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110)

나는 한 손에 두꺼운 문학책을 들고 입술을 연신 깨물었다.

너무 일찍 와서인지 동아리 교실엔 아무도 없었다.

까득, 손톱이 이빨과 부딪혀 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탈퇴해야겠지.

책의 내용대로 이루어지기 전에 마음을 접고 싶은데, 매주 노아 선배를 보면서 짝사랑을 끝낼 자신이 없다.

도라네 요리 동아리에 자리가 있었던가?

“에휴.”

아무래도 오늘은 안 되겠다.

심장이 거칠게 두방망이질을 쳐, 나는 책을 내려놓고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어쩐지 속이 울렁거리는 것이 오늘은 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선배, 몸이 조금 안 좋아서 오늘은 참석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다음 주에 뵐게요.

펜으로 그렇게 대충 휘갈기고서 울렁거리는 배를 부여잡고 자리를 떠나려는데, 눈앞에 은빛 머리칼이 어른거림과 동시에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아파?”

“깜짝이야!”

나는 소스라치며 고개를 휙 돌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얼이 빠져 입술을 꾹 닫았다.

“어…… 선배.”

한 손에 그 종이를 든 노아 선배가 멀뚱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일찍 오셨네요.”

나는 선배의 숨결이 닿았던 뒷목을 박박 문지르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

안경 너머의 금색 눈동자가 나를 꿰뚫어 보듯 빤히 응시했다. 눈알을 도륵 굴려 선배의 눈을 피해 봤지만 시선은 여전히 진득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왜, 왜 보는 거지. 내가 뭐 잘못했나?

나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긴장하고 있는데 별안간 차가운 손이 이마에 와 닿았다.

나는 당황스러움 반, 설렘 반으로 연신 입을 뻐끔거렸다.

그사이에 내 이마에서 손을 떼고 다시 손을 들어 제 이마를 짚은 노아 선배가 입술을 달싹였다.

“열은 없는 것 같은데.”

“배, 배가. 아파서.”

선배가 고개를 갸웃했다. 황금색 눈동자에 미미하게 걱정이 어렸다.

“양호실에 데려다줄까?”

“아뇨, 전 그냥 기숙사 가서 쉬면 될 것 같아요.”

내가 곧바로 부정의 대답을 내놓았다.

선배랑 기숙사까지 동행했다가는 가는 길에 긴장해서 토할지도 몰랐다. 그럼 난 진짜 죽는 수밖에 없다.

“저, 가기 전에 잠시만.”

그렇게 돌아서려는데, 노아 선배가 나를 불러 세우더니 무언가를 건넸다.

“시험을 잘 못 봤다길래. 내가 2학년 때 쓰던 필기 공책인데,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서.”

“아…… 감사합니다.”

나는 엄청난 가치를 지닌 공책을 받아 들었다.

좋은 사람이다. 사심을 가지고 대하는 게 미안할 정도로.

“그럼 플로라 선배한테도 말씀 좀 전해 주세요. 수고하세요, 선배!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빛의 속도로 교실을 빠져나왔다.

노아 선배가 멈칫하며 입을 무어라 벙긋거리는 것이 보였지만 눈을 질끈 감고 무시했다.

“아, 감사합니다는 왜 했지.”

뒤늦게 든 생각에 나는 내 뺨을 찹찹 때렸다.

옆을 돌아보자 창문 유리에 비친 내 얼굴이 터질 듯 붉었다.

나는 양 볼을 감싸 쥐고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아씨…….”

설마 나 선배 앞에서도 이런 얼굴을 하고 있던 건 아니겠지.

* * *

분하게도 그 공책에는 완벽한 필기가 적혀 있었다. 정말…… 정말 완벽했다. 내용은 물론 모든 밑줄도 자를 대고 그은 듯 반듯했고 글씨체까지 정갈하기 그지없었다.

빠르게 공책을 훑어본 나는 턱을 괸 채 중얼거렸다.

“머리를 쓰다듬는 동작이 무슨 뜻일까?”

