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렇게 노아 선배의 기행은 방학식 날까지 계속됐다.
선배는 계속 나를 데리러 왔고 나는 등신처럼 그걸 내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서 좋은 걸 어떡하냐고.
아니, 그러고 보니 내 시간표는 어떻게 안 거람?
어쨌든 그렇게 이틀이 지나고, 그런 어수선한 기분으로 방학이 시작되었다.
“저걸 어떻게 헤쳐 가?”
방학에 대한 설렘도 잠시, 나는 인파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모든 학년들이 다 섞이다 보니 더 야단이었다.
교문 앞에 마차들이 벌떼처럼 몰려 있었다.
비교적 수수한 우리 가문의 마차를 찾아 이리저리 살폈지만, 영 보이지 않았다.
“뭐지…….”
시간이 꽤 지나 마차들이 많이 빠졌는데도 보이지 않았다.
오다가 무슨 일 생겼나?
나는 별생각 없이 주머니에 손을 꽂았다. 편지가 만져졌다.
“……설마.”
괜스레 불안해 억지웃음을 지었다.
떨리는 손으로 구겨진 편지를 펴 든 내가 눈을 질끈 감았다.
27일에 마차 보낼게, 사랑해, 딸!
“…….”
오늘은 27일이 아니라 26일이었다.
아빠가 날짜를 착각한 것이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으며 신음과 함께 이마를 짚었다.
아, 아빠.
“야, 나 망했어. 마차 대여해야 하나?”
“못 탈걸. 애들이 며칠 전부터 빌리던데, 안 남아 있지.”
도라의 대답에 나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아, 에코랑 맬러리는…… 벌써 갔네.”
“그럼 어떡해, 나 노숙해야 돼?”
나는 울상을 지은 채 머리를 쥐어뜯었다.
도라가 내 팔을 잡고 나를 일으켜 세웠다.
“야, 일단 우리 마차 타고 요 시내 앞까지 가자. 거기서 여관을 찾던가 다른 데서 마차를 대여하던가 하고.”
“아오…….”
무력감에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힘없이 도라에게 기대 헛웃음을 흘리고 있는데, 어느새 익숙해진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 있어?”
노아 선배였다. 언제 이리로 왔지.
“깜짝…… 아. 선배.”
나는 순간 멈칫하며 편지를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아직도 안 가고 계셨네요.”
내가 이미 대기 중인 유리엘 후작가의 마차를 흘깃 바라보며 말했다.
“인사라도 하고 가려고 했지. 찾고 있었는데.”
두 눈을 껌뻑거리던 노아 선배가 입을 열었다.
“너야말로 아직도 출발 안 했네. 무슨 일 있어?”
“글쎄요, 우리 가문 마차가 오다가 조금 문제가 생겼는지…….”
나는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나를 빤히 내려다보던 선배가 자신의 마차를 가리키며 선뜻 제안했다.
“태워 줄까?”
“괜찮아요. 유리엘 후작저는 제도에 있잖아요.”
나는 깜짝 놀라 서둘러 손사래를 쳤다.
우리 영지에 들렀다 다시 제도까지, 나 하나 때문에 그 먼 길을 간다면 선배한테도 마부한테도 미안해서 마차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을 거다.
“친절하시네요, 선배. 감사합니다.”
그래도 저런 어마어마한 제안을 했는데, 조금이라도 고마워해야 할 것 같아 나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막막함에 다시 어두워진 얼굴로 입술을 깨무는데, 누가 뒤에서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누나.”
“와악!”
나는 소름이 돋은 귀를 마구 문질렀다.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뒤를 돌아본 내 얼굴이 싸하게 식었다.
“넌 또 왜 거기 있어.”
생글생글 웃고 있는 아르한의 뒤로 히리스 백작가의 마차가 떡하니 서 있었다. 제길, 부러워.
“문제가 생긴 것 같던데.”
“응? 별거 아냐. 우리 가문 마차가 안 오는 것 같아서.”
나는 불편한 얼굴로 옷소매를 만지작거렸다.
아르한이 노아 선배를 향해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구나, 그런데 저 사람은 왜?”
“저 사람이라니!”
내가 기겁하며 팔을 뻗어 아르한의 등을 후려쳤다.
얜 간이 얼마나 비대한 거야. 선후배 관계인 건 둘째 치고 신분 차이가 있는데, 겁도 없이.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노아 선배를 힐끗 바라보았다.
늘 아무 변화가 없었던, 심지어 내가 고백을 했을 때도 평온했던 노아 선배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어 있었다.
어떡해. 역시 너무 건방졌나 봐.
나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 손톱을 딱딱 깨물었다.
“어…… 나 갈게.”
한순간에 착 내려앉은 분위기를 견딜 수 없었는지 도라가 슬그머니 빠졌다.
“개학 날에 봐.”
내 어깨를 툭툭 친 그녀가 마차에 올라타더니, 말이 출발할 동안 아주 흥미롭다는 듯 이쪽을 관전하기 시작했다.
어쭈, 자긴 이제 빠졌으니 됐다 이거야?
나는 입을 샐쭉 내밀며 헛웃음을 흘렸다.
“……케이트 친구?”
노아 선배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말했다. 어쩜, 삐딱해도 잘생겼어.
잠깐, 선배가 지금 나 뭐라고 부른 거지. 케이트?
