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110)

포장을 뜯지도 않았는데 박하 향이 진하게 났다.

어쩜 사탕도 이렇게 자기 같은 걸로 줬을까.

사탕, 선배가 준 사탕.

색소가 들어가지 않아 유리처럼 투명한 사탕을 손에 쥐고 가만히 바라보던 내가 입을 열었다.

“야, 너 이제 걔 안 좋아하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도 불확실한 내 물음에 도라가 욕설을 내뱉으며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 새끼는 언제 적 얘기야.”

분명 동급생 남자애를 상대로 나만큼이나 심하게 사랑의 열병을 앓았던 도라인데, 지금은 그 애 말만 나와도 쌍욕을 한다.

지난달에 차여서 그런가.

그렇구나, 고백을 하고 차이면 콩깍지가 확 벗겨지나?

“나 그냥 선배한테 고백할래.”

“그래, 잘 생각했어.”

내 옆에서 플로라 선배가 준 과자를 우걱우걱 먹던 도라가 대답했다. 무언가를 씹고 있어서인지 발음이 조금 뭉개졌다.

“가루 떨어지니까 침대에서 먹지 말랬지.”

잘 때 불편하단 말이야.

나는 인상을 쓰며 과자 부스러기를 침대에서 쓸어 냈다.

“어, 그런데 그건 뭐야?”

내 잔소리에 먹던 과자를 치워 놓은 도라가 입가를 슥 닦으며 내가 손에 쥔 사탕을 관심 있게 바라보았다.

나는 곧장 도라를 경계하며 사탕을 움켜쥐었다. 이것만은 도라 입 속에 내어 줄 수 없다.

“이건 먹지 마.”

“됐어, 나 박하 싫거든?”

도라가 눈알을 굴리며 됐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그런데 웬일이야? 산 거야? 너도 박하 싫어하잖아.”

사실 박하 싫어한다. 맛없고 매운 주제에 향만 강해서.

나는 남몰래 얼굴을 붉히며 사탕을 꼭 쥐고 우물거렸다.

“……선배가 줬어.”

“플로라 선배?”

“……아니.”

“…….”

내가 선배라고 부르는 사람은 단 둘뿐이었다.

도라가 제법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노아 선배가? 히야, 무슨 일이래.”

눈을 휘둥그레 뜬 도라가 연신 내 어깨를 쳐 댔다.

“가보로 간직해야겠네, 그거.”

“아무튼, 나 고백할 거야.”

사탕을 주머니에 도로 넣고 다짐하듯 주먹을 꼭 쥔 내가 몸을 일으켰다.

노아 선배를 안 본 지 어느새 일주일이 넘어간다.

그런데도 이렇게 마음이 싱숭생숭한 걸 보면, 나는 아직도 마음을 거두지 못한 게 틀림없다.

계속 이렇게 끙끙 앓는 것보다야 확실하게 차이고 며칠 좀 울고 마는 게 나았다.

“후관에는 아무도 안 오니까, 거기로 나오라고 해야지.”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중얼거리다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진짜 나오면 뭐, 고백…….”

“그래, 어차피 차일 거 고백이라도 해 보라고.”

저게 진짜.

나는 도라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그런데 선배는 그런 편지 같은 거 다 버리지 않아?”

“그걸 노린 거야.”

묵묵하게 대답한 내가 평생 쓸 일 없을 거라 생각한 분홍색 일색의 편지지를 꺼내며 내가 대답했다.

“엥, 편지만 주고 만다고? 바람이 너무 소박한 거 아냐?”

바닥에 떨어뜨렸던 과자를 다시 주워 먹던 도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네가 뭘 알아. 난 이것만으로도 떨려 죽겠다고.”

“소심하기는, 사랑은 쟁취하는 거야.”

나는 도라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서 펜에 분홍색 잉크를 묻혔다.

필기용으로 샀던 게 이렇게 빛을 발할 줄이야. 아주 부담스러워서 나오지도 못하게 해 주지.

“제발 나오지 마라.”

“걱정 마셔, 안 나오니깐.”

도라가 남은 과자를 입 안에 털어 넣으며 대답했다.

