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110)

이마를 짚고 진지한 표정으로 과자를 퍼먹고 있는데,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얘기해?”

내 옆자리에 턱을 괴고 앉아 있던 맬러리가 궁금하다는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아무것도 아냐.”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그녀가 있는 대로 호들갑을 떨 것이 뻔했기에 나는 대답 대신 그녀의 입에 과자를 쏙 넣어 주었다.

“나도 하나만.”

맬러리의 머리카락을 땋고 있던 에코가 그걸 보고 입을 벌렸다.

“자.”

맬러리가 에코의 입에 과자를 넣어 주었다. 에코는 그걸 꼭꼭 씹어 삼키더니 다시 맬러리의 머리를 땋기 시작했다. 어째 손이 무척 빨랐다.

“그래서, 케이트한테 무슨 일 있어?”

앗, 젠장. 과자로 관심을 끌어냈다고 생각했는데.

“놀라지 마.”

우물우물 씹던 과자를 꿀꺽 삼킨 도라가 두 눈을 휘며 은근하게 속삭였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지 말라고 하려 했다.

“야.”

“얘 드디어 선배한테 고백했대.”

“헉.”

맬러리가 놀란 듯 입가를 가렸다.

“와, 진짜?”

그걸 들은 에코도 놀란 나머지 맬러리의 머리카락을 거의 놓칠 뻔했다.

나는 몇 개 삐져나온 검은 머리카락을 보며 미미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으, 저거 다 풀리면 진짜 화나겠다.

맬러리가 갈색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까 애들이 아까 노아스 선배가 왔다고 난리던데.”

“아, 그거 얘 데려다주려고 온 거래.”

과자를 한 움큼 집은 도라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체념한 얼굴로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뭐?!”

에코가 놀랐는지 땋던 맬러리의 머리카락을 놓쳐 버렸다. 검은 머리카락이 풀어지며 흘러내리는 것과 동시에, 그녀가 짙은 녹색 눈을 반짝이며 내 어깨를 퍽퍽 쳐 댔다.

“와, 와! 야, 그럼 사귀는 거야? 사귀는 거야?”

“아프다.”

내가 텅 빈 눈으로 중얼거렸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맬러리와 손뼉을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의자를 쭉쭉 끌고 가까이 다가온 맬러리가 눈물을 닦는 시늉을 했다.

“드디어 우리 케이트의 사랑에 한 줄기 빛이 보이는 건가?”

“그럼 더 이상 선배 타령 안 들어도 되는 거야?”

“그동안 정말 듣기 싫었는데.”

어째 논점이 이상한 것 같았지만 무시하자.

“그래서 우리한테 소개는 해 줄 거지?”

나는 되도 않는 소리를 하는 맬러리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에코가 녹색 눈을 반짝이며 얼굴을 들이댔다.

“그래서, 사귀는 거야? 사귀는 거야?”

“그래, 사귀어?”

그 순간만큼은 친구들이 그렇게 얄미워 보일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책상을 내리치며 꽥 소리 질렀다.

“그만해, 이것들아. 차였어, 차였다고! 됐냐?”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책상 위에 엎어졌다.

주위에서 친구들이 안쓰럽다는 듯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데려다줬다며? 그런데 차인 거야?”

“그래, 뭐야 그게.”

“너 괜찮니? 어째 표정이 안 좋더니만.”

맬러리가 내 등을 두드렸다.

“몰라, 모르겠어.”

내가 한숨 섞인 소리로 신음하자, 잠시 주위가 조용해졌다.

눈치를 보며 내 얼굴을 살피던 도라가 큰 소리로 외쳤다.

“얘들아, 얘 운다!”

“아, 안 운다고!”

나는 고함과 함께 고개를 벌떡 들었다.

얘가 진짜.

“울지 말고 이거나 먹어.”

“우웁.”

에코가 내 입에 초코 과자를 쑤셔 넣었다. 나는 웅얼거리며 힘겹게 과자를 씹었다.

억지로 씹다 목이 막혀 켁켁거리던 그때, 교실을 옮기라는 신호의 종소리가 들렸다.

“교실 옮겨야 돼.”

허겁지겁 책을 챙긴 내가 의자를 집어넣었다.

다음 수업은 에코와 함께 듣는 마법진 수업이었다.

“야, 우리 간다?”

내 팔짱을 낀 에코가 맬러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한 손에 교과서와 필통을 들고서 교실을 나서려는데, 교실 문밖에 누군가가 보였다. 실루엣을 보니 키가 큰 사람이었다.

“노아 선배……?”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벽에 기대서 있는 노아 선배의 모습을 본 내가 내 발에 걸려 휘청거렸다.

설마 또 나 데리러 온 건 아니겠지.

“어우, 누구냐. 선배가 찾는데 빨리빨리 안 나가고.”

나는 불안하게 웃으며 에코의 팔을 꽉 잡아당겼다.