머엉.
내가 잠시 그 말을 곱씹는 사이, 이윽고 선배에게서 시선을 뗀 아르한이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아, 누나. 나 좋은 생각이 있어.”
“뭔데?”
“우리 마차 타고 가자.”
아르한이 한 손으로 자신의 마차를 가리켰다.
나는 입가를 가리고 반짝거리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너 혹시 천사야?”
갑자기 아르한의 뒤로 하얀 날개가 펄럭이는 것 같았다.
그러게,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아르한네 영지는 우리 영지 바로 옆인데.
“야, 고맙다. 이리 와. 넌 내 은인이야.”
어쨌든 역시 죽으라는 법은 없다.
나는 아르한을 얼싸안고 등을 두드렸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놈이 내 구원자 같았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야? 갑자기 마차가 안 오다니.”
나를 자신의 마차로 에스코트하던 아르한이 궁금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나도 몰라. 아빠가 날짜를 착각했나 봐.”
착각할 게 따로 있지.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선배.”
나는 마차에 오르다 말고 뒤를 돌아 노아 선배에게 고개를 까딱여 인사했다.
“방학 끝나고 봬요.”
“……응.”
내 착각이겠지만 선배는 조금 서운해 보이기도 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어떻게 선배 마차를 타. 방향이 아예 반대인데.
나는 마차에 올라타 구겨진 치맛자락을 정리하다가, 문득 창밖을 힐끗 바라보았다.
선배는 아직도 거기에 있었다.
* * *
“누나 진짜 너무한다. 여기서까지 공부하는 거야?”
“복습이 얼마나 중요한데.”
나는 줄 친 페이지를 훑으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맞은편에 앉아 퉁명스러운 얼굴로 턱을 괴고 있던 아르한이 내가 보던 책을 앗아 갔다.
“야!”
나는 인상을 팍 쓰고 허공에 팔을 휘적거렸다. 아르한은 그런 나를 조련하듯 책을 이리저리 흔들어 보였다.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저거 저 망할 새끼, 키가 언제 저렇게 컸지.
“나 은인이라며. 나랑 놀아 줘.”
“내놔.”
고전 끝에 책을 되찾는 것에 성공한 나는 아르한을 한번 째려보았다.
“누나는 왜 그렇게 성적에 진심이야?”
“미래를 대비해 둬서 나쁠 건 없잖니.”
내 뻔한 대답에 아르한이 고개를 갸웃했다.
“미래가 걱정돼서 그래? 정말 할 거 없으면 나한테 시집 와.”
나는 탁 소리 나게 책을 덮으며 침착하게 대꾸했다.
“내가 할 게 왜 없어. 너야말로 정 할 거 없으면 하인으로 들어와. 밥은 먹여 줄게.”
“푸핫.”
아르한이 입가를 가리고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누나가 할 게 없는 미래만큼이나 현실성 없는데, 그거.”
“인생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다.”
“뭐, 그렇지?”
아르한이 두 눈을 가늘게 휘며 웃었다.
“너 왜 자꾸 눈을 그렇게 떠. 앞이 잘 안 보여?”
시력 나빠졌나. 안경 맞춰야겠다. 나도 너만 할 때는 눈 좋았는데.
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눈가를 톡톡 두드렸다.
“그러다 눈 작아진다.”
“…….”
나는 싸늘하게 식은 표정의 아르한을 뒤로하고 책을 마차 구석에 던져 놓았다.
쑤셔 오는 허리를 두드리며 구시렁거렸다.
이 안에서 몇 시간을 보낸 거지. 이러고 하루를 더 가야 한다니.
“아, 허리 배겨.”
“허리 배겨?”
아르한이 제 무릎을 톡톡 두드리며 진한 웃음을 흘렸다.
“그럼 여기 앉을래?”
“괜찮아.”
나는 칼같이 거절의 답변을 내놓았다.
아르한이 아쉽다는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앉아도 정말 괜찮은데.”
“됐어.”
구석에 던져 놓은 책을 주워 든 내가 다시 문장을 훑어 내렸다.
내 걱정해 주는 거냐. 자식, 귀엽네.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던 아르한이 갑자기 피식 웃음을 흘렸다.
“누나, 머리카락 맛있어?”
“아.”
나는 입 안에 들어간 머리카락을 빼며 어색하게 웃었다.
마차 안에 또 정적이 흘렀다.
조금 헷갈리는 개념을 다시 읽으며 펜 끝을 잘근잘근 씹고 있는데, 아르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케이트.”
“왜?”
갑자기 들려온 내 애칭에 고개를 들어 아르한을 보았다.
아르한이 눈을 깜빡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불렀잖아, 그 선배가.”
“그랬……지.”
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저 얘기는 왜 한담.
그나저나 이번에는 선배라고 부르는구나. 지금이라도 위아래를 찾아서 다행이다.
“둘이 친해?”
붉은색 눈이 제법 진지한 기색을 띠었다.
“음…….”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곤란한 침음을 흘렸다.
대답이 나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니.”
씁쓸하지만 그게 내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선배의 이유 모를 행동으로 최근엔 얼굴을 조금 많이 보긴 했지만, 그 전까지는 동아리 활동 빼고는 거의 교류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내 그, 애칭을 불렀을까.”
나는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르한이 턱을 괸 채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그러게, 정말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