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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걸음 (295/304)

첫걸음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은 멀리서 인사드립니다. 여기가 어디냐면요~ 바로 태평양 바다 위랍니다. 잠시 바다를 보시면서 기분 전환하실까요? 우아! 정말 넓어요. 바람이 느껴지세요?”

나현이는 삼각대에 휴대 전화를 고정해 놓고 영상을 촬영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안과 아현은 썬 베드에 누워 스치는 바람을 느끼며 일광욕하고 있었다.

거대하고 화려한 요트는 최소한의 인원만을 태우고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중이다. 요트 근처로 돌고래가 다가와 유영하자, 나현은 또 호들갑을 떨며 영상을 찍었다.

수안은 멀리서 손짓과 발짓을 해가며 혼자 떠드는 딸의 뒷모습을 보며 아현에게 물었다.

“여보. 쟤 뭐 하는 거야?”

“마이튜브에 올리겠다고 영상을 만든다네요. 이따 우리 인터뷰도 하겠대요.”

“…마이튜브?”

마이튜브를 몰라서 물어보는 것이 아니다. 미국에서 시작한 마이튜브였지만, BE 인베스트먼트의 유니콘 투자기업으로 선정되어 60%의 지분을 확보한 상태였다. 기존 창업자의 경영권을 보장했어도 소유가 누구냐를 묻는다면 BE 인베스트먼트라고 답해야 하는 회사였다. 그러니까 수안의 회사나 다름없는 마이튜브에 수안의 딸이 래시가드를 입고 영상을 올리겠다는 뜻이다. 비키니를 입겠다는 걸 래시가드로 타협했는데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년에 고등학교 들어가면 공부하느라 못한다고 봐 달래요.”

“…그런 소리는 쟤 중학교 들어갈 때도 들었던 것 같은데?”

“…그렇긴 하죠. 쟤를 무슨 수로 말려요.”

엄마가 연예인이 아니던가.

아현의 딸 나현은 엄마를 무척 많이 닮았고,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일에 항상 열심이다.

“주원이가 데뷔한 다음부터 부쩍 더 심해졌어요.”

“아.”

배영성의 아들 주원은 예상대로 BTC 멤버로 들어가 작년에 가수로 데뷔했다. 평소 배영성의 가족과 만나는 일이 많았으니, 아이들이 서로 친밀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아현은 수안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현이는 자기도 주원이처럼 정체를 감추고 데뷔하고 싶어 하네요.”

“…….”

주원이는 처음부터 아버지의 존재를 숨기고 오디션에 참가했다고 들었다. 주원이 더블 엔터의 모회사 회장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팀 결성 후에야 수혁의 귀에 들어갔다.

주원이가 스스로 계약을 할 수 있는 성인이라 가능했던 일이다.

수혁은 자신이 기획한 아이돌 그룹에 배영성의 아들이 있다는 소식에 기함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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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너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죄송합니다. 사장님.”

“…배 회장님은 아시냐? 설마 집 나와서 이리로 온 건 아니지?”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저를 가수로 키우셨습니다. 집안 반대는 없었습니다.”

“내가 전화해서 확인해도 되겠네?”

“물론이죠.”

이후 수혁은 배영성에게 연락해 사실 관계를 파악했다. 아무리 주원이가 말했어도 사실과 다르다면 적당히 끝날 일이 아니었다.

-방 사장. 미안하게 됐어.

“아, 아닙니다. 회장님.”

사적으로 수안의 친구였지만, 그건 말 그대로 사적인 관계에서의 일이다. 또한 더블 엔터의 사장이 된 다음이라 모회사 회장인 배영성은 수혁에게 하늘 같은 존재였다.

-주원이는 나랑 관련 없다고 생각하고 잘 키워 줘. 응?

“옙! 회장님.”

물론 함부로 공표할 수 없는 일이라 여전히 외부엔 알려지지 않았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을 배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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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나현이가 지금까지 코코아 스토리에 올린 건 뭔데? 그리고 나현이랑 우리가 사진 찍힌 게 몇 번이고 기사 난 게 몇 번인데 숨겨? 어제만 같아도 오바마 대통령과 찍은 사진이 벌써 한국 인터넷 뉴스에 올라갔을걸? 어림도 없는 소리야.”

나현이 누구의 딸인지는 이미 많은 사람이 알고 있었다. 숨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배영성의 아들 주원과는 결이 달랐다.

“그럼 연예인은 안 된다는 말이죠?”

“연예인이 되지 말라 소리가 아니야. 셀럽으로 살면서 사업도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오히려 사업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 나도 처음엔 스포츠 스타였잖아.”

해외에도 비슷한 존재가 있었다. 물론 그녀에게 나쁜 소문이 많이 따라다니지만, 일찍부터 그녀만의 사업체를 경영하면서도 셀럽의 인생을 누리고 있었다.

강운 그룹 회장의 자식이 연예인에 데뷔한다고 하면 그 자체로 이슈다. 나현은 시작과 동시에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될 것이다.

