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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 행사 (300/304)

자선 행사

‘벌써 몇 번째 실패인지….’

최근 14번째로 보낸 샘플도 인간 감염이 불가능한 바이러스라고 전해 들었다. 분명 기능획득의 연구가 진행 중이었는데, 왜 기능이 활성화되지 않았는지 이상한 일이다.

‘…국산이 다 그렇지 뭐. 뭐 하나 제대로 만드는 게 없어?’

보통 때라면 하지 않을 생각까지도 하게 된다. 나중에 일이 끝나면 탈중국을 고려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10년을 예상했지만, 그 시간을 기다리기가 쉽지 않았다. 곁에 가족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아내와 딸은 해외로 출국했고, 이제 확실한 샘플만 전달되면 자신도 조용히 사라질 것이다.

‘의제라도 만나 대화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가끔 연구소 일을 끝내고 숙소로 가는 길에 의제의 뒷모습을 보곤 한다. 그렇다고 가서 인사할 수는 없었다. 여기서만큼은 서로 모르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길을 가다 마주쳐도 모른 척 지나친다. 잠시 서로 눈을 마주치면서 서로의 존재감을 인식하는 것이 전부였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서로 아는 척을 할 수 없으니 더욱 안타깝다.

‘이따 숙소에 가면 혼자 술이라도 마셔야겠다. 의제도 여기 어디선가 혼자 그렇게 술잔을 기울겠지.’

지우창 박사는 항주 연구소에서 지내는 나날에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일하는 동료들은 하나같이 무례하고 이기적이었으며, 스정리 박사는 처음 안심하며 보여 준 태도가 연기였던 모양인지, 여전히 자신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럴 만하지.’

연구에 핵심적인 도움을 주면서도 그만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지우창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연구소에 붙어 있었다. 이번 연구의 성과를 노린다는 의심을 받아도 할 말이 없었다.

“박사님. 아직 안 가셨어요?”

“아. 스정리 박사님. 이제 들어가십니까? 저는 정리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자식 유학 보냈으면 열심히 벌어야지 어쩌겠어요. 그럼 지우창 박사님은 오늘 또 늦게 가시나요?”

“…기다리는 가족도 없으니 실험실을 정리하다가 가겠습니다.”

“그래 주면 고맙죠. 부탁해요.”

그래도 어제 했던 말로 인해서 오늘은 조금 나았다.

지우창은 딸을 해외로 유학 보내며 돈을 벌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신세 한탄을 늘어놨었다. 스정리는 지우창의 말에 오히려 기분이 좋은 듯이 눈을 반짝였었다.

‘따로 빼 둔 15차 샘플은 잘 전달했고….’

오늘 혼자 남은 이유는 새로운 샘플을 빼돌리려는 것이 아니다. 이미 최근 만들어진 샘플을 강운 생명 과학의 배달부에게 넘겼다.

비정상적인 오늘의 야근은 야근을 일상적인 패턴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앞으로 일이 어찌 될지 알 수 없으니까.’

이것도 강운에서 보낸 직원이 알려 줬기에 진행하는 작업이었다.

그래야 혹시라도 갑작스럽게 샘플을 확보해야 할 때 늦은 시간까지 혼자 남아 있어도 의심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지우창은 CCTV가 지켜보는 가운데 연구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부 테이블에 실험실 집기가 너저분하게 놓여 있는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다가갔다.

‘그래도 그렇지 바이러스를 연구한다는 사람들이….’

연구소에는 위험한 바이러스를 다루는 것이 아닌 위험도 낮은 수준의 연구가 진행되는 연구실이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난잡한 모습으로 남겨둘 수 있었겠지만, 대학에서 항상 청결과 정돈을 강조하던 지우창은 꼴 보기 싫은 모습이었다.

“어휴. 생각들은 하고 사는지…. 얘들은 집 안 꼴도 이 모양이겠지?”

훗날을 위한 포석으로 시작한 일이지만, 지우창의 진심이 담긴다.

그 모습을 CCTV로 지켜보는 사람들도 지우창 박사의 생각에 동의하고 있었다.

“지우창 박사가 여기서 제일 낫네.”

“그래 봐야 우리 연구소 소장은 스정리 박사야. 저 사람은 그냥 도와주는 사람이니까.”

