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110)

* * *

신학은 시험을 보지 않는 과목이다. 그래서 평소에도 집중해서 듣는 사람은 드물었지만 시험 기간이 되면 학생들은 아예 교과서도 펼치지 않고 다른 공부를 한다.

그런 상황에서 평소라면 다른 학생들처럼 졸거나 다른 공부를 했을 내가 교과서를 펼치고 나름 열성적으로 보자, 신학을 가르치는 비쩍 마른 중년 교수님은 신이 나서 평소보다 열성적인 태도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래 봤자 듣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지만.

기본적인 교리 부분을 넘어가니 신전의 역사가 나왔다.

그 책과 관련이 있을 법한 내용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예언서에 대한 문단에서 내 시선은 멈추었다.

“미래가 적힌 신비한 책. 사람들은 그걸 예언서라고 불렀습니다.”

교과서에 나와 있는 내용이 교수님의 목소리와 겹쳐졌다.

그제야 나는 고개를 들고 교수님의 말씀에 경청했다.

제2시대는 대륙 각지에서 마물들이 출몰하고 악마가 날뛰던 혼돈의 시대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신전에는 미래가 적혀 있는 예언서라는 것이 있었다고 한다.

미래를 알 수 있다니 많은 이들이 예언서를 탐냈지만 오직 선택받은 자들만이 그걸 읽을 수 있었다.

예언자라고 불렸던 그들은 예언서를 통해 광룡의 출현, 마계의 습격 등 많은 재앙을 예언했고 또 막았다.

하지만 제2시대 이후 체계가 잡힌 나라가 생겼고 마물들의 숫자도 대폭 줄어 오랜 평화가 지속되며 더 이상 예언이 필요해지지 않자, 어느 순간 예언서도 선택받은 자들도 전부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라는 게 교수님이 설명하신 이번 수업의 주된 내용이었다. 상식으로 어렴풋이 알고 있던 내용이었지만, 오늘따라 다르게 들렸다.

그리고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혹시 이게……?

나는 필기를 하다 말고 공책들 사이에 끼워진 강렬한 붉은색 책을 흘겨보았다.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책을 내려다보며 인상을 구겼다.

믿고 싶지 않았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보통 예언이라 하면 마물의 출현이라든지, 전쟁이라든지 하는 큰 사건들을 말해 주지 않나? 이 책이 말해 주는 건 선배 둘이 언제 어디서 키스를 하는지밖에 없는데.

둘째, 이게 예언서라 함은 곧 이 내용이 모두 실현될 미래라는 뜻 아닌가. 그렇다면 노아 선배와 플로라 선배가 진짜로…….

쾅.

나는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죽고 싶다. 잔인하기 그지없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다른 사람의 연애사를 토씨 하나까지 다 알아 버렸잖아.

왜 하필 나지. 많고 많은 제국인들 중에서 왜 하필이면 나야.

그럼 둘은 진짜로 연애하는 건가? 막 교실에서 쪽쪽쪽도 하고?

내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집중하지 않는 것 같자, 조금 시무룩해진 교수님이 안경을 치켜올리며 입을 열었다.

“에, 또…… 신성력이 깃든 예언서는 어떤 것으로도 파괴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

쾅!

나는 다시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 * *

그 책에 나온 이야기는 점점 현실과 맞아떨어지기 시작했다.

복도를 지나다 들은 플로라 선배와 노아 선배의 대화가 책에서 읽은 것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았을 때는 정말로 내 귀를 의심했고, 책에 나온 것과 똑같은 메뉴의 급식이 나왔을 때는 먹다 체할 뻔했다.

믿기지 않지만 내가 여신에게서 선택받은 것 같다. 그리고 이 이상한 책이 다름 아닌 역사 속의 예언서라고 한다.

아니, 왜? 예언서는 오래전에 사라졌다며.

그것도 왜 하필 이런 내용으로? 두 선배의 연애 이야기 빼면 별 영양가도 없는 이런 내용을?

여신이 나한테 이걸 알려 주는 이유는 또 뭘까? 친히 내 짝사랑을 짓밟아 주시려는 건가?

이런 망할 신이. 사람이 예배 몇 번 땡땡이 칠 수도 있지 이걸 이렇게 보복을 해?

누가 들으면 신성 모독이라며 손가락질했을 생각을 하며 입술을 짓씹던 내가 일순 침을 꿀꺽 삼켰다.

나는 엄청난 부잣집 아가씨도 높은 귀족의 딸도 아닌 평범한 지방 영지의 자작 영애였다.

