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겨우겨우 선배를 떼어 내고 향한 곳은 후관 뒤쪽 후원이었다.
나는 한 손에 든 빵을 우물거리며 멍한 시선으로 교정을 바라보았다.
하늘에선 새가 지저귀고 여름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린다. 여느 때처럼 평화롭고 따뜻한 여름날이었다.
“자퇴할까…….”
이와 물고 있던 빵 사이로 웅얼거리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자퇴를 왜 해.”
“와악!”
갑자기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에 나는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다. 들고 있던 빵이 흙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를 놀랜 목소리의 주인은 생글생글 웃고 있는 아르한이었다.
“기척 좀 내고 다녀라. 검 하면 은신술도 배우니?”
나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투덜댔다.
“놀랐어?”
“당연하지, 귀에 대고 바람을 부는데…… 어으.”
귀를 마구 후비며 나는 바닥에 떨어진 빵을 내려다보았다.
“아, 저거 좀 아깝다.”
흙이 잔뜩 묻은 빵을 바라보며 나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개미들이 먹을 거야.”
봐, 벌써 한 마리 왔네.
아르한이 쪼그려 앉아 빵을 가리켰다.
“나 때문이네, 미안해라. 새거 사 줄까?”
“됐어. 맛없더라. 너도 사 먹지 마.”
그가 나를 올려다보며 묻자 나는 손사래를 쳤다.
그러고 보니 갑자기 얘가 왜 나오지?
“너 왜 여기 있어?”
아르한이 아무 말 않고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엔 검술학부 학생들이 대련 중이었다.
“아, 수업 중이었어?”
나는 다시 벤치에 앉아 턱을 괴었다.
“1학년은 우리랑 수업 시간이 안 겹치나 보네.”
문득 드는 생각에 내가 사납게 아르한을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너는 수업 안 듣고 뭐 해.”
“보다시피 땡땡이 중.”
붉은 눈을 휘어 뻔뻔하게 미소 지은 아르한이 내 옆에 앉았다.
“너 진짜…… 어휴, 됐다.”
“왜 이래. 나 포기하지 마.”
아르한은 턱을 괴고서 경박하게 웃었다.
“너 옷차림이 왜 그래?”
나는 게슴츠레 뜬 눈으로 아르한을 훑었다.
명찰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없고, 셔츠 단추는 꼭 한두 개씩 풀어져 있는데다 넥타이까지 헐렁하다. 그래도 얼굴이 되니 안 어울리는 건 아니다만.
“그게 뭐냐, 응? 날 티 나게.”
나는 혀를 쯧쯧 차며 아르한의 단추를 잠갔다. 애가 무슨 앞섶을 이렇게 훤히 열고 다녀.
“……얼굴 좀 가까이 대지 마.”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아르한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저래?
“하여튼 못 본 새 애가 이상해졌어.”
안 그래도 단추를 다 잠근 참이었기에 나는 곧바로 손을 뗐다.
“많이 힘드냐?”
그래 봤자 1년도 안 지났다.
나는 턱을 괴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방학도 얼마 안 남았네. 수업 듣기 싫다.”
“나랑 땡땡이칠래?”
“미쳤니.”
그렇게 중얼거리곤 벤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잠시 내 눈치를 보던 아르한이 입을 열었다.
“……누나 자퇴할 거야?”
“어엉?”
나는 얼굴을 구기며 아르한을 돌아보았다. 그는 제법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일 있는 거야?”
“아니 그거는…… 학교 다니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응? 생각해 보는 거 아니니.”
얼버무리며 고개를 돌리자, 문득 건물에 달린 시계의 모습이 보였다.
“좀 있으면 나도 수업 시작해. 너도 이제 가.”
벤치에서 몸을 일으킨 내가 아르한의 등을 밀었다.
하지만 아르한은 대답하라는 듯 불퉁한 얼굴로 꼼짝을 안 했다.
“안 해, 안 해. 자퇴 안 해. 졸업장까지 딸 거니까 얼른 들어가.”
아직도 심각한 얼굴의 아르한에게 나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제야 아르한이 안심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흐음.”
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머리를 긁었다.
설마 내가 진짜 자퇴할까 봐 걱정되나.
“너 편지 왔다.”
기숙사로 돌아오자 마자 도라가 내게 무언가를 던졌다.
그걸 착 하고 받아 든 내가 편지 봉투를 이리저리 살폈다.
