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아카데미를 배경으로 하는 뻔한 로맨스 장르인 그 책의 내용은 이랬다.
천사 같고 아름답고 똑똑한 여주인공,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는 멋지고 잘생긴 남주인공. 악역들의 방해를 받지만 결국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어쩌고저쩌고.
여기까지는 지극히 평범한 로맨스 소설의 전개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면 내가 이렇게 당황하지도 않았겠지.
그 책에 딱 하나 이상한 점이 있다면, 등장인물들이 전부 우리 아카데미에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제목이 없는 그 책의 여주인공은 플로라 선배였다.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플로라 아이비는 원래 완벽한 사람이었으니까.
여주인공과 사랑을 피우는 남주인공이 노아 선배인 것 역시, 놀랍지 않았다.
뭐, 보나마나 할 일 없는 누군가의 장난일 테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그렇고 그런 짓을 하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진짜 기분이 나쁜 것은 나도 이 소설에 나온다는 사실이었다.
케이틀린 블레어, 뭣도 없는 주제에 남주인공인 노아 선배를 짝사랑하다 여주인공인 플로라 선배를 질투해 괴롭히다 퇴학당하는 악역.
심지어 메인 악역은 따로 있고 내 분량도 역할도 얼마 되지 않는다. 기껏해야 십몇 페이지 정도? 이거 완전 먼지 같은 조연 아닌가.
기분이 더러웠다.
내가 노아 선배를 좋아한다는 사실부터 인물들의 성격, 배경까지 실제와 미묘하게 맞아떨어져서 조금 오싹하긴 했지만 그뿐.
“……미친놈 아니야.”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책장을 구겼다.
어떤 할 일 없는 변태 이상 성욕자 새끼가 같은 학교 학생으로 이런 소설을 쓴 거야. 거기다 나를 이런 소모성 악역으로 써먹어?
“그러니까…… 누가 3학년 플로라 양과 노아스 군을 상대로 이상한 소설을 썼다고.”
“네, 이런 건 확실하게 처벌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피곤한 얼굴로 미간을 문지르시는 교수님을 향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꼭 쥔 주먹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부들부들 흔들렸다.
펼치는 것조차 불쾌했지만 어쨌든 고발은 해야 하니 꾹 참고 다 읽은 그 책에는, 주인공 둘의 제법 짙은 스킨십까지 묘사되어 있었다.
그것도 기분 나빴고 나를 그렇게 이상한 역할로 썼다는 것도 빈정 상했다.
흥, 같은 학교 학생들 상대로 이상한 글 썼다는 쪽팔리는 사유로 벌점이나 왕창 먹어라.
“감히 같은 아카데미 학생을 소재로 이런, 이런……!”
나는 이어 배에 힘을 주고 꽥 소리쳤다.
“변태적인 망상글을 쓰다니요!”
“그러니?”
“네! 아주 저질적입니다. 각오 단단히 하고 보셔야 할 겁니다.”
책을 집어 들어 펼친 교수님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안경을 고쳐 쓰시더니, 거참 이상하다는 투로 말씀하셨다.
“아무것도 안 보인다만.”
“엥.”
교수님의 예상외의 대답에 나는 눈을 비비며 책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찍어 낸 듯 정갈한 글씨체로 어제 봤던 그 내용이 적혀 있었다.
뭐야, 뭔데.
나는 당황한 얼굴로 침을 꿀꺽 삼키곤 다시 입을 열었다.
“아마 책에 마법이…… 걸려 있나 봅니다.”
이상하다, 그런 기운은 못 느꼈는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미간을 좁히다 속으로 납득했다.
하긴 그런 글을 써 놓고 아무런 보안도 해 두지 않았을 리가 없지.
마법진에 오류라도 나서 나한테만 보이나 보다. 오냐, 잘 걸렸다 자식아.
“그래, 알았다. 케이트 네가 아무 이유 없이 이럴 아이는 아니지.”
교수님이 그 책을 이리저리 훑어도 보고, 장치를 가져와 간단한 검사를 시작하셨다.
피해자인 두 선배 모두 고위 귀족이다 보니 교수님도 빠르게 조치를 취해 주시려나 보다.
솔직히 덤빌 용기는 없고, 마력을 추적해 누구의 짓인지 알아내기만 하면 엄청 째려봐 주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는데, 검사를 마친 교수님이 붉은색을 띤 책을 도로 내게 건네주셨다.
“이상하구나. 아무 마법도 걸려 있지 않은데?”
“예? 그럴 리가 없는데요.”
나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되물었다.
“케이트.”
“그, 그럴 리가 없잖아요! 여기 적혀 있는데! 노아스는 플로라의 입술을 머금고 부드럽게 핥았다.”
“케이틀린.”
안경을 벗은 교수님이 지친 표정으로 눈두덩을 꾹꾹 누르셨다.
“나가렴.”
“……예.”
나는 책을 든 채 밖으로 쫓겨나 문에 기대섰다.
나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머리를 쥐어 싸맸다. 머릿속이 핑핑 돌아 어지러웠다.
시험 2주 남기고 내가 드디어 미쳐 버렸나?
* * *
케이틀린 블레어 양, 저는 마탑 소속 일라이자 셀린이라고 합니다.
마탑의 마법 감정 서비스를 이용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리며, 보내 주신 공책에는 보존 마법과 방수 마법을 포함한 그 어떤 마법도 걸려 있지 않음을 알려 드립니다.
혹시 물건을 잘못 보낸 게 아니신지요?
비용은 다시 받지 않을 테니, 이틀 내로 다시 보내 주시면 다시 감정해 드리겠습니다.
귀하의 공책은 돌려보냅니다.
