미안해졌다.
죄송합니다. 계속 드세요.
내가 시선을 치우니 다시 아삭거리는 소리가 났다.
“스읍.”
그러고 보니 차가 조금 덜 단데, 각설탕 하나만 더 넣으면 안 되려나.
설탕 통에 손만 뻗어도 선배가 해 주려고 하겠지?
흘끔 옆을 바라보니 선배는 아직도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냥 덜 달게 먹자.
호로록, 의기소침한 동작으로 차를 홀짝이고 있자니 그제야 아빠가 다른 마법사와 나누던 이야기가 들렸다.
“엊그제 밤에도 갑자기 마물이 나오는 바람에 애먹었지 뭡니까. 하하, 결국은 제 딸이 마법으로 퇴치를 했지만요.”
“아, 아빠. 그건 왜 얘기해…….”
진짜 쪽팔리게.
나는 얼굴을 감싸고 신음했다.
업계 최고 셋 앞에서 자랑이라니, 이거 완전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꼴 아닌가.
“하하, 부끄러워하실 건 없습니다. 영애께서 마법의 재능을 가지고 계신다니 좋은 일이 아닙니까.”
토벌단장이라는 서글서글한 인상의 금발머리 마법사가 그렇게 말했다.
이름이 라이너스라고 했나? 아까 그 과자 먹는 남자도 그렇고, 마탑에서는 잘생기고 예쁜 사람만 뽑나? 그럼 나 못 들어가는 거 아닌가.
“잠시지만 혼자서 마물을 퇴치하셨다니, 어지간한 중견 마법사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계시는 것이 아닐지 사료됩니다.”
남자가 웃음을 머금은 채 그렇게 말하자, 내 옆에 앉아 있던 노아 선배도 덧붙였다.
“케이틀린은 재능 있는 마법사입니다.”
“!”
재능 있는 마법사.
“흐흥.”
재능 있는 마법사래. 업계 최고 둘한테 칭찬받았다.
나는 손을 들어 입가를 가린 채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진정시켰다.
괜히 기분이 좋아 찻잔으로 가린 입술에서 웃음이 비식비식 흘러나왔다.
그것도 잠시, 다시 현실을 자각하고 나니 입꼬리가 내려왔다.
나처럼 멀뚱히 앉아 있던 노아 선배가 문득 말을 걸었다.
“재미없지?”
“네……니요!”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내가 얼굴을 번쩍 들었다. 이게 뭐라는 거야, 진짜.
내가 그렇게 더듬거리자 노아 선배가 피식 웃으며 턱을 괴었다.
“이제야 나를 보네.”
“……!”
나는 속으로 기겁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방금 심장이 2초 정도 멈춘 것 같은데 착각인가?
내 동공이 세차게 떨리는 것을 눈치챘는지 선배가 눈썹을 내려뜨렸다. 끄악, 불쌍한 얼굴.
“내가 여기 있는 게 불편해?”
“아, 아뇨.”
나는 냉큼 대답했다.
마음 같아서는 아빠 도장을 훔쳐 추방령이라도 내리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재미없으면 갈까?”
“예?”
어디로요?
나는 어안이 벙벙해 두 눈을 깜빡였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대뜸 찻주전자를 들었다.
“차 더 안 드세요?”
선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뻘쭘해져 주전자를 내려놓았다.
“그러고 보니까 오느라 피곤하셨겠어요. 여기가 워낙 변방이라…… 아빠도 참.”
나는 어정쩡한 동작으로 라이너스와 신나게 이야기 중인 아빠를 돌아보았다.
“괜찮으시면 올라, 갈까요?”
“응, 그러자.”
선배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슬쩍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빠…….”
선배를 어느 방으로 안내할지 물으려 돌아보았더니, 아빠는 여전히 이야기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뭐, 손님방으로 안내하면 되겠지? 당장 토벌하러 갈 것도 아니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서 한층 편안한 마음으로 리타를 불렀다.
“리타.”
그런데 어쩐지 리타의 표정이 다급해 보였다.
그녀가 종종걸음으로 달려오더니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