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월의 어느 날 (303/304)

12월의 어느 날

“그간 고생 많았어. 배 회장.”

“…….”

배영성은 바쁘게 달려온 만큼 감회가 남달랐다. 감염병 바이러스가 시작되기 전부터 달려온 그의 행보는 상당히 오랜 시간을 잡아먹었다. 이제 그 끝이 보이기 시작하는 때라 그런지 괜히 과거를 돌아보게 되고, 현실에 안도하게 된다.

“…결국 여기까지 왔습니다. 바빴던 만큼 보람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자신은 나은 편이다. 지금 김현성 회장은 세계 바이오 기업들의 회의 요청에 시달리고 있었다. 회의에서 나오는 말은 백신 생산을 허가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백신 생산에 있어서 해외에 라이선스를 넘기고 위탁 생산을 진행하겠다는 공식 발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마무리가 남았지.”

“그렇죠.”

치료제의 성공 발표와 공급 시기 결정, 이후 변이 바이러스까지 대응하는 일을 말함이다.

“이 부분은 사장단에 맡기자. 여기까지 했으면 충분하잖아. 우린 할 만큼 했어.”

“하하. 어떻게 빠져나갈지 고민했는데, 가려운 부분을 제대로 긁어 주시네요.”

“오늘은 일찍 들어가. 매일 야근하느라 몸 다 상했잖아.”

“회장님도 마찬가지 아니십니까?”

“내 나이가 배 회장이랑 같아? 난 아직 팔팔하지.”

“회장님도 내년이면 50입니다.”

“…….”

잊고 있었는데, 배 회장의 말 덕분에 떠올랐다.

곧 있으면 자신이 죽었던 그 날에 이르게 된다. 당시 자신은 2021년 새해를 보지 못하고 사고로 죽었었다.

“잠깐 달력 좀….”

“이제 일정도 잊어버리셨습니까? 요일만 불러보세요. 제가 주르륵 읊어 드리겠습니다.”

수안은 말없이 달력을 보고 있었다.

‘내일이네….’

과거 자신이 죽었던 날이 바로 내일이었다.

‘내가 겪어 보지 못한 미래가 이제야 오는구나.’

“내일 배 회장 나오지 말고 그냥 쉬어.”

“에이. 저 아직 일할 수 있다니까요. 퇴직은 이릅니다.”

“아니. 그냥 며칠 쉬고 나오라고. 일은 사장들에게 맡겨.”

“회장님이 쉬셔야 저도 쉬죠.”

“그럼 나도 쉴까?”

“그런데…. 혹시 뭐 생각나셨습니까? 감염병 19 말고 또 다른 일이 있습니까?”

달력을 확인한 수안의 표정이 계속 굳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묻는 배영성이다.

“다른 일은 무슨. 아무 일도 없어.”

“휴. 괜히 걱정했잖습니까.”

“내일은 진짜 쉬어. 나도 러닝이나 하면서 하루 쉴 테니까.”

“그게 쉬는 겁니까? 그렇게 뛰면 나중에 뼈마다 쑤십니다.”

“푸흐. 운동해야 오래 살지 이 사람아.”

“그럼 저도 갈 테니까 그런 줄 아십시오.”

“오오! 어쩐 일로?”

“요즘은 집에서 쉬는 게 더 고역입니다. 차라리 나와서 노는 게 편하죠.”

“흐하하. 그렇지. 배 회장 말이 맞아.”

나이가 들면 왠지 모르게 집이 불편하고 어색해진다.

물론 수안은 집이 좋고 아내와 함께하는 시간이 즐거웠지만, 워낙에 많이 부려 먹은 배영성의 경우엔 집이 어색할 만도 했다.

* * *

다음 날 수안은 자주 오던 실내 육상 경기장으로 향했다.

