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110)

* * *

“진짜 뭐 있는 거 아니야?”

“응 아니야…….”

나는 책상에 고개를 박았다. 나무 책상에 볼이 눌리는 것이 느껴졌다.

후, 입으로 바람을 불자 드리웠던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하아…….”

친구들이 무어라 왱알왱알 떠드는 것도 잘 들리지 않았다.

교실에서 교실까지, 그 거리가 얼마나 길다고 데리러 와. 그것도 매번.

덕분에 나는 숨이 컥컥 막혀 죽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설마하니 아무에게나 그러진 않겠지.

그럼 내가 선배에게 조금은 특별하다는 뜻…….

짝!

나는 손을 들어 내 뺨을 내리쳤다.

진짜 돌았나 봐, 너 고백했잖아. 그리고 차였잖아. 이러고서 뭘 끝내겠다는 거야.

다시 한번 스스로 뺨을 내리치려는 내 손을 도라가 홱 잡아챘다.

“얘 왜 또 난리야.”

그녀가 한 손에 든 사과를 와삭, 베어 물었다. 도라의 얼굴을 보는 순간 제정신이 들었다.

“나 지금 뭐 하는 거냐.”

설마 나 아직도 선배 좋아하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내가 작게 신음했다.

“아니, 도대체 왜 저런대? 왜? 나한테 뭐 받을 거라도 있어?’

“지금은 그냥 즐겨. 방학 되면 그리워질걸.”

에코의 말이 조금 뼈를 때렸지만 그렇다고 수긍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서 고개를 빼꼼 들었다.

“난 진짜 미칠 것 같다고.”

심드렁한 얼굴의 에코가 고개를 저었다.

“하긴 하지 말라고 할 용기가 있을 리가 없지, 네가.”

“그런데 제대로 차인 거 맞아?”

“맞다고.”

맬러리의 일침에 내가 불퉁하게 쏘아붙였다. 괜히 이상한 희망 가지게 하지 마.

“어차피 방학 며칠 안 남았잖아? 조금만 참아.”

하긴 그래.

맬러리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하자 나는 가만히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책 속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머지않아 노아 선배와 플로라 선배는 이어질 테니, 선배가 저러는 것도 얼마 가지 않겠지.

그냥 잠깐 계 탔다고 생각하자.

“저거 봐 봐, 또 데리러 왔네.”

아무 생각 없이 교실 문 밖을 보았다가 노아 선배의 모습을 발견한 내가 얼굴을 감싸 쥐고 신음했다.

“와, 잘생겼다.”

맬러리가 문가를 힐끔대며 감탄했다.

“케이트가 죽고 못 살 만하네.”

“그 정도는 아니거든?”

나를 놀리는 에코를 한번 째리고서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간다.”

“쟤 좋아하는 거 봐.”

“즐기고 있다니깐.”

맬러리가 에코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도라는 내게 손을 흔들며 휘파람을 불었다.

나는 귀를 막은 채로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흠흠, 헛기침을 한번 한 다음 느리게 문을 열었다.

“또, 오셨네요.”

문가에서 기다리다가 나를 의식한 노아 선배가 고개를 들었다.

“아.”

안경 너머 황금색 눈동자가 반가움을 담고 반짝였다.

“안녕.”

그 모습이 너무 눈부셔서 나는 눈을 게슴츠레 떴다.

“수업은 잘 들었어?”

저 온유함의 극치를 띤 미소를 봐. 환장한다.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그 며칠 새에 다른 사람이 될 수가 있지.

다시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껴져 책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다문 잇새로 웅얼거리는 말이 새어 나왔다.

“이……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괜찮아.”

대답은 칼 같았다.

나는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가 싫으면 고백 거절할 수도 있지, 그렇게 죄책감 가질 필요 없는데. 선배가 날 좋아하지 않는 게 잘못도 아니고. 어디 가서 저러고 다니다 호구 잡히지 않을까 몰라.

“선배,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눈을 꿈뻑거리며 선배가 대답했다.

“미안하지 않은데.”

역시 완벽한 사람은 없구나. 이제 보니 약간 호구 같은 기질이 있어, 이 사람.

내가 자못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자, 금색 눈에 약간의 걱정이 서렸다.

“혹시 무슨 일 있어?”

“아뇨.”

나는 머리카락이 허공에 휘날리도록 세게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없어. 심신 모두 매우 편안하며 무난합니다. 평화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어요.

“다행이다.”

“네, 그렇죠…….”

그렇게 잠시 정적이 흐르고, 마침 여자 기숙사 건물이 보여 이만 가 보겠다 말하려던 참이었다.

“아, 전 여기서 이만…….”

“케이트!”

저 복도 끝에서부터 누군가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탁, 탁. 여자 구두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케이트.”

멀리서부터 달려왔는지 내 어깨를 쥔 플로라 선배가 가쁜 숨을 토해 냈다.

“너 탈퇴한다며? 노아한테 들었어.”