“호호호. 나현이가 정말 좋아하겠다. 지금 불러서 알려 줄래요.”

“아냐. 그만둬. 일찍부터 헛바람 들지 않게 하자. 게다가 원래 말린다고 생각할 때 더 관심 가고 하고 싶은 법이야.”

“그것도 맞는 말이네요. 그래도 일이 잘 풀려서 좋네요.”

나현이가 자신과 같은 길을 가고 싶어 해서 얼마나 고민이 많았던가. 아현은 그동안 머리를 아프게 했던 고민이 사라져 한껏 썬 베드에서 기지개를 켰다.

“으자자자. 고민이 풀려서 상쾌해요.”

“일찍 얘기하지. 당신 혼자서 고민했어?”

“당신이 어디 보통 사람이에요?”

보통의 재벌가에선 연예인을 가족으로 맞이하는 것도 심사숙고할 일이다. 거기다 자식이 연예인을 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않는다. 하물며 강운 그룹에서 쉽게 허락할 거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난 자식들 하고 싶다는 거 막고 싶지 않아. 원하면 뭐든…. 물론 나쁜 거 말고 좋은 것만! 이라는 단서가 붙지만. 어쨌든 다 해 주고 싶어.”

본인이 부모님 없이 살아 본 기억이 있어서 그렇다. 부모가 된다면 자식의 앞길을 막는 부모가 되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부터 가져온 생각이다.

“다행히 우리 아들들은 어떻게든 강운 그룹 물려받으려고 노력하고 있네요.”

“그러게. 요즘 시원이가 공부에 부쩍 관심이더라.”

이제 겨우 초등학교에 다니는 막내아들이지만, 고등학교에 다니는 맏형을 경쟁자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정원이는 당신을 많이 닮았어요. 성격도 서글서글하고 동생들도 잘 챙기고 운동도 잘하잖아요. 시원이가 제 형을 보는 눈에 부러움과 동경심이 가득해요. 거기다 최근엔 질투심도 좀 들어간 것 같고요.”

“내가 가진 게 많아서 셋이 나눠 가져도 배가 터질걸?”

아직 나이가 젊어서 걱정이 크지 않았지만, 일각에선 벌써 수안의 재산이 어디로 옮겨갈지에 관심이 참 많았다. 아이들이 원하면 이라는 단서가 붙지만, 수안도 재산을 물려줄 생각은 있었다.

“푸흣. 그래도 나현이는 빼먹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나현이 빼먹으면 나 아버지한테 맞아 죽어.”

아들이라 더 주고 딸이라 덜 주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아버지에게 몰아서 받았어도 자신까지 그러라는 법은 없었다. 기업이 쪼개질 것이 걱정된다면, BE 인베스트먼트와 더블 스타 그룹과 강운 그룹을 각각 가져가면 되지 않겠는가.

“호호호. 맞네요. 아버님이 쟤를 너무 편애하죠.”

나현이는 여전히 돌고래가 선수에서 유영하는 모습을 촬영하고 있었다.

“살 다 타겠다. 이쪽으로 오라고 해.”

“네. 당신은 한숨 자요.”

“난 됐고. 나현이 수영장에서 수영이라도 하라고 해. 이따 밤에 푹 재우게.”

“…콜.”

부부의 눈빛은 예나 지금이나 뜨겁다. 아현은 여전히 20대라고 할 만큼 젊고 예쁜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고, 수안 또한 20대보다 더 팔팔한 신체 능력과 동안 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 * *

한국으로 돌아온 수안은 접견을 요청한 상대와 오랜만에 만나고 있었다.

“어이쿠. 정 회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현 자동차의 정영수 회장이다.

오랜만에 본다고 하지만 일 년에 최소 한두 번은 만나던 사이였다.

“그리 오래 지나진 않았죠. 얼마나 됐다고요.”

이제 수안의 나이도 있고 강운 그룹이 가진 위상도 있었기에 정 회장은 함부로 말을 놓지 않는다. 예전 수안이 20대였을 때처럼 대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가 대통령에 당선되시고 뜸하셨지 않습니까.”

“…괜히 잡소리가 나올까 그랬지요.”

수안의 아버지 강운모 대통령에게 뭔가 부탁을 하려 한다고 생각할까 봐 함부로 만나지도 못했다.

“오늘은 그런 잡소리도 감당할 마음이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흠흠. 우리끼리 섭섭하게 그러지 마시고….”

오늘은 아버지의 힘도 빌리고 싶다는 뜻이었다.

“하하하.”

대현 자동차는 그동안 강운의 K-버스에 탑승해 잘나갔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K-7을 비롯한 기화 차 K시리즈, 대운 자동차의 말리부 시리즈, 강운 자동차의 프라임스윙 등이 해외에서 큰 인기를 얻을 때 대현 또한 한국산 자동차라는 간판을 달고 해외 시장에서 높은 판매고 신장을 이뤄냈다는 뜻이다. 국내에서 강운과 경쟁하기 쉽지 않으니 해외 시장으로 눈을 돌린 결과였다.