이 육상 경기장도 강운 그룹 소유였다. 피겨의 여왕인 연하를 위해 퀸즈 아이스 링크를 건설한 것처럼, 육상의 황제인 수안을 기린다며 계열사 사장들이 깜짝 선물로 건설한 육상 경기장이었다. 수안은 이 선물을 그냥 썩힐 수 없다며 자주 와서 사용하곤 했었다.

“헛 둘. 헛 둘.”

수안은 벌써 도착해 준비운동을 하는 배영성에게 다가갔다.

“여! 일찍 왔….”

그때 수안의 눈에 건물 뒤에서 나타난 검은 모자를 쓴 인물이 들어왔다.

그의 오른쪽 손은 품에 들어가 있었고, 모자로 가린 얼굴 아래로 보이는 입술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그 입술은 살짝 벌어지며 단단하게 다문 치아를 드러냈다. 뾰족한 송곳니까지 위협적이었다.

‘분노? 왜?’

그는 크나큰 분노를 가슴에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수안은 저도 모르게 배영성을 옆으로 밀쳤다. 자신은 더 젊고 건강했기에 경호원이 옆에 없어도 사람 하나 정도는 상대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다가온 그 남자의 품에서 손이 빠져나왔고, 손에 들려 나오는 물건은 작은 권총이었다.

“……!”

수안의 눈에 느릿하게 자신으로 향하는 총구가 들어왔다. 마치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 같았다.

“안 돼!!”

수안은 배영성이 자신을 향해 뛰어드는 모습도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을 대신해 총을 맞겠다는 심산이었겠지만, 이미 늦었다.

총을 든 남자와 자신의 거리는 너무 가까웠고, 자신에게 밀쳐진 배영성은 너무 멀리 있었다. 자신이 아무리 빠르다고 한들 총알보다 빠르진 않았다.

수안은 총을 든 남자가 고개를 들자 누군지 알아볼 수도 있었다.

‘변태영. 역시 그가 내게 원한을 품었구나.’

신라 일보 장남 변태영이다. 신라 일보가 흔들리기 시작하며 이혼을 당했고, 이후 신라 일보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집안 가업부터 가정생활까지 수안에 의해 파탄에 이르렀다. 충분히 범행동기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수안은 운명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죽었던 그 날 그 시간까지만 살 수 있다는 신의 안배로 느껴졌다.

-타아앙!!!

-탕탕. 탕!

총구가 불을 뿜어내고 수안이 바닥에 쓰러지는 동안 수안에게 총을 쏜 변태영도 수안의 경호원들이 쏜 총에 똑같이 쓰러지고 있었다. 간발의 차이였지만, 수안이 총에 맞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회장님!!!”

“구급차 불러!”

“지혈이 필요합니다!”

“당장 차에 있는 응급 키트 가져와! 근처 병원 수배해! 외상 수술 가능한 곳으로! 너는 강운 병원 외상 센터 교수들 전부 불러와! 당장!”

수안은 경호원들과 배영성이 소리치는 말을 들으며 정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 * *

[긴급속보. 강운 그룹 회장 강수안. 총격으로 중태!]

[강운 그룹 강수안 회장 중태.]

[강수안 회장. 괴한에 피격! 긴급 수술 중.]

육상 경기장은 많은 이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일반인들에게 무료로 공개했었다. 덕분에 수안이 총격당하는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이 많아 언론에 알려지지 않을 수 없었다.

주식 시장은 긴급 사이드카가 발동했고, 덕분에 주가의 폭락을 막을 수 있었다. 강운 그룹 회장이 그만큼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운 그룹 계열사 사장단이 수안이 응급 수술을 받는 병원으로 몰려왔다. 그들이 몰고 온 차로 병원 근처 도로가 꽉 막혀 버릴 정도였다.

수안의 가족도 총출동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포함해 아내와 자식들까지 모조리 병원으로 들어섰다. 여전히 목소리에 기운이 넘치는 강운모는 아는 얼굴을 찾아냈다.