내가 기대하는 바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럴 리도 없을 거라는 걸 알지만, 어쩔 수 없이 설레발 치고 기대하게 된다. 비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뭐, 나도 사람이라고.

나는 쑥스러운 얼굴로 앞머리를 정리하는 척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배배 꼬았다.

“새삼스럽게 무슨.”

빵을 다 먹은 도라가 손가락을 쭉쭉 빨며 입을 열었다.

“너 지난달이었나? 그때도 선배가 머리 쓰다듬어 줬다고 난리 쳤잖아. 너무 유난 떨 것 없는 일 아냐?”

“너 정말 가차 없다.”

나는 우울한 얼굴로 한 손에 든 크림빵을 베어 물고 허공에 마법진을 그리며 멍을 때렸다.

어느 순간 마법진이 반짝이며 천장에서 크림빵이 비처럼 우수수 쏟아졌다. 아무 생각 없이 그리다 보니 수식이 꼬여 버린 것이다.

“와!”

빵가루가 이리저리 흩날리는데도 개의치 않고 그걸 입으로 받아먹는 한심한 도라를 배경으로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살이 움푹 파였지만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새삼스럽게 무슨.’

나는요, 선배. 분해요.

포기하지 못하는 나도 밉고, 이런 내 맘도 모르고 평소처럼 다정한 선배도 미워요.

근데 내가 뭐라고 선배를 미워하나 생각도 드네요.

나는 얼굴을 양손에 묻고 신음했다. 씁쓸함과 함께 자괴감이 밀려왔다.

“……한심해.”

“야, 너도 하나 먹을래?”

도라가 입에 든 빵을 우물거리며 내게도 빵을 던져 주었다.

“야, 너 우냐?”

나는 날아온 빵을 다시 냅다 집어던졌다.

던진 빵이 도라의 머리를 맞추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 * *

나는 깨달았다.

이렇게 꾸물거리다가는 이 답 없는 감정을 치울 수 없다는 걸. 그러다가 오히려 선배에게 더 빠져들어 버릴 거라는 걸.

아, 이 매력적인 사람.

아니야, 생각하지 마!

필기 중이던 펜이 망가져 잉크가 줄줄 새는 것도 모르고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댔다.

“케이틀린.”

“…….”

“케이틀린?”

“아, 네, 네!”

고개를 홱 들자 언짢은 얼굴의 교수님이 보였다. 아, 나 수업 중이었지.

교수님이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칠판을 가리켰다.

“케이틀린? 이 텔레포트 마법진에 무슨 오류가 있는지 말해 볼까?”

나는 황급히 칠판에 그려진 마법진을 훑었다. 다행히 문제는 바로 답할 수 있을 만큼 쉬웠다.

“어…… 룬 문자가 병렬로 이루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답이야. 집중하고 있었던 거 맞지?”

고개를 끄덕이자 교수님의 시선은 금방 멀어졌다.

큰일 날 뻔했네.

“아이씨.”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검게 물든 손을 털었다.

그새 잉크가 팔을 타고 흘러내려 셔츠까지 젖어 있었다. 이건 마법으로도 어떻게 안 되겠네.

새어 나온 잉크로 얼룩진 필기를 보고 있자니 다시 우울해지려 했다.

“에휴.”

다행히도 손을 몇 번 휘젓자 빛 무리와 함께 얼룩은 사라졌지만 글씨 몇 자가 번져 있었다.

나보고 선배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라는 거야, 뭐야.

다시 한숨이 나오려 했다.

결국 잉크로 흠뻑 젖은 교복 셔츠는 세탁을 맡겨야 했다.

아, 세탁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당분간은 하나로 돌려 입어야겠네.

“하아.”

오늘 일진 왜 이러지. 기분 진짜 거지같다.

나는 한 손에 책을 들고서 복도를 터덜터덜 걸어갔다.

“케이트!”

다음 시간이 무슨 수업이더라. 아, 공부하기 싫다.

“케이트, 케이트!”

“아?”