오래전 이미 사라진 예언서를 볼 수 있다고 이리저리 떠들어 봤자 미친놈 아니면 사기꾼 취급이나 안 당하면 다행이었다.

그래서 일단 이 사실은 그냥 혼자 알고 있기로 했다.

무슨 세계를 구원할 비밀이 적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연애담인데 뭐.

하여튼 예언서의 존재도 그렇지만 그것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은 그 책의 내용이었다.

공부는 안 하고 그 책을 모조리 독파한 결과, 답이 없는 건 아닐까 생각했던 내 짝사랑은 정말 답이 없었다.

이걸 소설로 치면 나는 비중 없는 악역 조연에 불과했다.

현실과 같이 나는 책 후반부에 노아 선배와 사귀는 플로라 선배를 보고 눈이 회까닥 돌아가서 그녀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셔츠에 잉크 쏟고 발을 걸어 넘어뜨리는 등등, 사랑에 눈이 먼 멍청하고 못된 인물로 묘사되어 있었다.

어쩐지 자존심 상했지만, 어쨌든 그렇게 플로라 선배를 괴롭히던 내 결말은.

“퇴학?!”

나는 욕설과 함께 책을 집어던졌다.

진짜였다. 나 저러다 화난 노아 선배한테 대차게 차이고 퇴학 통지서 받는다.

내가 여길 들어오려고 공부를 얼마나 많이 했는데. 천재는 아니지만 성적은 10등 내에 들고, 나름 우등생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는데!

이대로 평탄하게 졸업해서 마탑에 취직하는 것이 내 꿈이건만.

노아 선배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고작 사랑 때문에 내 장래를 포기할 생각은 없거니와, 잘 사는 연인들 사이에 꼽사리 낄 생각은 더더욱 없다.

“미쳤나 봐.”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침대 위에 엎어졌다.

누워서 10까지 세고 나니 퇴학 때문에 받았던 충격은 어느 정도 가시는 것 같았다.

다시 몸을 일으켜 펼쳐진 책을 보고 나니 다른 절망감이 나를 덮쳤다. 하필이면 두 선배가 달콤한 키스를 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짝사랑하던 선배가 다른 선배랑 달콤한 사랑을 한다. 교실에서, 기숙사에서, 후관에서 그렇고 그런 짓까지 한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서러웠다. 내가 선배를 얼마나 오래 좋아했건 저 책이 말해 주는 미래에서 나는 주인공도 아니었고, 그들의 사랑을 돋보이게 해 주는 몇 페이지짜리 엑스트라일 뿐이었으니까.

속상한 일이었지만 사실 답은 간단했고 이미 나와 있었다. 내가 선배를 포기하면 되는 일이었다.

“흑…….”

그래도 무려 2년을 좋아했는데, 그 마음이 그렇게 쉽게 사라질 리가 없잖아.

“흐어엉, 으엉, 흑…….”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막 나왔다. 불처럼 타오르듯 사랑한 것도 특별한 사이가 된 것도 아니었지만, 원래 가망 없는 사랑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감정을 지워 내는 건 몸의 일부를 떼어 내는 것처럼 많이 아팠다.

“차였네, 차였어.”

옆 침대에서 혀를 쯧쯧 차는 도라의 일침은 덤이었다.

나는 젖은 눈가를 문지르며 잠긴 목소리로 흐느꼈다.

“흐엉, 닥쳐, 윽…….”

그리고 다음 날, 나는 밤새 울어 퉁퉁 부은 눈으로 시험을 봐야 했다.

머리는 띵하니 어지러웠고 눈앞은 핑핑 돌았으며 속도 울렁거려 시험 내내 내가 뭘 쓰고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좋은 성적이 나올 리가 없었다.

하하, 망했어요.

* * *

“케이트, 넌 늘 10등 안에 들었잖니. 갑자기 등수가 20등 아래로 떨어진 이유라도 있니?”

교수님이 심각한 표정으로 안경을 추켜올렸다.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정리했던 머리카락이 다시 흘러내렸다.

“이번 시험이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었거든. 성적이 오른 애들도 많은데, 유독 너만 훅 떨어져서 그래.”

“그게…….”

나는 눈알을 굴리며 중얼거렸다.

제 눈에 예언서가 보이는데요, 저 좋아하는 사람한테 차이고 퇴학당한대요.

그렇게 지껄였다가는 양호실에 가보라며 허가증을 써 주시겠지.

한참을 망설이던 내가 결국 입을 열었다.

“별거 아니에요. 제가 몸이 조금 안 좋았어요. 다음엔 꼭 성적 올릴게요, 교수님.”

“저런, 그래? 지금이라도 양호실 다녀올래?”