“배 실장!”

“예! 회장님.”

배영성의 운동복은 참혹했던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피가 덕지덕지 묻은 운동복을 갈아입을 시간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당장 가서 강운 병원 전문의 다 데려와. 수안이 살려내!”

“벌써 데려와서 수술실로 들여보냈습니다. 박 교수와 흉부외과 전문의를 포함해 외상 센터 전문의들 전부 이번 수술에 투입되었습니다.”

“박 교수가 뭐래?”

“수술 전에 말하기로…. 확신은 못 한다고 합니다.”

“돌팔이! 우리 수안이가 그럴 리가 없어! 못 살리면 가만 안 둔다고 해!”

“예. 예. 저도 그렇게 믿습니다. 강 회장님은 이대로 가실 분이 아닙니다. 이겨내실 겁니다.”

“배 회장님.”

아현이다.

“…예. 사모님.”

“괜찮겠죠? 우리 그이 괜찮겠죠?”

“…회장님은 흉부에 총탄을 맞았습니다. 제가 막았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허흑.”

참고 참아왔지만, 더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사랑하는 남편이 가슴에 총탄을 맞았다고 생각하니, 쏟아져 내리는 눈물을 막을 수가 없었다.

“애미야. 괜찮다. 우리 수안이 강한 아이야. 절대로 이대로 가지 않는다. 믿어라. 네 남편을 믿고 일어나.”

“흐흑. 예. 어머님.”

자식이 총에 맞아 쓰러졌다고 하니 어미의 억장도 무너질 것이다. 하지만 다른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약한 모습을 보여 줄 수 없었다. 지금은 굳게 믿고 아들을 기다리는 방법이 최선이었다.

“너희들도 마찬가지다. 너희 아버지는 한 번도…. 단 한 번도 실망을 주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럴 게다. 그러니…. 애비를 믿고….”

손주들의 눈엔 차마 흘리지 못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는데, 여기다 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회장님. 큰 사모님.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비서실 직원들이 수안의 가족을 한쪽으로 안내했다. 수술실 복도에는 너무 많은 회사 직원들이 모여 있었다.

“…여보. 애들 챙겨서 들어갑시다.”

“…….”

큰소리치던 남편의 상태도 자신과 다르지 않았다. 사랑해 마지않았던 첫째 아들의 비보였다.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 * *

-삐이이이이.

이명이 들린다 싶었는데, 눈을 뜨니 전혀 알 수 없는 회색의 공간이었다.

‘…여긴 뭐지?’

무엇보다 방금 가슴에 총을 맞았는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얼른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만지려고 했지만, 흐릿한 자신의 손은 아무것도 만질 수 없었다.

‘……!!’

수안은 자신이 죽었음을 깨달았다. 자신은 소중한 육체를 잃고 만 것이다.

‘이렇게 끝이라니….’

가족을 위해 살았고, 가족과 함께해 행복했던 삶이다. 이제 감염병만 지나가면,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더 행복하게 잘 살 자신이 있었다.

수안이 삶에 대한 미련으로 깊이 상심하고 있을 때, 성스러운 빛이 나타났다.

[…….]

수안은 빛이 전하는 의미를 저절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였기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다.

수안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머리를 박았다.

감히 인사를 건넬 수도 없을 만큼의 거대한 존재감이었다.

[…….]

‘저의 과거 말씀이십니까?’

[…….]

‘신께서 보시고 판단하시면 저는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신.

수안은 자신 앞에 존재하는 빛을 신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

이후 수안의 생애가 빠르게 지나가기 시작했다. 어려서 머리에 두각을 드러낸 일과 여러 가지 재능을 선보인 일들이 흘러갔고, 할아버지 할머니를 포함한 대가족이 행복했던 한때도 지나갔다.

그리고 배경이 검게 변하며 삼풍 그룹 회장을 살해하는 장면으로 넘어갔다.