아닐 거야, 아닐 거야…….

속으로 되뇌며 한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나가려는데, 듣기 좋은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케이틀린.”

젠장, 완전 빼도 박도 못 하게 되어 버렸다.

“아, 선배…….”

나는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를 본 선배가 두 눈을 깜빡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옆에 친구가 있었구나.”

갑자기 왜 웃어?!

과하게 예쁜 선배의 웃음에 나는 들고 있던 책을 바닥으로 떨어뜨려 버렸다.

노아 선배가 그걸 줍더니 먼지를 털어 내게 건넸다.

“가, 감사합니다.”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책을 받아들었다.

그 사이 상황 파악을 한 에코가 재빨리 머리를 정리하더니 내숭이 철철 흘러넘치는 몸짓으로 인사를 했다.

“케이트 친구, 에코 그린이라고 합니다, 선배님.”

“그렇구나.”

선배가 고개를 기울여 나와 눈을 맞추자, 하나로 묶은 찬란한 은색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하얀 눈꺼풀이 들리더니 그 밑에 자리한 금색 눈동자가 보였다.

“나 그냥 갈까?”

“아. 아, 뇨.”

그런 얼굴로 물어보면 누가 가라고 하겠어요.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떠듬떠듬 대답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나와 선배를 번갈아 보며 적응 안 되게 사근사근하게 웃던 에코가 슬그머니 몸을 돌렸다.

“그럼 저는 이만, 들릴 데가 있어서요.”

“뭐? 야, 가지 마!”

이 거짓말쟁이, 수업 5분 남았는데 무슨 갈 데가 있다고.

잘해 봐.

그렇게 속삭인 에코가 눈을 찡긋해 윙크를 했다. 환장하겠다.

떠나가는 에코의 뒷모습을 보며 울상을 짓고 있는데, 등 뒤에서 선배의 목소리가 들렸다.

“갈까?”

교실까지 가는 불과 몇 분의 시간이 그렇게 길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저, 선배님.”

매일 이런다고 생각하니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숨 막힌다.

앞으로는 이런 거 안 하셔도 된다고 말하려 고개를 들었다.

“……!”

나를 향해 있던 금색 눈이 미미하게 호선을 그렸다. 다정한 웃음이었다.

나는 삐그덕거리는 동작으로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선배, 왜 자꾸 이쪽을 보고 웃냐고요, 심장 떨리게.

갑자기 심장 박동이 무지 빨라졌다. 넥타이를 정리하는 척 가슴을 쓸어내린 내가 심호흡을 했다.

자꾸 이런 일이 생기면 오래 못 살 것 같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데.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어색해 죽을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책을 꺼내 펼쳤다.

그러자 선배가 한 손으로 슬쩍 책을 덮었다. 내 손가락이 끼일까 봐 힘이 실려 있지 않은 조심스러운 동작이었다.

“걸어가면서 책 보면 위험해.”

“네에…….”

위험한 건 제 심장이고요.

나는 슬그머니 책을 덮었다.

눈알을 슬며시 굴려 옆을 힐끔 보니 선배는 아직도 이쪽을 보고 있었다. 행여나 눈이 마주치면 다시 웃을까 봐 얼른 눈을 깔았다.

“수업은 잘 들었어?”

선배가 걸음을 옮기며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지극히 교과서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네. 선배도요?”

“응.”

생각해 보니 평소와 상황이 반전되어 있었다. 이전까지는 선배에게 말 한마디 붙여 보려 안달인 건 나였는데, 지금은 선배가 무려 먼저 말을 걸지 않는가.

싫은 건 아니지만 조금 당황스럽다. 정말로 끝내려고 했는데 곤란하기도 하고.

인상까지 팍 쓰고 나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듣기 좋게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무슨 생각해?”

그리고 고개를 돌린 순간, 바로 눈앞에 노아 선배의 눈부신 얼굴이 보였다. 웬만해서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금색 눈에 드물게 궁금함이 서려 있었다.

“!”

나는 당혹스러움에 황급히 목을 뒤로 쭉 뺐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메웠다. 얼굴에 뜨끈하게 피가 몰렸다.

“……다, 다 왔네요!”

얼굴에 화색을 띤 내가 마침 코앞에 있는 교실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안녕히! 계세요!”

고개를 푹 숙인 나는 선배가 내 머리를 쓰다듬기 전에 교실로 도망쳤다.

“하아, 하아.”

살인마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양 교실 문을 닫고 숨을 몰아쉬는 내 귀에 마지막 종소리가 들렸다.

다행이다.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그러고 보니 선배는 안 늦나?

문득 의문이 들어 밖을 보자, 종이 울리는데도 유유자적 걸어가는 선배가 보였다.

나는 참담함에 이마를 짚었다.

아니, 이 사람아. 좀 뛰어.

나 미안하라고 더 저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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