“그 선배가 하루에 받는 편지가 몇 통인데. 그것대로 다 하다가는 하루 종일 불려 다니겠다.”

“……그치?”

젠장, 분명 사실인데 왜 아픈 거지.

도라의 일침을 들은 나는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글씨체로 편지를 휘갈겼다.

노아 선배,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괜찮으시다면 오후 9시, 후관 뒤쪽으로 나와 주시겠어요?

“음.”

너무 딱딱한 것 같아서 하트도 그렸다.

됐다, 훨씬 징그러워졌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편지지를 봉투에 집어넣고 봉인한 내가 비장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

부디 선배가 이 편지를 갈기갈기 찢어 쓰레기통에 처박아 주기를.

* * *

아침 7시, 대부분의 학생들이 비척비척 일어나거나 아직 자고 있을 시각.

나는 편지를 들고 기숙사를 나섰다. 선배는 모범생이라 일찍 다니니 이 정도는 해야 했다.

“아, 졸려.”

나는 눈을 비비며 남학생 사물함을 향해 걸어갔다. 어렵지 않게 노아스 유리엘의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선배의 성격을 대변하듯 정갈하게 정리된 사물함 안에는 아니나 다를까 편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 어제부터 쌓이기 시작한 것 같았다.

선배 정말 인기 많구나.

새삼 내가 우주의 먼지만 한 존재라는 사실이 느껴졌다.

눈이 아플 정도로 진한 분홍, 분홍, 분홍.

이제 보니 거의 다 분홍색이었다. 내 편지가 눈에 띄지 않을 것 같아 다행스러웠다.

대충 그 사이에 편지를 끼워 넣고 그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편지 탑이 기우뚱하길래, 다 와르르 쓰러지기 전에 황급히 사물함을 닫았다.

“어휴.”

저게 다 떨어졌으면 어떻게 됐을까.

상상만 해도 끔찍해 몸서리치며 두 눈을 꾹 감는데, 복도 저만치서 은색 머리카락이 반짝거렸다.

“!”

나는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곧이어 모습을 드러낸 건 역시나 노아 선배였다.

반듯한 걸음걸이로 사물함을 향해 걸어온 선배가 사물함 문을 열려는 건지 손을 뻗었다.

아, 안 돼. 지금은 안 돼.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

노아 선배의 얼굴 위로 편지들이 가득 떨어졌다.

여학생들이 설렘을 담아 차곡차곡 쌓았을 탑이 무너지고, 곧이어 그녀들의 마음이 복도 대리석 바닥으로 곤두박질쳐졌다.

누구인지 모를 그녀들에게도 미안하지만 편지에게 뺨을 맞은 선배에게 가장 미안했다.

노아 선배가 의아한 얼굴로 자신의 얼굴을 강타한 편지를 주워 들었다.

……도망가자.

창피함이 해일처럼 밀려와 나는 슬금슬금 발걸음을 옮겨 그 자리를 떠났다. 여전히 다리가 후들거렸다.

* * *

해가 진 뒤의 후관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 탓에 어두워진 뒤엔 아무도 걸음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야 그런 거 안 믿으니 상관없었다. 더 정확히는 있지도 않은 귀신 따위보다 중요한 다른 게 있었다.

나는 연신 손톱을 물어뜯으며 풀밭 위를 서성거렸다.

“으음…….”

오늘 하루 내내 수업에 하나도 집중을 못 했다. 시험이 끝나서 망정이지.

시계를 보니 8시 55분이었다. 5분이라, 애매한 시간이었다. 역시 조금 늦게 나올 걸 그랬나.

“에휴.”

한숨을 내쉬며 풀 위에 쪼그리고 앉은 나는 화단에서 데이지 꽃 하나를 꺾었다. 그냥 있으면 더 떨려서, 꽃점이라도 볼 생각이었다.

“나온다, 안 나온다, 나온다…….”

바닥에 쪼그려 앉아 꽃잎을 하나하나 뜯으며 중얼거리고 있자니 진한 회의감이 들었다.

“……안 나온다.”

에휴, 내가 그렇지 뭐.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남은 꽃 줄기를 집어던졌다. 각오하고 있었지만 조금 씁쓸했다.

그렇게 치마를 털고 일어나려던 그때.