[……!]

‘…제가 죄인입니다. 제가 죽였습니다. 다른 이들은 저의 명령을 따랐을 뿐입니다. 그들은 죄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살아남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밝게 빛나고 있었다.

[…….]

‘…사람을 살리고 싶었습니다. 이유는 그뿐입니다.’

이후 다시 사람을 죽인 일들이 지나갔지만, 신은 아까처럼 화를 내지 않았다. 죽은 사람의 검은 기운보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더 밝게 빛나며 존재감을 자랑했기 때문이다. 삼풍 백화점의 사전 영업 정지로 죽지 않은 사람들과 교량의 붕괴가 발생하지 않아 생을 영위하는 사람들의 빛이었고, 또 그로 인해 가족을 잃지 않게 된 주변인들의 빛까지 계속해서 더해졌다.

수안의 생애가 계속 흘러갈수록 빛은 점점 더 밝아졌다.

수안의 지시를 받은 장호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살리고 있었다. 빛은 하나, 둘이 생기기도 했지만, 어떤 일은 한꺼번에 많은 빛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리고 최근의 생애에 이르러서는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빛이 강력해졌다. 너무 많은 사람을 살렸기 때문이다. 백신은 전 세계로 공급되고 있었고, 지금도 죽음의 문턱을 넘어갔을 사람들이 생을 이어 가고 있었다.

[…….]

‘…돌아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신은 주변을 보라고 했고 수안은 고개를 들어 빛으로 가득한 주변을 볼 수 있었다. 이제 어둠은 흔적도 남지 않았다.

[…….]

‘……!’

그리고 큰 빛에서 작은 빛이 떨어져 나와 수안의 이마에 닿았을 때 수안은 다시 정신을 잃어버렸다.

* * *

-삐이이이이이. 삐익. 삐익. 삐익.

“심장 박동 돌아왔습니다!”

수안은 떠지지 않는 눈을 힘겹게 들어 주변을 살폈다. 녹색 가운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가 보였다. 자신이 처음 어머니의 몸 밖으로 나와 본 풍경과 비슷했다.

‘…설마 다시 아기부터 시작하는 건 아니겠지.’

수안은 그런 생각을 끝으로 다시 눈을 감았다.

* * *

수술실의 전등은 2시간이 훌쩍 지나서야 꺼졌고, 박채환 교수는 땀에 흠뻑 젖어 수술실을 나섰다. 그리고 부리부리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강운모 명예 회장과 마주쳤다.

“수안이는!!”

“수술 중에 어레스트…. 그러니까 심정지가 오기도 했지만, 수술은 성공입니다. 회장님 품속의 휴대 전화가 총탄을 막아 줘서 충격을 완화했습니다. 덕분에 심장에 충격만 줬고 총알이 멈췄습니다. 마취가 풀리면 대화도 가능할 겁니다.”

“아아!”

가족들이 안도하는 가운데 강운모의 말이 이어졌다.

“박 교수는 앞으로 강운 병원 맡아.”

“……!!”

수술 한 번으로 강운 병원 원장 자리를 약속받았다.

“정말 수고 많았어.”

“감사합니다! 회장님.”

* * *

수안은 조용한 병실에서 눈을 뜨고 하얀 천장을 쳐다봤다.

‘…….’

분명 중요한 일을 겪은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았다. 새하얀 천장과 밝은 형광등이 기억 속 무언가를 끄집어내려 했지만, 주변 상황이 도와주질 않았다.

“여, 여보.”

“수안아!”

수안은 아내와 아버지가 옆에 있었다는 것을 깨달으며 방금 무언가를 생각해 내려 했다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아. 끄윽. 읍.”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지독한 흉통에 저절로 입이 다물어졌다.

“아파요? 의사 오라고 할까요?”

“묻긴 뭘 물어? 당장 오라고 해!”

그리고 조용히 수안의 손을 잡는 손길이 있었다.