교수님의 마도구가 이상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용돈을 탈탈 털어 마련한 의뢰비와 함께 마탑으로 보냈던 책이 저런 답변을 달고서 되돌아오자, 이제 분노보다는 의구심이 들었다.
마탑은 돌팔이가 아니었다. 그 명성만큼 신원이 확실하고 신빙성도 있었다.
세상에, 그럼 그냥 내가 미친 건가?
거울을 보자 눈 밑 그늘이 턱까지 내려온 초췌한 몰골의 여자애가 있었다. 밤에 누가 보면 귀신인 줄 알 것 같은 꼴이었다.
나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책상에 올려놓은 책을 흘깃 바라보았다.
요새 저거 신경 쓰느라 부쩍 잠도 줄고 힘들기는 했지. 도라까지 내 얼굴을 보고 걱정했는걸. 그래, 그냥 깔끔하게 신경 꺼 버리자. 그게 나아. 시험공부도 마저 해야지.
여전히 혼란스러운 구석이 많았지만, 결국 나는 그 책을 다시 도서관에 얌전히 돌려놓았다.
그냥 내 상태가 잠시 이상했던 것이기를 바라며.
* * *
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침대 위에 떡하니 놓여 있는 빨간 양장 표지의 책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왜 여기에 있어. 불과 10분 전에 도서관 책꽂이에 꽂아 넣었는데.
등을 타고 소름이 쫙 올라왔다.
“도라야, 이게 왜 여기에 있어?”
“네가 거기에 놔뒀겠지?”
침대에 늘어진 채 책장을 넘기고 있던 도라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아닌데, 나 도서관에 반납했는데.”
“네가 까먹고 안 가져갔겠지?”
“아닌데, 나 안 까먹었는데.”
내가 한심했는지 아니면 더 대꾸해 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는지, 도라에게서는 더 이상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침대 옆에 우두커니 서 있던 나는 책을 들고 쫙쫙 찢어 버리기 시작했다.
“깜짝이야! 너 왜 그래?”
도라가 놀랐는지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남색 눈에서 공부가 그렇게 힘드냐는 측은함이 느껴졌지만 신경 쓰지 않고 가쁜 숨을 색색 내쉬었다.
나는 찢어진 책의 잔해를 쓰레기통에 처박아 놓고서 침대로 직행했다.
“나 조금만 잘게.”
“어…… 그래. 잘 자.”
평소와 다른 내 행동에 도라가 당황하는 것이 보였다. 잘 자라고 이불까지 덮어 주고 말이다.
피로에 절어 아파 오기 시작하는 눈을 감자 곧바로 어둠이 덮쳐 왔다.
* * *
그날 이후 나는 그 꺼림칙한 책을 떼어 놓으려 별 난리를 다 피웠다.
몇 번이고 다시 도서관에 돌려놓아도 봤고, 불로 태우려다 교복 셔츠도 그을려 봤고, 바람 마법으로 수천 갈래 갈기갈기 찢어도 봤지만 그 책은 각인된 병아리처럼 계속해서 내게 돌아왔다.
“으아악!”
저 미친 책!
10분 전에 후관 호수 밑바닥에 던져 버렸던 책이 멀쩡한 모습으로 침대 위에 놓여 있자, 나는 소리를 지르며 방구석으로 책을 집어 던졌다.
처음에는 조금 신기했지만, 지금은 꼭 괴담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마법도 안 걸려 있는 책이 대체 어떻게 이러냔 말이다.
비련의 여주인공 같은 포즈로 침대에 기대어 있자니 갑자기 눈물이 퐁퐁 솟았다.
나는 책을 으스러져라 꽉 쥐고 중얼거렸다.
“나한테 왜 이래.”
책에게 말을 걸고 있다니 한심했지만, 그걸 자각할 이성도 정신머리도 지금 내겐 없었다.
양장 표지 위로 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 강렬한 붉은색이 나를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찢어 버리고 싶었지만 어차피 다시 돌아올 걸 알았기에 구태여 힘쓰지 않았다.
“얘가 왜 이래.”
기숙사로 돌아온 도라가 눈물을 뚝뚝 흘리는 나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흐윽. 난 안 미쳤어.”
“그래, 너 안 미쳤어. 뚝, 뚝.”
내 눈물을 닦아 주며 눈치를 살피던 도라가 조심스레 물었다.
“야, 너 혹시…… 노아 선배한테 고백했다 차였니?”
“아니야!”
나는 황당한 얼굴로 소리쳤다.
왜 당연히 차였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데. 어이가 없었지만 그건 나중에 따지기로 했다.
마음 같아서는 도라에게 전부 털어놓고 싶었지만, 내가 처한 이 상황이 남에게 말하기 참 뭐하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난 친한 친구에게까지 미친 사람 취급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어느새 그 책의 고정 자리가 되어 버린 책상 위를 바라보았다.
“오, 공부하게?”
내가 그 책을 집어 들고 펴자 도라가 잘 생각했다며 내 등을 두드렸다.
나에게만 보이는 이 망측한 책이 그냥 시답잖은 소설이든, 아니면 다른 숨겨진 정체가 있든 내가 시험도 못 보고 미쳐 버리기 전에 어떻게든 치워 버려야지 안 되겠다.
나는 입술을 이리저리 짓씹으며 미간을 문질렀다.
파손되어도 머지않아 다시 복구되고, 어디다 버려 놓아도 내 방으로 돌아오고.
확실히 일반적인 책은 아니지만, 또 마법은 걸려 있지 않단다. 마탑에서 그랬으니 말 끝났지 뭐.
이 초자연적인 현상이 마법이 아니라면 다른 답은 단 하나뿐이었다.
설마 신전과 관련이 있는 책인가?
꽤 설득력 있는 가설에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책을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