“거기서 뭐 해?”

“헉!”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에 나는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손바닥에 무성하게 자란 풀이 닿았다.

“서, 선배?”

노아 선배가 후관 건물을 등진 채 넘어진 내게 손을 뻗고 있었다.

나는 교복에 풀물이 들까 그 손을 잡고 허겁지겁 일어섰다.

“왜, 왜 여기 계세요……?”

제발 그냥 밤 산책 나왔다고 해 주세요.

내가 쭈뼛거리며 묻자, 눈을 깜빡이던 노아 선배가 입을 열었다.

“네가 편지로 부르지 않았어?”

미친, 그건 또 어떻게 알았대. 설마 내가 편지 넣는 걸 봤나?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좀 아닌 것 같아서 마지막에 하트는 지웠는데, 그냥 그대로 둘 걸 그랬나 보다.

“……사물함 어질러서 죄송해요.”

“괜찮아.”

태연하게 대답한 노아 선배가 긴 속눈썹을 나풀거리며 매끄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할 말이 뭐야?”

그 말에 나는 삐걱거리는 고개를 들었다.

악, 망했다. 안 나올 줄 알고 편하게 시간 때울 생각만 하고 있었으니,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내가 한참 동안 입만 뻐끔거리고 도통 말을 하지 않자 금색 눈동자가 이채를 띠었다. 안경알을 통과한 달빛이 일렁거렸다.

젠장, 오랜만에 보니까 더 예쁘네.

선배의 눈을 마주한 내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니까…….”

나는 흔들리는 눈으로 선배를 올려다보았다.

달빛을 받아 은색 머리카락이 반짝거렸다. 마치 보석과도 같은 그 빛에 나는 홀린 듯이 입을 열었다.

내가 들어도 애처로우리만치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팔십 살 먹은 할머니가 꼴깍꼴깍 숨넘어가는 소리 같았다.

“저 선배를 많이 좋아해요.”

선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망했다. 분위기 어쩔 거야.

내 첫 고백을 이딴 식으로 해 버릴 줄이야.

나는 가만히 입을 다물고 고개를 푹 숙였다. 머릿속으로 오만 가지 잡스러운 생각들이 날아다녔다.

선배의 표정은 어떨지, 혹시 완연한 거절의 내색이 서려 있지는 않을지, 그게 두려워서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 고마워.”

노아 선배가 한참 후 꺼낸 말이었다. 답지 않게 목소리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달을 가린 구름이 흘러가 달빛이 비치는 순간, 선배는 얼굴을 반쯤 가린 채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귀가 발갛게 물들어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하긴 후배가 갑자기 고백을 했으니 많이 당황스럽고 난처하겠지.

몇 초가 지나도록 선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몇 번 숨을 들이켜고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고, 입술을 뻐끔거리는 것도 보였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나는 가만히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 살을 파고들었다. 불과 십 몇 초가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체념하고 나오지 않았다면 많이 속상할 뻔했다.

온 세상이 멈춰 버린 듯 조용한 가운데, 밤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몇 초 정도 흘렀을까, 나는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삐걱거리는 동작으로 입을 열었다.

어색해 죽겠다. 뭐라도 말을 꺼내야겠어.

“사실 할 말은 따로 있었어요.”

“……말해.”

조금 늦은 대답이 들리고, 고요하게 가라앉은 금색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에라, 모르겠다.

주먹을 꼭 쥔 내가 큰 소리로 말했다.

“저, 동아리 탈퇴하려고요.”

정적이 흐르고, 선배가 다소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왜?”

그렇게 되묻는 선배는 조금 놀란 것도 같았다.

내가 그 책을 읽지 않았고 미래를 몰랐더라면 조금 오해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머쓱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었다.

“역시 플로라 선배가 슬퍼하시겠죠?”

오해하지 말자, 케이트. 추하다.

나는 교복 치마를 움켜쥐고 그렇게 되뇌었다.

“…….”

말을 고르는 건지 입을 몇 번 벙긋거리던 노아 선배가 말했다.

“꼭 플로라가 아니더라도 개인적으로도.”

금색 눈동자가 언뜻언뜻 흔들렸다. 선배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나는 네가 탈퇴하는 걸 원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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