내 모습을 담은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 이런. 이게 이렇게 전해질 줄은 몰랐는데.

내가 어쩔 줄 몰라 어버버하고 있는 사이, 조금 당황한 듯한 노아 선배가 입을 열었다.

“플로라, 잠깐…….”

“적어도 올해만, 이번 동아리 분기가 끝날 때까지만 있어 주면 안 될까?”

그걸 가뿐히 무시한 플로라 선배가 간절한 얼굴로 내 손을 꼭 쥐어 왔다.

“너무 인기가 없어서 폐부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올해까지는 활동하고 싶어.”

어떡한담.

나는 입술을 깨물며 할 말을 골랐다.

이쯤에선 고민이 된다. 내가 나가서 폐부가 된다면, 플로라 선배는 슬퍼하겠지. 그럼 그것대로 선배를 괴롭히는 것 아닌가.

플로라 선배는 좋은 사람이었다. 굳이 그 책 때문이 아니어도 그녀를 힘들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

그러고 보니 이렇게 갑자기 탈퇴하겠다 하는 것도 조금 아니긴 해.

뇌에 과부하가 걸릴 것 같았다.

“노아도 다른 약속은 다 바쁘다고 안 된다면서 동아리는 꼬박꼬박 나오는 걸 보니 나름 애착이 있는 것 같고, 나도 계속 해 오던 동아리니까.”

와, 그런 거였나. 노아 선배도 책을 많이 좋아하나 보다. 아니면 플로라 선배 때문이던가.

“강요는 아냐. 네가 싫다면 막진 않을 거야.”

입술을 깨물며 고민하고 있는 내게 플로라 선배가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자연히 강요가 될 수밖에 없지.”

뭐요?

나는 경악하며 고개를 홱 들었다.

믿기 힘들게도 그건 노아 선배가 꺼낸 말이었다.

노아 선배가 플로라 선배한테 딴지를 걸었어?

나 때문에?

순간 혼란스러워 머리를 쥐어 싸맸다.

“나도 알아. 하지만 케이트까지 나가면…….”

플로라 선배가 미련이 철철 넘치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너도 알잖아. 유지하기 어렵다는 거.”

사실 초창기엔 노아 선배 보겠답시고 들어온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플로라 선배가 짠 활동들이 너무 재미없…… 다소 고차원적인 터라, 중간에 전부 탈퇴하고 남은 건 나와 노아 선배뿐이었다.

결과적으로 동아리 활동이 내게 도움이 되긴 했다. 문학 점수가 얼마나 많이 올랐는지 알면 다들 놀랄 거다.

나도 내심 정든 동아리를 떠나기가 아쉽긴 했다.

“음, 어…….”

선배가 이러는 걸 보니까 또 미안해지기도 하고.

“케이트, 난 네가 있어서 지금까지 활동을 이어 올 수 있었어. 정말로 네가 나가지 않았으면 해.”

갑자기요?

놀란 얼굴로 두 눈을 깜빡이고 있는데, 플로라 선배가 노아 선배를 돌아보며 말했다.

“너도 케이트 있으면 좋잖아. 아니야?”

“좋지.”

진정해, 대책 없는 놈아.

나는 상황 파악도 못 하고 벌렁대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하지만 남을지 말지는 케이틀린 선택이야. 케이틀린에게 맡기는 게 좋을 것 같아.”

선배가 차분한 투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거야 당연하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 플로라 선배가 눈썹을 내려뜨렸다.

“방학 동안 잘 생각해 봐, 알겠지?”

“네……네.”

나는 더듬거리며 그렇게 대답했다.

“저 가 볼게요.”

“그래, 방학 잘 보내고! 다음 학기에 보자.”

어느새 표정을 푼 플로라 선배가 친절하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

노아 선배가 소리 내어 말했다.

그에 나는 다시 엉거주춤 허리를 숙여 인사하곤 빠른 걸음으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어.”

신발 끈이 풀린 탓에 묶으려고 잠시 멈춰 있는데, 선배들이 있던 곳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요즘 친해진 것 같네, 둘.”

플로라 선배가 궁금하다는 투로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

정신이 제대로 박힌 놈이라면 내가 자기한테 고백했다는 걸 떠벌리고 다니진 않겠지.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속으로 기도했다.

노아 선배가 말을 고르는 듯 잠시 정적이 흘렀다.

곧 다시 입을 연 선배가 말했다.

“나중에 물어보고 말해 주든 할게.”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우리 개념 넘치는 선배. 최고.

죽었다 깨어나도 말하게 두지는 않을 거지만 어쨌든.

조금은 편해진 마음으로 신발 끈을 다 묶고 일어서는데, 노아 선배의 시선이 이쪽을 향해 있었다.

“으, 아.”

바보 같은 소리를 내며 나는 뒷걸음질 쳤다.

등 뒤에 기둥이 닿은 그 순간, 유리 안경알 너머로 황금안이 반짝거렸다.

나 잘했지?

딱 그런 표정이었다.

다시 머리가 띵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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