“흐흑. 아들. 내 아들.”

수안이 피격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아들이 수술 중인 병원에 도착해서도, 의사에게 수술이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어머니는 울지 않았다. 슬픔에 빠지고 분노에 가득했던 가족들 가운데서 단단하게 중심을 잡았던 어머니는 아들이 눈을 뜨고서야 눈물을 보였다.

어머니는 눈물샘이 열린 것처럼 줄줄 눈물을 쏟아 내고 있었다.

“꺼흑. 다행이야. 우리 아들. 어어엉.”

수안은 어머니가 잡은 손을 빼서 어머니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죄, 죄송. 죄송합니다.”

“어어엉. 어엉. 어어어엉.”

어머니는 몸 안의 수분을 다 쏟아 낼 것처럼 계속 눈물을 흘리며 감정을 표현하셨다.

보다 못한 아버지가 어머니를 달래줄 정도였다.

그리고 다음은 어머니 덕분에 소외되었던 사람들 차례였다. 수안은 아내와 아이들을 맞이했다.

‘내 예쁜 자식들…. 사랑하는 내 새끼들.’

오래 못 본 것도 아닌데,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가웠다. 제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첫째 정원이, 연예계 활동을 시작한 둘째 나현이, 고등학교 1학년이 된 막내 시원이까지 왜 이렇게 반가운지 모를 일이다.

“…보고 …싶었어. 여보.”

수안은 왜 아내에게 그리운 마음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눈앞에 보고 있는데도 자꾸만 그리워지고 보고 싶었다.

“당신 수술 중에 심정지가 왔었다고 해요.”

“…나 정말 …죽다 살았구나.”

아내가 그동안의 일을 말하는 동안 수안은 불편한 몸에 조금씩 적응해 나갔다. 아직 고통이 있었지만, 의사가 들어와서 진통제를 넣어준 덕분에 조금 더 말하기 편해졌다.

“당신 그렇게 됐다는 소식 듣고 눈앞이 정말 캄캄했어요.”

“걱정시켜서 미안해. 아버지 어머니도 많이 놀라셨겠어. 두 분 청심환이라도 드시게 해. 당신도 먹고.”

“우리 걱정은 말아요. 당신은 온전히 회복만 하면 돼요.”

“그래. 알았어.”

아내와 인사했으니 이제 자식들 차례였다.

“정원이는 이리 와 봐.”

“예. 아버지.”

수안은 손을 뻗어 아들의 손을 잡았다.

“…아빠 괜찮다. 걱정 많았지?”

“큭. 네. 아버지가 잘못될까 봐…. 너무 무서웠습니다.”

동생들이 보고 있어서 차마 무서운 티도 내지 못했다.

“그래도 네가 무게를 잡고 있어서 동생들은 든든했을 거야. 수고 많았다.”

다음은 나현이다.

“흐흑. 아빠아.”

“괜찮다. 아빠 괜찮아.”

수안은 차마 품에 안기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딸의 팔을 잡아끌어 품에 안았다.

“허으응. 아빠아아. 아빠아. 아아앙.”

나현이가 품에서 우는 동안 막내도 불렀다.

“시원이도 이리 와라.”

“…….”

“우리 시원이는 엄마 잘 지켜 줬지?”

“계속 엄마 옆에 있었어요.”

“아빠 없어도 너희가 엄마를 잘 지켜 줘야 해.”

“…저보다는 아빠가 있어야 해요.”

“앞으론 이런 일 없을 거다. 같은 일을 또 당할 수야 없지.”

마지막으로 수안은 배영성을 부르려고 했다.

“여보. 밖에 배 회장 있나?”

“회사 일은 꿈도 꾸지 말아요.”

“…….”

“전할 말이 있다면 내가 전해 줄게요.”

“아니. 그래도 배 회장이 나 살리느라 고생했을 거잖아. 감사 인사 정도는….”