“그나저나 심심한데 뭐 없어? 오늘도 계속 여길 지켜야 하잖아.”

“크흐흐. 안 그래도 한 병 들고 왔지.”

한 직원의 품에서 나온 것은 독한 술이었다.

“오오. 역시 넌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아는구나.”

“뭐? 하하하.”

그들이 서로 술병을 옮겨가며 술을 마시는 동안 CCTV 모니터에는 여전히 툴툴거리며 연구실 테이블을 정리하는 지우창의 모습만 흘러나오고 있었다.

* * *

지우창 박사가 중국의 항주 연구소에서 분투하는 동안 MERS(메르스)는 중동을 넘어 세계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전 세계적 유행까지는 아니지만, 충분히 위협적인 바이러스였다.

미리부터 병원체를 확보해 연구하던 강운 생명 과학은 중동으로부터 메르스 백신을 수주받으며 그 이름을 세계에 알리고 있었다.

“감염자 숫자가 많지 않은데도 백신을 요청해?”

“일단 치사율이 대단합니다. 우리 강운 생명 과학 외에는 백신 연구가 지지부진한 상태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요청할 수밖에요.”

백신이 존재하는 메르스는 이제 염려할 것도 없었다. 세계 2위를 기록했던 한국의 메르스 감염자와 사망자 숫자도 역사에 등장하지 않을 것이다. 정부의 방역 조치가 일사천리로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질병관리본부는 조만간 질병관리청으로 승격하게 될 것이고, 실무자를 중심으로 관리체제가 구성될 것이다.

무엇보다 중동과 해외에서 입국하는 인물들에 대한 방역 관리가 벌써 시작되고 있었다. 단 한 사람도 방역망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관리하는데, 메르스가 한국에 퍼진다면 그건 누군가의 농간이라고 생각해야 했다.

“그래도 백신으로 돈을 벌어온다니 다행이네.”

“지금까지 들어간 비용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습니다.”

사스부터 메르스까지 꾸준히 백신 개발에 자금을 투입했기에 이뤄낸 성과였다. 지금까지 들어간 자금을 생각하면 이번에 받은 백신 수주는 새 발의 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중에 유행할 감염병을 생각하면 지금부터 이름을 알려 두는 편이 좋을 거야.”

이름도 없는 백신 회사가 갑자기 감염병 19 백신을 개발했다고 하면 의구심부터 들 것이다. 유사한 바이러스에 백신을 개발한 이력이 있는 회사라면 신뢰도가 달라진다.

“아직 완전한 병원체도 없는 상태라 뭐라 예측하기가 어렵습니다.”

“메르스도 훌륭하게 성공했잖아. 다음 감염병도 어차피 같은 코로나 바이러스 기반이야. 분명 해낼 수 있어.”

해내야만 한다. 그래야 수많은 인류를 구할 수 있고, 더 나아가 가족을 지킬 수 있었다.

“이번 샘플 분석 결과는 뭐래?”

“역시 인간 감염 바이러스는 아닙니다. 하지만….”

“왜. 뭔데?”

“더 독해졌습니다. 인간에 감염되는 순간 지옥이 펼쳐질 거라고 하더군요.”

“…….”

“연구원들은 특히 치명력이 대단할 거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배양을 통해 변이를 일으키고 있는데, 이 부분도 심각합니다.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변이가 활발하다고 합니다.”

“…얼마 안 남은 모양이야. 항주 연구소에서도 메르스를 입수했다고 했지?”

“예. 바이러스를 무기화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연구소에 해외 연구진도 심심치 않게 모습을 보인다고 합니다.”

“…인간 전염 바이러스만 확보하면 중국인 박사는 빠지라고 해. 괜히 우리를 도와주는 사람까지 감염될 수 있으니까.”

“예. 회장님.”

“아. 김 회장이 지원하는 그 사람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야?”

“테드는 여전합니다. 돈 밝히고 인기를 즐기고…. 다루기 쉬운 사람이죠.”

수안이 물어보고 배영성이 대답한 테드라는 인물은 에티오피아의 공직자였다.

몇 년 전부터 강운 그룹 자본이 에티오피아에 뿌려졌고, 특히 보건 인프라에 관련한 자금과 서아프리카에 유행하던 에볼라 바이러스를 퇴치하는 자금이 주로 집행되었다.