“아뇨, 괜찮아요.”

“음, 그럼 다행이구나. 그래도 너무 무리하진 마라. 방학 잘 보내고.”

교수님이 안경을 벗더니 옷깃으로 그걸 닦으셨다.

나는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곤 터덜터덜 교무실을 나왔다.

“22등…….”

손에 쥔 성적표가 구겨졌다. 입학 이래 사상 초유의 성적이었다.

“후우.”

갑자기 억울해졌다.

내가 왜 이러고 있어야 하지.

그 망할 책 때문에 성적도 떨어지고, 이게 뭐야.

도서관에서 그 책을 집어 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다시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혹시라도 흐를까 두 눈을 살짝 휘는데, 눈앞에 붉은 머리카락이 언뜻 흔들렸다.

“케이트 누나?”

나는 황급히 눈가를 문질러 닦으며 고개를 팩 돌렸다. 살짝 코가 막힌 소리가 나왔다.

“어…… 야, 오랜만이다.”

내 앞에 서 있는 건 옆 영지 히리스 변경백네 아들 아르한이었다.

일단 어릴 때부터 알던 사이이긴 한데 애가 영 공부를 안 해서 걱정스러웠다. 요새 왜 저렇게 치대는지도 모르겠고.

어쨌든 우는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몇 번 눈을 깜빡여 태연한 얼굴을 가장했다.

“안녕. 그러고 보니 누나도 성적 나왔겠다.”

아르한이 붉은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나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짐짓 진지한 표정을 깔았다.

“그래. 그러는 너는 중간고사보다 올랐……”

“22등? 와아, 잘 봤네.”

그건 또 언제 봤대.

나는 경계하며 성적표를 품에 끌어안았다.

아르한이 마냥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입가를 가렸다.

“잘 봤는데 예쁜 얼굴 왜 그렇게 구기고 있어.”

“……너는 몇 등인데 그래.”

“몰라, 안 알려 주시던데.”

차마 알려 줄 수 없는 등수였나 보군.

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아르한의 등을 두드렸다.

그래, 자기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언젠간 정신 차릴 거야. 무엇보다 얘는 검술을 잘하니까.

“괜찮아, 이제부터 잘하면 되지.”

“나 괜찮은데.”

“그래, 다행이네. 나 망해서 마저 복습하러 가야 해. 나중에 만나면 매점에서 먹을 거 사 줄게.”

안녕. 잘 가라.

아쉬워하는 아르한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고 떠나려던 내가 일순 걸음을 멈추고 훅, 숨을 들이쉬었다.

눈앞에 긴 은색 머리카락이 나풀거렸다. 그게 누구의 것인지 알아차린 내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황급히 인사를 했다.

“아, 안녕하세요 선배.”

복도를 지나가던 노아 선배가 나를 보고 입술을 달싹이더니 낮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

“뭐야, 윽.”

나는 아르한의 붉은색 뒤통수를 꾹 눌러 억지로 인사를 시켰다.

“하, 하.”

평소라면 더듬거리며 뭐라도 말을 붙였을 내가 가만히 웃고만 있자 선배는 조금 의아해 보였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고, 노아 선배가 입을 열었다.

“시험은 잘 봤어?”

“아…… 어…… 음, 아니요.”

10등 넘게 떨어졌어요.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하고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

탄식 비슷한 것을 흘린 노아 선배가 위로하듯 말했다.

“다음에 잘 보면 되지.”

수석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다니, 기만인가.

폭.

곤란한 얼굴로 웃고 있는데 선배의 큼직한 손이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조심스러운 손길이 천천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

지금 선배가 내 머리를 쓰다듬은 건가?

“……?”

나도 모르게 몸을 굳히자 머리 위의 손은 곧장 떼어졌다.

“다음 주에 동아리에서 보자.”

인사를 한 선배가 몸을 돌려 떠나갔지만, 나는 인사할 생각도 못 한 채 입을 헤벌리고 있었다.

아르한이 헝클어진 제 머리를 문지르며 얼굴을 구겼다.

“저 사람이 유리엘 후작가 그 사람이야?”

아르한에게 대답할 생각도 않고, 나는 내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미간을 좁혔다.

그렇게 한참 동안 노아 선배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나서야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했다.

그래, 생각해 보면 원래 저 정도의 다정함은 갖춘 사람이었다. 내가 그래서 좋아했었지, 참.

아무래도 그 책을 보고 난 후에 나도 모르게 평소보다 더 선배를 의식하고 있었나 보다. 그래서 평소와는 다르게 느껴지는 것일 터.

현실을 직시하니 씁쓸함이 입 안을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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