“배 회장님께 감사 인사는 충분히 전했어요. 그분도 총격 사건 바로 옆에 있었잖아요. 가족들이 걱정할까 봐 댁으로 가시라고 했어요.”

“…잘했네.”

“이번 일로 당신이 내 삶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깨달았어요. 나 이제 당신 곁에 있을래요.”

“당신이 옆에 있는 걸 누가 뭐라고 하겠어. 그런데 밖에 비서진 누구 없어?”

“일은 안 된다고요.”

“오늘 일 때문에 회사 주가가 폭락했을걸? 빨리 대응해야 해.”

“아.”

“비서실 누구든 있으면 좀 들어오라고 해.”

“알았어요.”

수안이 수술에 성공했고, 회복 중이라는 소식은 비서실에 의해 빠르게 언론사로 전달되었다.

[강수안 회장 고비 넘겨. 성공적으로 수술 마치고 회복 중.]

[코스피, 코스닥 극적 반등.]

수안은 몸이 조금 나아지고 나서 강운 병원으로 옮겨갔다. 수안이 입원해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는지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수안은 빠르게 몸을 회복하고 있었지만, 절대 안정은 필수였다. 가족들의 염려 때문에라도 퇴원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덕분에 강운 병원 전용 병실에서 매일같이 신문을 보며 외부 소식을 접하고 있었다.

[강수안 회장을 피격한 괴한의 정체는?]

[강남 경찰서. 해당 총기 사건 수사 돌입. 이번 불법 총기 사건과 관련된 모든 범죄자를 관용 없이 처리할 것.]

[전 대통령 일가의 경호. 이대로 충분한가.]

[불법 총기 일제 단속. 경찰 대대적인 단속 나서.]

[강수안 회장이 회생할 수 있었던 이유? 바로 K폰!]

[K폰이 강수안 회장을 살렸다.]

“홍보는 제대로 했네.”

“…….”

배영성은 수안 옆 침상 근처에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배 회장은 언제까지 그렇게 죽상을 하고 있을 거야?”

“…제 자신이 용서되질 않습니다.”

“녀석은 처음부터 날 노리고 기다리고 있었어. 배 회장이 날 막아섰으면 배 회장도 죽고 나도 죽었을 거야.”

“…회장님이 오히려 절 밀쳐 내셨습니다. 회장님 덕분에 목숨을 구했습니다.”

“자네가 내 목숨을 살렸지. 자네가 살아 있었던 덕분에 내 응급 처치가 빨랐잖아. 내가 이래서 의사 출신을 좋아한다니까. ”

“…….”

그래도 배영성의 얼굴은 풀리지 않았다.

수안은 시간이 필요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수안을 지키던 배영성에게 이번 총격 사건은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괴한이 난입한 순간에 오히려 수안에 의해 구함을 받았으니, 그 마음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변태영은 어떻게 된 거야? 마지막에 우리 경호원들 총에 쓰러지는 것까지 기억나.”

“거기까지도 기억하십니까?”

“배 회장이 경호실 애들 닦달하던 말도 기억나는데? 주원이가 아빠 닮아서 그렇게 랩을 잘하나 봐.”

“…녀석은 그 자리에서 사망했습니다. 회장님과 같은 운은 없었습니다.”

“휴우. 결국 그렇게 갔구나… 그럼 조 양 집안은 지금 어떻게 됐어?”

“지난 과자 봉지 회항 사건 이후로 항공사 이미지가 크게 실추되었는데, 감염병으로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게다가 조 회장 사망 후 후계자 문제로 내분이 끊이질 않습니다.”

“그럼 죽은 변 형의 소원이라도 들어줘야겠네.”

“…네?”

변태영은 아내를 향해 지독한 원망을 품고 있었다.

예전에 비서실에서 파악한 정보였다.