잡생각에 잠겨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뛰어왔는지 거친 숨을 몰아쉬는 여자의 뒤로 분홍빛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어, 플로라 선배…….”

나는 뒷머리를 긁으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다 보니 반가움이 들면서도 그녀를 마주하는 게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이게 모두 그 책 때문이었다.

“케이트 너 아팠다며. 노아한테 들었어.”

걱정 어린 하늘색 눈동자가 나를 향해 있었다. 플로라 선배가 미안하다는 듯 눈썹을 내려뜨렸다.

그러고 보니 배가 아파서 한 번 참석 못 했었지.

“괜히 시험공부랑 동아리랑 병행하느라 그런 거 아냐? 미안해, 내가 진작 알았어야 하는데…….”

항상 웃고 다니는 플로라 선배가 울상을 짓자 괜히 나까지 우울해졌다. 분위기가 덩달아 가라앉는 느낌.

나는 곧장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다.

“아녜요, 저 진짜 괜찮아요. 동아리 때문은 아니고, 그냥 배탈이 났던 것 같아요.”

“정말? 그럼 다행이고.”

그녀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맞다, 나 이거 주려고 왔는데.”

무언가 기억났다는 듯 숨을 들이켠 플로라 선배가 품을 뒤져 무언가를 꺼냈다.

“네?”

“자, 여기.”

품에서 꺼낸 사탕이며 과자며 주전부리들을 내게 잔뜩 안겨 준 선배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내 하늘색 눈동자가 보기 좋게 휘어졌다.

“도라 주지 말고 너 혼자 다 먹어. 시험 보느라 수고했어.”

“…….”

“헉, 배가 아프다 그랬지. 그럼 혹시 못 먹나? 어떡하지…….”

“…….”

나는 안절부절못하는 선배를 올려다보며 슬며시 미소 지었다.

플로라 선배가 그 책의 주인공인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녀가 아니라면 누가 노아 선배의 짝이겠어.

“아니에요, 지금은 다 나았어요.”

슬프지만 노아 선배랑 정말로 잘 어울려.

손에 들린 막대 사탕을 만지작거리던 내가 두 눈을 휘어 활짝 웃음을 지었다.

“고맙습니다, 선배. 잘 먹을게요.”

“아, 그거 있지.”

내가 만지작거리던 박하 맛 막대 사탕을 가리킨 플로라 선배가 입을 열었다.

“그건 노아가 준 거야.”

“……네?”

“배 아픈 거 나으면 먹으라면서 주더라. 그게 걔가 제일 좋아하는 맛이라나.”

애늙은이처럼 박하 맛이 뭐니.

플로라 선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는 그걸 볼 틈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막대 사탕을 꾹 쥐었다.

심장이 다시 또 두근거리고 있었다. 다시 쓸데없는 희망과 설렘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이런 내가 바보 같고 싫었다.

동경하는 선배 둘의 사이를 어떤 식으로든 훼방 놓을 생각은 없다.

오히려 내가 노아 선배를 좋아하지만 않았다면 둘을 진심으로 축복해줄 수 있었을 터였다.

“노아가 네 생각을 많이 해 주나 봐. 겉은 그래도 속은 나름 따뜻한 애니까.”

하지만 노아 선배에겐 아무런 의미 없는 행동이 내게는 너무도 큰, 하루 종일 곱씹으며 멋대로 해석할 만한 일이라는 걸 부정할 수가 없다.

차라리 만난 적도 없었다면, 애초에 만지지도 보지도 못하는 사람이었다면 좀 더 편했을까.

이 애매하고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었다면 좀 더.

“아, 나 이만 가 봐야겠다.”

계속 내게 말을 걸던 플로라 선배가 시계를 흘끗 보더니 화들짝 놀란 얼굴을 했다.

“안녕, 맛있게 먹고 수업 열심히 들어!”

내게 손을 흔들며 멀어져 가는 천사 같은 선배의 모습을 보며, 나는 남몰래 입술을 꾹 깨물었다.

……왜 나는 주인공이 아니라 엑스트라 따위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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