“아빠네.”
나는 반가운 얼굴로 봉투를 뜯었다.
안에 들어 있는 건 평범하게 안부를 묻는 편지였다. 보고 싶다는 말과 함께, 방학식 날 마차를 보내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아빠 보고 싶다.”
괜히 코가 시큰거려 나는 침대에 몸을 뉘였다.
그런데 성적 얘기는 어떻게 한담. 막막해 죽겠네.
“방학에 뭐 할 거야? 이번에 되게 길잖아.”
옆 침대에 누운 도라가 물었다.
“나야 뭐 집에 있겠지. 놀러올래?”
“난 이모네 집 가.”
“아아, 그 로웰 왕국 사신다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도라도 없다니 어쩔 수 없이 지루한 방학이 되겠군. 잘 됐지 뭐. 실컷 쉬다 와야겠어.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고 있는데, 도라의 궁금증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아 선배랑은 어떻게 되어가?”
“뭐가.”
“에이, 알면서.”
도라가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내게 눈을 찡긋했다. 개인적인 감상평을 남기자면 매우 징그러운 모습이었다.
나는 불퉁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떻게 되긴 뭘. 그냥 왔지.”
대충 얼버무리고 등을 돌렸지만 아직도 의심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을 도라가 보였다.
여름 방학이 끝나면 원작이 시작된다.
그때부터는 정말 쥐 죽은 듯이 지내야 했다. 선배도 어느 정도 피해 다닐 필요가 있었다.
그래, 긴 방학 동안 마음 정리나 해야지.
나는 홀가분함이 섞인 한숨을 뱉어내며 침대에 다시 몸을 뉘였다.
* * *
방학이 얼마 안 남았다는 사실에 너무 방심한 탓일까?
“앉아도 돼?”
“네, 넵.”
나는 내 바로 앞에 앉은 노아 선배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미치겠네, 이제 점심도 편히 못 먹어.
체념하며 스푼을 집어 드는데, 갑자기 내 접시에 크림빵이 놓였다. 심지어 한 입도 안 먹은 새거였다.
오, 나 이거 좋아하는데. 아, 이게 아니지.
“감사합니다.”
이런 귀한 걸 나한테 주다니, 단 걸 싫어하나?
나는 눈을 반짝거리며 군침을 삼켰다.
히히, 빵이 두 개.
빵이 하나 더 생긴 것에 신나하고 있는데 노아 선배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뭘.”
그리고 나는 내가 지금 무슨 상황에 처해 있는지 다시금 깨달았다.
아니, 표정이 너무……. 내가 먹는 모습이 그렇게 복스럽나.
내가 빵을 우물거리다 말고 심각한 얼굴로 식은땀을 뻘뻘 흘리자, 옆에 앉은 친구들이 내 눈치를 살피다 귀엣말을 했다.
“자리 피해 줄까?”
그에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제발 가지 마, 얘들아.
으악, 또!
어쩌다 눈을 마주쳤더니 선배가 다정하게 웃었다. 금색 눈이 곱게 휘어지더니 호선을 그렸다. 나는 먹던 수프를 도로 뱉을 뻔했다.
아 미친, 체할 것 같다.
사정없이 물을 들이켜던 나는 눈알을 굴려 내 앞에 앉은 노아 선배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어라, 그런데 나쁘지…… 않잖아. 아니, 예쁜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니 오히려 좋았다. 빵 한입 먹고 저 얼굴 한번 보고, 그래도 될 것 같은데.
나는 스푼을 내려놓으며 침을 꿀꺽 삼켰다.
나, 나 설렌다. 어떡하냐.
“노아, 여기 있었어? 아까 교수님이 부르시던데.”
그렇게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플로라 선배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 나의 구원자.
노아 선배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를 따라나섰다.
“아, 알았어.”
“어, 케이트도 있었네? 점심 맛있게 먹어!”
“안녕히 가세요.”
나는 두 선배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런데 모순적이게도 막상 선배가 접시를 들고 떠나니까 조금 아쉬웠다. 역시 난 아직도 선배를 좋아하고 있는 모양이다. 망했다.
“안녕. 맛있게 먹어.”
“아, 넵.”
내게 웃어 보인 노아 선배가 우리 말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멀어지자, 계속 가만히 관전하던 도라가 내게 물었다.
“……뭐냐?”
그에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