신라 일보에 비수를 날리고 마지막 처분까지 손을 댔으니, 그들이 물리적 보복을 선택할 수 있다고 추측했기 때문이다. 수안이 변태영과 그 가족들을 경계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다만 수년이 지나도록 움직임이 없어 경계 대상에서 지워지고 말았다.

어쨌든, 당시 파악한 정보에 따르면 이혼 전에도 후에도 변태영의 가장 큰 미움을 받던 사람은 아내 조지수였다. 변태영의 성격도 성격이지만, 조지수의 성격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둘은 시시때때로 폭력을 동반한 부부 싸움을 벌였다.

그래도 외부의 시선 때문에 한동안 참고 살았지만, 신라 일보가 뿌리부터 흔들리며 곧장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이후에도 변태영은 수시로 조지수를 만나 싸움을 이어 갔다. 그리 좋아하지도 않는 자식 때문이었다. 하지만 신라 일보가 아예 망해 버리고 나서는 양육권 분쟁도 포기하고 조용히 지내왔다. 덕분에 비서실에서도 경계를 풀어 버린 것이다.

변태영의 불행에 수안도 상당한 지분을 갖고 있었기에 총을 맞고도 원망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변태영의 오랜 바람을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고려 항공사 인수하고 BE로 날려.”

“누가 들으면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리라는 줄 알겠습니다.”

“비슷하지. 종이비행기나 그냥 비행기나 같은 비행기잖아.”

배영성은 수안의 웃기지도 않는 말을 모른 척 넘어가며 말했다.

“안 그래도 이번에 회장님 총격 사건으로 고려 항공사 주가가 곤두박질치고 있습니다.”

“응? 내가 총 맞은 거랑 거기랑 무슨 상관이야?”

“언론엔 나오지 않았지만, 증권가와 기업가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회장님이 누구의 손에 이렇게 되셨는지 말입니다.”

“그래서 변태영의 전 와이프인 조지수의 항공사도 손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변태영과 깊이 관련이 있는 항공사를 강운 그룹이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추측입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결과는 회장님 입으로 말씀하신 내용과 같습니다.”

“그럼 판 벌여 줬으니 제대로 날뛰어 줘야지. 기업 분산해서 지분 취득 시작해. 인수한 다음에 고이 접어서 날려주겠어.”

이후 수안은 이것저것 지시하며 배영성이 해야 할 일들을 늘어놨다.

“배 회장은 괜히 딴생각하지 말고 일이나 해. 나 회사도 못 가니까 배 회장이 다 해야 할걸?”

수안은 일부러 배영성의 얼굴을 보지 않고 말했다.

“…중요한 결재는 꼭 가져오겠습니다. 회장님이 봐주시지 않으면 안심이 안 됩니다.”

배영성도 자신이 모셔온 상사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미안한데…. 배 회장은 조오기 서 있는 우리 마누라 허락부터 받아야 하지 않을까?”

아현은 배영성이 눈치채기도 전에 문을 열고 들어와 있었다. 수안이 판을 벌인다고 말할 때부터였다.

“불가.”

단호한 아현의 말에 배영성은 얼른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제.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사모님.”

“결재 서류 보이면 바로 파쇄기로 갈아 버릴 테니까 그런 줄 알아요.”

“…옙.”

“문자도 금지. 전화도 금지.”

“…그럼 메일은.”

“당연히 그것도 금지죠! 지금 장난 나랑 해요?”

“풉. 갑자기 웃기기 있음?”

“흐흣. 당신 심심할까 봐 그랬죠. 배 회장님은 적당히 챙겨서 가져오세요. 너무 많이는 말고요.”

방금까지 굳은 얼굴로 화를 내던 여자는 사라지고 환한 미소의 친절한 여인이 나타났다.

“아…. 깜빡 속았습니다.”

“호호. 저 연기자예요. 이정도야 뭐.”

남편을 살려준 배영성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아현이 배영성을 함부로 대할 리 없었다.

