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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니아 숲은 자작저에서 멀지 않았다. 이왕 아르한을 배웅하러 나가는 거, 오랜만에 기사들도 볼 겸 잠시 숲 쪽으로 가기로 했다.
그리 심각한 것도 아니고 내부까지 들어가는 것도 아니니 괜찮겠지.
“나만 잠깐 들리는 거지, 너는 피해서 가야 한다?”
“응, 응.”
“너 내 말 안 듣고 있지. 하여간 대답만 잘해요.”
나는 손을 뻗어 아르한의 뺨을 꼬집었다.
“아야야.”
“그라니아 숲 지나지 말고 빙 둘러서 가라고, 알겠어?”
아르한과 투닥이다 보니 금세 울창하게 자란 나무들이 보였다.
박살이 난 아저씨의 집과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가문의 기사들도.
“엥, 아가씨?”
나를 제일 먼저 본 기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옆에 서 있던 다른 기사가 그의 옆구리를 툭 쳤다.
“야, 거짓말하지…… 아가씨?”
“어, 아가씨다.”
여기저기서 아가씨, 아가씨 하고 의문에 차 쑥덕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멋쩍은 얼굴로 한 손을 들었다.
“다들 오랜만이에요.”
“아가씨, 왜 여기 계십니까?”
들고 있던 검을 검집에 넣은 제온 경이 황급히 묵례를 했다.
오늘 저 질문을 몇 번 들었더라.
“분명 가주님께서 내일 오신다고…….”
“날짜에 무슨 착오가 있었던 것 같아요.”
나는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그제야 기사들이 하나둘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아차,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아가씨, 여긴 위험합니다!”
제온 경이 다시 검을 빼들고 수풀 쪽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맞습니다. 여긴 왜 오셨습니까?”
“얘 배웅해 주려고요.”
내 뒤에 서 있는 아르한을 가리키며 내가 대답했다.
순식간에 기사들의 얼굴이 싸하게 식었다.
“아…… 네…….”
“히리스 영식께선 왜……?”
“다들 너무하시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싫어하는 거 아닌가?
아르한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마차가 안 와서 얘가 데려다줬거든요.”
“가주님이 잘못하셨네.”
기사들이 맞장구를 치며 숙덕거렸다.
하여간 다들 짓궂기는.
“마차 왔네. 자, 어서 가라.”
“으응, 알겠으니까 밀지 마.”
칭얼거리며 마차로 향하던 아르한이 별안간 몸을 홱 돌렸다.
깜짝 놀라 가슴을 쓸어내리는 찰나, 내 손을 홱 잡아챈 아르한이 그대로 입을 맞췄다.
“나 갈게, 누나.”
“아니, 저 파렴치한…… 으븝!”
그걸 본 제온 경이 광분해 소리치다가 다른 기사에게 입을 막혔다.
나는 잠시 멀뚱히 서 있다가, 아르한의 이마에 힘껏 딱밤을 날렸다.
이런 건 또 어디서 배워 온 거람.
“아야야.”
“허튼짓 그만하고 얼른 타.”
나는 아프다는 얼굴로 이마를 연신 문지르는 아르한의 등을 떠밀었다.
“꼭 숲은 피해서 가, 알겠지?”
“알겠다니까.”
마차에 탄 채 내게 손을 흔들던 아르한이 기사들 쪽을 흘끗 바라보더니 두 눈을 가늘게 휘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그래, 백작 부부께 안부 전해 드려.”
“안녕, 누나.”
“그래. 잘 가.”
나는 잠시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고 있다가 몸을 돌렸다.
“깜짝이야, 다들 표정이 왜 그래요.”
“이제 아가씨도 다 크셨는데 저러는 게 맘에 안 듭니다.”
“어디서 감히 우리가 업어 키운 우리 소중한 아가씨를! 히리스 영식은 절대 안 됩니다, 아가씨.”
“그렇습니다. 아무리 히리스 백작가 외동아들에 후계자라 해도 영 싸한 것이…….”
퉁명스러운 표정의 제온 경이 대답하자 다른 기사들도 한마디씩 보탰다.
정말. 별걸 다 걱정한다니까.
나는 에이, 하는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아직 어린애잖아요.”
“어린애…….”
제온 경이 영 탐탁지 않은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표정 좀 풀라며 그를 달래려던 그때, 수풀 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위험합니다!!”
내 앞을 막아선 제온 경이 검을 빼 들었다. 다른 기사들도 나를 보호하듯 둘러쌌다. 한순간에 분위기가 팽팽해졌다.
이내 수풀 밖으로 나온 것을 본 내가 눈을 깜빡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노루네요.”
“…….”
“농작물 훔쳐 먹으러 왔나 보다.”
내가 근처에서 나뭇가지를 주워 노루를 향해 천천히 휘둘렀다.
“야, 저리 가.”
그 바람에 겁을 먹은 노루가 숲 쪽으로 돌아서서 도망가기 시작했다.
“어휴.”
제온 경이 긴장이 풀린 듯 한숨을 내쉬며 갑주를 입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민망한 듯 그의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다들 수고하세요. 전 이만 가 볼게요.”
이만 저택으로 돌아가려 작별 인사를 하자, 어정쩡한 자세의 제온 경이 입을 벙긋거렸다.
