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110)

창가에 앉은 미청년이 책장을 넘겼다.

책장이 넘어가며 사락 소리를 냄과 동시에 예쁜 붉은 기를 띤 입술이 작게 달싹였다.

창문을 통과한 햇빛을 받아 긴 은빛 머리카락이 반짝거렸다.

동그란 안경 너머 창공의 별처럼 반짝이는 보석안이 내 시선을 휘어잡았다.

절경이었다.

나는 넋을 놓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 * *

나는 내 인생 17년 동안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성격, 배경 따위도 모르는 남에게 그렇게 쉽게 마음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해 본 적 없었다.

하지만 그건 전부 옛날이야기다. 정확히는 노아 선배를 보기 전의 생각이었다.

아직도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지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 즈음의 나는 특별한 만남 따위를 기대해 볼 새도 없이 낯선 환경과 빡센 시간표에 적응해 보려 발악하는 평범한 신입생이었다.

앞으로도 이런 나날이 쭉 이어질 거라 생각하고 있었고 말이다.

그날도 쉬는 시간에 짬을 내 들른 도서관에서 신중을 가해 반납한 책의 원래 자리를 찾고 있었다. 잘못 꽂으면 깐깐한 사서 선생님이 있는 대로 짜증을 낼 테니.

발걸음 소리마저 우아하기 그지없었다. 저게 가정 교사가 말했던 귀족의 걸음걸이라는 걸까.

그 우아한 발걸음 소리는 정확히 내 옆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별생각 없이 옆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내 숨이 멎었다.

밑에서 누가 잡아당긴 것처럼 입이 벌어졌다.

내 옆에 서 있던 그 남학생의 얼굴이 너무 찬란한 탓이었다.

큰 키며 탄탄한 골격 덕에 겨우 여자가 아니라고 납득할 수 있었다. 그만큼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남자……인가? 아니, 사람인가? 신전에서 탈출한 조각상 아니고? 무슨, 조각상에 칠을 저렇게 해 놨냐.

긴 은색 머리카락은 맑고 깨끗하게 반짝거려 꼭 다이아몬드처럼 보였고, 황금색 눈동자는 호수처럼 깊었다. 또 콧대는 미술실 석고상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높고 곧았으며 피부는 소복하게 쌓인 하얀 눈 같았다.

이야, 참 곱다…….

그 남학생이 서 있던 자리는 햇빛이 환하게 비치는 창가였고 엷은 은색 머리카락은 가닥마다 햇빛을 받아 마치 안개처럼 일렁였다.

그러니까 멋모르는 시골 출신 신입생의 마음을 사정없이 흔들기엔 충분했단 말씀.

시선을 아래로 돌리니 2학년임을 알려 주는 파란색 명찰에 하얀 실로 이름이 수놓아져 있었다.

노아스 유리엘.

입학하기 전부터 마법 천재로 명성이 자자한 그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 입학시험을 보러 왔을 때, 얼핏 아카데미 복도에 붙은 성적을 본 적이 있었다. 1이라는 숫자 옆에 적혀 있던 그 이름.

그렇구나. 그 사람이구나. 그 사람이 이렇게나 예쁜 사람이었구나.

나는 내가 무례하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한 채 넋을 빼놓고 그 남학생의 얼굴을 원 없이 감상했다.

나는 그렇게 남학생이 지나가려 내 옆에서 기웃거리다 결국 책장에 바짝 붙어 지나갈 때까지 비켜 주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책을 빌리고 멀어져 가는 뒷모습까지 오롯이 눈에 담으려 노력했다.

은색 머리카락이 흔들리며 시야에서 사라진 그 순간, 나는 아까부터 내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뛰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야흐로 내 인생에서 가장 긴 짝사랑이 시작된 역사적인 날이었다.

* * *

나는 지금 2년째 짝사랑 중이었다.

노아스 유리엘. 실력 있는 마법사이자 한 학년 위 선배.

세기의 사랑까지는 아니지만 꽤 진심이었고, 그동안 마치 버릇처럼 선배를 좋아해 왔다.

“그럴 거면 고백하라니까.”