“항상 도움 주셔서 감사해요. 배 회장님.”

배영성은 말없이 고개를 깊이 숙일 뿐이다.

‘저는 죄인입니다.’

배영성의 죄책감은 한동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 *

수안은 아내가 자리를 비운 틈에 조용히 병실을 나와 병원 옥상에 올랐다.

“…….”

총을 맞고 난 다음부터 세상을 보는 시선이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게다가 이제 50이 됐지.”

병원에서 맞이한 새해였다.

그가 살아 보지 못한 2021년이 시작된 것이다. 감염병은 치료제까지 개발을 끝냈으니 전염병 사태에 관한 걱정을 덜었지만, 앞으로가 문제였다.

이제 수안이 아는 미래 정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막막한 미래에 수안의 상념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나도 대통령이나 해 볼까?’

예전엔 죽도록 하기 싫었던 대선 출마가 지금은 신선한 자극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어차피 앞으로 역사는 알지도 못하잖아? 무슨 수로 정책을 만들지?’

미래를 모른다는 것은 상상 이상의 답답함을 안겨 줬다. 미래도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무슨 일을 하겠나 싶은 마음이 먼저 들었다.

“하! 그럼 전엔 어떻게 살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데?”

정금용으로 살던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의 조건은 차고 넘치는 조건이었다.

지금 밖에서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저들 중에 미래를 확신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미래를 몰라도 사람들은 잘만 살아간다.

“하자. 해. 나도 해 보자.”

수안은 대선에 출마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부자(父子) 대통령? 미국만 나오라는 법 있어?”

부자(父子) 대통령도 말이 되고 부자(富者) 대통령도 말이 되는 수안의 대선 출사표는 강운 병원 옥상이 시작이었다.

“한참 찾았잖아욧!”

“미, 미안. 답답해서 잠깐 바람 좀 쐬려고.”

그때 작은 눈송이가 나풀나풀 떨어져 아현의 볼에 닿았다.

“어? 눈 온다.”

“응?”

고개를 들자 하늘 가득 눈송이가 내려오고 있었다.

“예쁘다. 함박눈이에요.”

수안은 다시 고개를 내려 눈송이를 바라보는 아내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당신이 더 예뻐. 당신은 어쩜 이렇게 변하질 않니?”

“…당신도 여전히 멋져요.”

수안은 이렇게 아내와 함께할 수 있다는 것도 하늘의 축복처럼 느껴졌다.

“당신 은퇴한 거 후회 안 해?”

아현이 수안 옆에 있겠다고 한 것은 연예계를 은퇴하고 오롯이 집중하겠다는 뜻이었다. 아현은 최근 보도 자료를 통해 연예계 은퇴를 공식화했다.

“절대 후회 안 해요.”

“음…. 그럼 영부인이 되는 건 어떻게 생각해?”

“네, 네? 영부인이요?”

“나 대선에 나가 보려고.”

알 수 없는 미래는 이제 수안이 직접 개척해야 했다.

“호호. 나쁘지 않네요. 한 집안에 대통령이 둘이 나와도 좋겠죠.”

그 시간 속에도 가족은 언제나 함께할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사람을 살리고 또 행복하게 만들 것이다.

[…….]

수안은 바람이 귀를 스쳐 지나가며 울린 소리에 깜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왜 그래요?”

“아, 아냐. 누가 날 불렀나 싶어서.”

바람 소리가 마치 사람의 말소리처럼 들렸다.

‘분명 축복 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여기 누가 있다고 그래요. 당신 이러다 감기 걸려요. 얼른 내려가요.”

“어. 당신도 얼른 내려가자.”

수안의 눈에 보이진 않았지만, 빛이 수안의 몸으로 가득 모여들고 있었다.

[너의 삶을 응원하노라. 나의 축복을 받아 세상에 사랑을 전하거라.]

새로운 시작에 어울리는 새로운 축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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