최근 기사만 봐도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한국 차 위상 완전히 달라졌다. 미국서 없어서 못 파는 기화! 강운! 대운! 그리고 대현!]

[미국 차 수출로 돌파구를 마련하려 했지만, 일본과 한국에 치이며 힘 못써.]

[한국 차 미국 인기로 일부 중고차량은 웃돈 붙여 팔아.]

[따질 수 없는 가성비의 한국 차 일본 차도 따돌려.]

그리고 대현 자동차는 강운의 눈치를 봐가며 사업을 확장해 왔다. 샤롯 그룹의 여러 계열사가 매물로 등장했을 때도 수안의 허락을 받고 집어삼켰다. 오히려 수안이 바라는 바였다. 괜히 샤롯의 문제에 강운이 연루되었다는 의심을 피하고 싶었던 수안에겐 바라마지않는 일이었다.

“이번에 다시 대현을 통합하려고 합니다.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원래 역사대로라면 정영호 회장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그의 아내가 대현 건설을 맡았을 것이다. 또한 크게 부침을 겪고 나라의 힘으로 겨우 일어선 대현 건설을 대현 자동차가 인수했을 것이다. 지금은 정용호 회장이 번듯하게 살아 있기 때문인지 여태 버텨왔지만, 더는 재기가 힘들다는 평이었다.

“오오. 대현 자동차가 그만큼 성장했다는 뜻이겠지요? 축하드립니다. 회장님.”

대현 그룹에서 자동차 계열사만 분리해서 나왔던 정영수 회장은 이제 다시 대현 그룹 본사를 노릴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

“그래 봐야 다는 못 노리고 본사만 노리는 정도입니다.”

예전에 쪼개진 대현 계열사들은 형제들이 각자 소유하고 있었다. 대현의 계열사는 몸집이 커서 쉽게 노리기 어렵다. 정영수 회장이 이번에 노리는 회사는 대현 건설뿐이라는 뜻이다.

“제가 회장님 욕심을 모르겠습니까? 저희가 함께한 지가 몇 년인데요.”

본사를 공략하고 나면 나머지 분리된 계열사도 일부 지분을 얻을 수 있으니, 대현 그룹 통합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정영수 회장은 분명 이를 위해 본사를 먼저 공략한다는 뜻일 것이다.

“강 회장님 앞에서 머리를 굴릴 생각은 없었지요. 사실입니다.”

마침 대현 건설은 어려움에 부닥쳐 있었고, 기회를 포착한 정영수 회장은 적시에 나섰다. 아무리 동생이 자신을 꺼린다 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거기다 정부에서 힘을 보태준다면….’

인수에 실패할 확률이 0에 한없이 가까워지기 때문에 수안을 찾아온 것이다.

수안은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정 회장에게 말했다.

“미안한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저도 아버지께 회사의 작은 일도 부탁하지 않아요. 게다가 다른 기업의 합병이나 인수에 관련된 일을 부탁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죠.”

“…….”

“하지만 저를 찾아오신 것은 분명 잘한 일입니다. 제가 대현 건설 회장님을 만나 보겠습니다.”

“강 회장님이 나서준다면야….”

수안이 나서주기만 해도 큰 도움이 되긴 할 것이다.

“건설 회장님과 관계가 나쁜 사람은 정 회장님 아니십니까. 물론 저도 그리 좋게 보진 않으시겠지만 말이죠.”

정영수 회장과 수안이 친밀하다는 것은 많은 경제인이 알고 있는 일이다. 대현에서 인수한 하이닉스와 하이디스는 수안의 품에 들어와 엄청난 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그동안 대현에서 빼먹은 것이 적지 않으니 수안도 나설 때는 나서줘야 했다.

“영호가 호락호락한 놈이 아니라 걱정이지요.”

“그냥 거래라고 생각하십시오.”

동생을 구속시키고 가족과 생이별을 하게 만든 당사자였다. 인수에 관해서는 함부로 운을 띄우기도 어려우니 수안에게 부탁하고 있지만, 수안은 그저 거래의 일부로만 보일 뿐이다.

“강 회장님이 자리라도 마련해 주면 진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자리만이겠습니까? 자금적인 도움도 필요할 텐데요?”

“하하. 말을 꺼내기도 전에 먼저 말씀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죠.”

수안은 베풀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아. 이제 저희 쪽 제안도 들어 보셔야죠?”

정영수 회장이 온다는 말에 미리 생각해 둔 일이 있었다. 정영수 회장의 방문 목적이 뻔했기 때문이다. 수안의 손에는 협조를 구할 목록이 들려 있었다.

“…….”

정영수 회장은 침을 꿀꺽 삼키며 수안의 말을 기다렸다.

“우선…. 대현 자동차의 검찰 장학생과 사법부의 끈이 이번에 활용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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