아, 또다. 그럴 용기가 있었으면 진작에 해치웠지, 지금 이러고 있었겠냐.

한심하다는 듯한 도라의 핀잔에 나는 양손에 얼굴을 묻으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내 주제에 어떻게 고백을 해….”

나는 그저 그런 자작가의 영애. 선배는 지체 높은 후작가의 영식. 그건 운 좋게 마력을 타고 났다고 좁힐 수 있는 격차가 아니었다.

“다들 그런 거지. 고백했다 차여도 보고.”

도라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지는. 동급생에게 차였다고 엉엉 울며 기숙사 침대에 엎어진 게 고작 한 달 전인데.

“차이기는 싫어…….”

나는 울상을 지으며 다시 교실 창문을 들여다보았다.

잘생긴 은빛 머리의 청년이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그에게 사랑스러운 분홍색 머리칼의 여자가 살포시 웃으며 다가갔다.

“노아, 일찍 왔네.”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노아 선배가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내 어깨가 절로 위축되는 것이 느껴졌다.

“플로라 선배다.”

도라가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플로라 아이비. 모든 게 완벽한 노아 선배의 소꿉친구이자, 내가 2년째 고백을 못 하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했다.

끼리끼리 논다더니, 플로라 선배도 노아 선배 못지않게 엄청난 사람이었다.

신성 능력자인 것으로도 모자라 착하고 예쁘고 똑똑하고, 말해 뭐 해. 하여튼 완벽한 사람.

부드럽게 물결치는 분홍빛 머리, 달콤한 하늘색 눈동자.

저런 사람이 옆에 있는데 내가 눈에 차겠어?

나는 불만스럽게 흔해 빠진 내 노란색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한편 노아 선배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던 플로라 선배가 언뜻 이쪽을 바라보았다.

“어, 케이트 왔네.”

그녀가 우리를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도라를 보내곤 억지웃음을 지으며 동아리 교실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들.”

“안녕. 시험 준비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책은 잘 읽어 왔고?”

플로라 선배가 유쾌하게 웃으며 내 등을 두드렸다.

내가 대답 대신 책을 들어 보이며 미소 지었다.

“안녕.”

뒤늦게 찾아온 노아 선배의 인사에 나는 머뭇거리며 묵례했다.

들릴 듯 말 듯 작게 한숨을 내쉬며 의자를 끌어 앉은 나는 고개를 슬쩍 돌려 노아 선배를 바라보았다.

구름 같은 은색 머리카락을 보니 다시 가슴이 두근거렸다.

같은 동아리 후배이자 같은 학부 후배. 난 그뿐이겠지.

성실하고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라도 생각해 준다면 고맙고.

아니, 내 존재를 의식이라도 하고 있다면 고맙지.

애초에 동아리 활동이 없었다면 아마 평생 말 섞어 볼 일도 없었을 텐데.

아마 이 아카데미에 나 같은 여학생이 몇십 명은 될 거다.

같은 동아리라 아는 척이라도 해 주는 거지, 선배한텐 그들이나 나나 똑같을 테고.

한 손으로 턱을 괴자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눈앞을 가렸다. 나는 입으로 바람을 불어 머리카락을 날려 보냈다.

“자, 자!”

두꺼운 책 한 권을 꺼내든 플로라 선배가 책상을 쳐 시선을 모았다.

“그럼 감상평을 나눠 볼까?”

나는 다소 의욕 없는 손길로 책을 펼쳐 들었다.

사실 생전 관심 없던 독서 동아리에 든 것도 선배 때문이다. 플로라 선배를 제외하면 사실 여기서 문학 책을 좋아해서 동아리에 들어온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플로라 선배의 부탁으로 들어온 노아 선배, 노아 선배를 보려 들어온 나. 기차놀이처럼 줄줄.

“케이트부터 말해 보자.”

플로라 선배의 지명에 내가 후다닥 책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아, 네.”

새까만 양장 표지가 인상적인,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을 가진 작가가 쓴 고전 문학 책.

가뜩이나 시험 기간이라 읽을 시간도 의욕도 없었지만 노아 선배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꾸역꾸역 읽어 왔다.