이 자금을 집행한 이유는 에티오피아의 외무장관이었던 [테워드로스 아 드하놈 거브러이여수스]라는 인물을 끌어들이기 위함이었다.

그는 돈을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적당한 뒷돈을 찔러 주었더니 간이라도 빼준다는 태도로 강운을 대하는 인물이다.

외부에 자신을 포장하는 데 능숙했기에 독재의 그늘에서 호의호식하면서도 명성을 얻고 있었다. 여기에 강운의 막대한 자금이 더해져 그의 미래를 밝게 비춰 주고 있다.

“저희가 왜 돈을 주는 줄도 모르면서 잘만 받아먹고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 접근하기 전에 저희가 먼저 손을 쓴 덕분에 테드는 한국인이라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그 정도로 돈을 좋아한다는 의미였다. 배영성의 말투 속에는 은은한 경멸이 깔려있었다.

“차기 WHO 총장이 될 사람이야. 마음에 안 들어도 어쩔 수 없어.”

“그따위 인물이 WHO 총장이 된다는 것부터가 마음에 안 들지만, 어쩔 수 없죠.”

배영성은 수안에게 보고할 자료를 들추다가 전략비서실 임 이사가 올린 보고서에 눈길을 줬다.

“다음은 교본 그룹 장남의 동향 보고입니다.”

“…언제 미국으로 간다고 해?”

전에 주환과 제시카가 신 회장에게 허락을 받았다는 내용은 보고 받았다. 수용이와 제수씨가 따로 알려주기도 했기에 앞으로의 계획도 들었다.

“신주환 씨는 BE 인베스트먼트에서 잠시 근무하다가 교본 생명 자산 운용으로 넘어갈 계획입니다. 교본은 새로 건물까지 매입하고 본격적으로 미국 지사를 운용한다고 합니다. 다음 주부터 BE 인베스트먼트 LA지점에서 근무하기로 했습니다.”

수용과 제수씨의 부탁을 들어준 결과였다. 우선 BE 인베스트먼트에서 일하며 적응 기간을 거치고 이후 교본의 자산 운용사를 이끌어갈 것이다.

“당장 결혼하긴 힘들겠지?”

“…할리우드는 국내와 조금 다르지 않을까요? 결혼과 이혼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도 잘 살았으면 좋겠다 싶네. 그럼 사돈댁은 넘어가고. 다음.”

사돈댁까지 신경 쓰고 살다간 제 명에 못 산다. 적당한 수준에서 발을 빼도 알아서 잘 살 사람들이었다.

“…음.”

막힘없이 보고하던 배영성은 마지막 보고에서 머뭇거렸다.

“꼭 일 터지면 그런 얼굴이더라. 뭔데?”

“볼트와 관련된 일입니다.”

“엉? 볼트? 갑자기 걔는 왜?”

“다음 올림픽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전에 스승과 겨루고 싶다고 합니다.”

수안이 세계선수권 대회에 나오라는 말로 들렸다.

“…뭔 헛소리야. 겨루긴 뭘 겨뤄?”

“전 세계 희귀병 어린이들을 위한 기금 마련 이벤트를 열자고 했습니다. 회장님께서 볼트와 함께 달리시면 상당한 기금이 모일 겁니다.”

배영성은 수안이 육상으로 다시 언론에 등장하길 원하지 않는 걸 알면서도 긍정적으로 포장하고 있었다.

“…혹시 볼트 녀석이 벌써 언론에 터트렸어?”

“예. 볼트가 스승은 이런 좋은 일을 거절하지 않을 거라며 인터뷰했습니다. 어제저녁 일이라 오늘 뉴스에도 나올 겁니다.”

“…썩을 놈. 다 늙은 스승을 귀찮게 하네.”

“그럼 볼트의 에이전트와 일정을 조율해 보겠습니다.”

“종목은?”

“간단하게 100m와 200m입니다.”

“에효. 이제 뼈마디가 삐걱거리는데….”

“그래놓고 이기실 거잖습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배영성은 알고 있다. 나이 40이 넘었지만, 수안의 달리기 속도는 현역 선수와 다르지 않았다.

“내가 고작 볼트한테 지겠어?”

현 육상 챔피언인 볼트를 여전히 눈 아래로 보는 수안이다.

“그럼 연하 선수도 부르겠습니다.”

“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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