“가십니까? 벌써요?”
“아무래도 제가 계속 옆에 있으면 불편하잖아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옷깃을 여몄다.
“아빠가 빠른 시일 내로 조치를 취한다고 하니, 조금만 더 고생해 주세요.”
“예에…….”
“저흰 하나도 안 불편한데…… 조금만 있다 가십쇼.”
아쉬운 표정의 기사들이 힘없는 동작으로 중얼거렸다.
“그래요, 저희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아십니까?”
“짐 풀어야 하는걸요.”
나는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다들 나중에 봐요.”
나는 저택에 들어선 순간 깨달았다.
나 교복도 못 갈아입었구나. 이게 도대체 무슨 난리람. 제2시대 이후로는 찾아보기도 힘들어진 마물이 다름 아닌 우리 영지에 나타나다니.
“다들 무사해야 할 텐데.”
나는 허공에 그렇게 읊조리곤 반질반질 윤이 날 정도로 깨끗하게 닦인 복도를 지나 익숙한 내 방으로 들어섰다.
“워.”
나는 거의 리모델링을 했다고 봐도 좋을 깔끔한 모습의 방을 바라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당최 우리 집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아가씨?”
가방을 내려놓고 쉬고 있는데, 문가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리타.”
나는 푸근하게 웃으며 내 전속 시녀를 끌어안았다.
“안 그래도 찾아뵈려고 했는데, 여기 계셨네요.”
리타의 입꼬리가 반가움에 파르르 떨렸다. 나를 마주 끌어안은 그녀가 내 등을 토닥거렸다.
“정말 오랜만이에요, 아가씨. 무슨 일 없었죠? 시험은 잘 보셨고요? 괴롭히는 놈은 없었나요?”
“천천히 얘기하자.”
나는 침대에 걸터앉으며 웃었다.
“아이고, 이런.”
리타가 살짝 구겨진 이불을 보고 얼굴을 찡그렸다.
오늘따라 리타가 유난히 깔끔을 떠는 것 같았다.
“아참, 짐 정리해 드려야지. 요즘 다들 바빠서 일손이 부족해요.”
리타는 내가 바닥에 내려놓은 가방을 풀며 정리를 시작했다.
“어머나, 이런 것도 들고 다니시는 거예요? 안 무거우세요?”
내 가방에서 두꺼운 책을 발견한 그녀가 내 짐을 풀다 말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나는 몸을 일으키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 그거 동아리 거.”
“동아리요? 그 독서 동아리인가 그거요?”
“으응.”
나는 살풋 눈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하필이면 그때 도서관에 누가 빌려가고 없어서, 내 사비로 샀던 기억이 난다. 번거롭긴 했지만 동아리 시간에 책도 안 가져온 머저리로 보이기 싫어서.
“하긴 아가씨가 자의로 읽을 법한 책은 아니네요. 코르뉘, 아니, 코르…… 뭐지?”
책을 들고 제목을 읽던 리타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괜찮아, 나도 그거 못 읽어.”
옛날 고대어 억양이 섞였댔나, 하여튼 굉장히 고전 문학이라.
플로라 선배는 되게 고급지게 발음 잘 하던데. 노아 선배는 말을 잘 안 하니까 모르겠고……. 혹시 세상에서 플로라 선배만 발음할 수 있는 거 아니야? 혼자만 혀 구조가 다른가.
나름 신빙성 있는 것 같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리타가 익숙한 책 한 권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이건 공책이죠?”
화려한 금박이 들어간 붉은 표지의 책.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짐 쌀 때 넣은 기억이 없는데, 어느새 가방 안에 들어가 있었다. 이젠 익숙해진 나머지 아무렇지도 않았다.
“우와, 하나도 안 쓰셨네. 공부를 안 하신 거예요, 너무 예뻐서 아까우셨던 거예요?”
책을 휙휙 훑어본 리타가 물었지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아가씨?”
“…….”
“공부 안 했다고 해서 삐지셨어요?”
내 얼굴을 본 리타가 의문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세요?”
“음…….”
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머리를 굴렸다.
좋아하는 사람한테 차였다고 말하면 리타는 나를 끌어안고 펑펑 울겠지? 고맙고 감동이긴 한데 그렇게 되면 하루 만에 온 저택 안에 내가 차였다는 소문이 퍼질 텐데, 그건 사양이었다.
“아무것도 아냐.”
“그러니까 더 궁금해지잖아요.”
리타가 입술을 삐죽이며 짐을 풀던 손을 재촉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깨끗해? 누구 온대?”
나는 방 안을 두리번거리며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단정히 개인 옷을 꺼내 정리하던 리타가 대답했다.
“모르셨어요? 곧 손님이 오신댔는데.”
“누구? 아빠가 누구 초대했어?”
난 아무것도 못 들었는데.
의아함에 찬 눈을 깜빡이며 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빠가 많이 바쁜가. 나한테도 말 안 해 주고.
“음, 그러니까…… 아! 마탑에서 마물을 퇴치하러 온댔어요.”
리타가 잠시 머리를 쥐어 싸매고 고민하는 듯싶더니, 손뼉을 치며 그렇게 대답했다.
“뭐?!”
그 말에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던 내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