한 손에 두꺼운 책을 들고 노아 선배를 힐끗거리던 내가 입을 열었다.

“주인공의 사랑을 너무 얄팍하게 묘사하진 않았나, 생각했어요.”

“어머, 그래?”

플로라 선배의 눈이 반짝였다. 새로운 감상평이 신기한가 보다.

나는 그에 힘입어 말을 이었다. 준비를 했는데도 선배들 앞에서 발표하는 건 언제나 어렵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눈을 뗄 수 없고, 자꾸 시선이 가고, 그런…… 거니까요.”

처음에는 자신 있게 시작했는데 어째 갈수록 힘이 빠졌다.

말을 마무리하려 다시 입을 여는데, 시선이 느껴져서 보니 알 수 없는 기색을 띤 황금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나는 곧장 고개를 푹 숙였다. 아, 제발 내 표정을 보지 못했기를.

그냥 내 발표에 집중하는 거겠지만 일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케이트의 감상 잘 들었어.”

플로라 선배가 친절한 웃음을 지었다. 다행히 그녀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아직도 나를 향해 있는 안경 너머의 금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 * *

“다음 주부터는 시험 공부해야 하니 동아리 활동이 없어. 그럼 다들 시험 잘 봐!”

“네, 시험 잘 보세요.”

나는 플로라 선배의 배웅을 받으며 두꺼운 책을 끌어안은 채 교실을 나왔다.

교실 문을 닫고 발걸음을 옮기다 말고 다시 교실 안을 돌아보았다.

플로라 선배를 바라보는 노아 선배는 드물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정말 보기 힘든 모습이다.

무슨 이야기를 저렇게 하는 걸까.

“잘 어울린다.”

무심코 그렇게 생각해 버렸다.

나는 내 주제를 알았다. 한 번도 이 마음에 보답 받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해 본 적은 없다. 그래도 언뜻 부러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만 없어지면 될 텐데.”

그냥 탈퇴해 버릴까.

나는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몸을 돌렸다.

오늘따라 어째 평소보다 선배에 대한 생각이 더 많이 나는 것 같았다.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기는 몸에 점점 힘이 빠졌다.

기분은 그저 암울했다.

* * *

“반납이요.”

“책 제목 적어 두고 자리에 돌려 놔.”

책의 먼지를 닦던 사서 선생님의 무심한 대답에, 안 그래도 우울했던 기분이 더욱 바닥을 쳤다.

“아휴.”

오늘만 한숨을 몇 번째 쉬는 거야. 수명 줄었겠다.

아냐, 됐어. 시험이 2주 남았는데 공부나 하자. 오히려 잘 됐지 뭐. 노아 선배 생각 하지 말고, 정말 정신 바짝 차리고 공부만 하는 거야.

그렇게 주먹을 꼭 쥐고 다짐하며 도서관을 나서려던 내 눈길을 책 한 권이 휘어잡았다.

“제목이 없네?”

나는 미간을 좁히며 책꽂이를 향해 다가갔다.

무슨 내용이길래 표지가 저렇게 요란하지.

죄다 학술용 저서와 문학 책, 정말 드물게 대중 소설책이 있지만 늘 대출 중인 아카데미 도서관에 저런 책이라니. 새로 들어왔나?

“선생님, 저…….”

책을 집어든 내가 입을 열었지만 사서 선생님은 백과사전에 내려앉은 먼지를 닦느라 여념이 없어 보였다.

결국 나는 선생님을 부르는 것을 포기하고 근처 책상에 자리를 잡았다.

책을 아무렇게나 펼쳐 읽어 내리던 나는 작게 침음을 흘리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오.”

좀 야하다.

도대체 왜 학교 도서관에 이런 게 있는 거지.

나는 휘파람을 불며 책장을 넘겼다. 아무데나 펼쳤는데 입술 부비는 장면이라니, 엄청난데.

등장인물 둘은 어쩌다 교실에서 저런 짓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해져 나는 소설의 앞부분을 펼쳤다.

가만히 책을 훑던 내 눈이 그대로 멈추었다.

내 얼굴이 점점 굳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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