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끝 작렬
수안은 백악관에서 오바마와 악수하며 인사를 건넸다.
드디어 사적인 시간이다.
“이제야 편히 만나네요.”
“스티븐. 당신의 아버지가 기분 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주한 미군의 방위비 분담은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저와는 그리 상관없는 일이랍니다.”
고작 몇천억으로 오바마와 싸울 수는 없는 일이다.
“하하. 스티븐과 대화하면 항상 마음이 편합니다.”
“시간이 빨리 지납니다. 재선에 성공하고 벌써 2년이나 지났습니다.”
“이제 2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하죠.”
2016년 다음 대선까지 2년이 남은 시점이었다.
“그런데…. 트럼프 그 사람은 왜 챙기라는 말인지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어요. 못난 구석만 가득한 사람이지 않습니까.”
수안은 대선 전부터 오바마에게 트럼프를 비난하지 말라고 몇 번이고 얘기했었다. 그래서 공격이 들어와도 웃으며 넘기고 오래전 만찬에 초대해서도 비난이 아니라 용서를 선택했다.
“덕분에 트럼프가 민주당의 후원인으로 남아 있지 않습니까.”
트럼프는 예전처럼 민주당과 공화당에 모두 후원하고 있었다.
자신이 공격했던 오바마가 예상과 달리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다. 혼자서 발광해도 상대가 호응해 주지 않으니 일이 커지지도 않았다. 또한 트럼프는 비난을 받지도 않았으며, 그 일로 관심을 끌지도 못했다.
“그가 공화당으로 간다고 해도 아쉬운 것은 없어요.”
수안은 미국 대통령의 미래도 바꿔 버린 상태였다. 예전 생의 트럼프는 오바마에 상당한 반감을 갖고 공화당으로 돌아서지만, 이번엔 공화당에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정치에 관심이 있는 모양이다.
“변수는 만들지 않는 편이 좋거든요. 제 눈이 얼마나 좋은지 당신은 알지 않습니까. 저는 당신을 알아보고 당신에게 모든 후원을 쏟아부었습니다. 그런 제가 트럼프를 경계하고 있어요.”
“…….”
수안이 자신을 찾아왔을 때 누가 자신이 미국의 대통령이 될 것이라 예상했겠는가. 수안은 누구보다 먼저 자신의 비전을 확신하고 지지해 줬다.
‘난 그에게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는데….’
트럼프는 아무리 생각해도 악동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 그가 대단한 인물이 된다는 예측은 일부러라도 어렵다.
하지만 수안은 아니었다.
“그가 대통령이 되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습니까? 미국의 노동자층인 레드넥은 도시와 시골 사이의 불평등으로 불만이 팽배해 있습니다. 매체를 통해 계속 얼굴을 비추며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그가 대선에 등장한다면, 지식인은 몰라도 지방의 노동자들은 상당수 그를 지지하게 될 겁니다. 매체에 얼굴을 많이 비추면 비출수록 그의 인지도는 계속해서 올라갑니다. 그의 이미지와는 하등 상관없는 일이죠.”
“…거기까진 예상하기 어렵군요. 동의하기 쉽지 않아요.”
수안은 실제로 보고 온 미래였기에 확신하지만, 오바마로선 예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어쨌든, 이번 민주당 유력 대선 후보는 윤곽이 보입니까?”
대신 수안은 오바마가 아는 것을 물었다. 이미 다 알고 있지만, 대화를 시작하기 위해 던진 말이었다.
“…민주당은 힐러리 국무장관밖에 답이 없죠. 물론 내부 경선을 통과해야겠지만, 나머지 후보군과 차이가 크게 벌어져 있지요.”
오바마는 당선 후 경선에서 경쟁했던 힐러리에게 국무장관직을 제안했고 힐러리는 고심 끝에 수락했다. 하지만 힐러리를 따르던 참모들은 오바마 밑으로 들어간 힐러리에 배신감을 느끼고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오바마는 2012년 재선에서 클린턴 전 대통령의 지원을 받았다. 수안이 흑인 대통령이 나올 거라고 얘기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수안이 아니었더라도 클린턴은 민주당의 대선 후보를 지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인해 힐러리의 대선 재도전 가능성이 불을 지폈고, 이후 강력한 대선 후보로 떠오르고 있었다.
강력한 대선 후보로 거론된 이유는 하나가 아니다. 한국과 달리 무제한으로 정치참여가 가능한 슈퍼팩의 존재가 있었다.
“말씀대로 공화당의 후보들의 존재감이 미비하더군요. 슈퍼팩의 효과겠지요?”
“…슈퍼팩의 힘은 대단합니다. 선거의 주요 변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 오바마는 슈퍼팩을 민주주의의 적이라 부르며 경멸해 왔었다.
“슈퍼팩은 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셨군요. 좋은 일입니다.”
“하하. 스티븐 회장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겠죠. 힐러리의 지난 대선자금의 빚을 갚아 준 것도 BE 인베스트먼트라고 들었습니다.”
미국 내에서 가장 거대한 슈퍼팩이라고 할 수 있는 BE 인베스트먼트 그룹이다. 힐러리가 지난 대선 자금으로 빚이 생겼을 때 수안이 나서서 모조리 갚아 줬다. 수안이 아니라도 갚을 수 있었겠지만, 어려울 때 도와야 진짜 고마운 법이었다. 그리고 지금 힐러리에게 쏟아지는 긍정적인 뉴스들도 대부분 BE 슈퍼팩의 작품이었다.
오바마 자신도 BE 슈퍼팩의 수혜자였다.
“혹여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잘 부탁드릴 뿐입니다.”
“BE는 확실하게 노선을 정한 모양이군요. 힐러리가 강력한 후보이긴 합니다. 예비 대선 후보 지지도 조사에서 1위를 달리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직 대선에 나간다는 발표를 하지 않았는데 말이죠. 역시 스티븐의 안목은 탁월합니다.”
트럼프만 없다면 힐러리를 상대할 공화당 후보가 없었다. 경선은 물론이고 대선에서도 독보적인 후보가 될 것이다.
“안전하고 확실하면 좋겠지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나쁘지 않죠. 사람은 보통 약자를 응원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연약한 이미지를 만들 수도 없어서 난감합니다.”
“미국은 한국과 다르다는 점을 기억하세요. 강하면 강할수록 인기는 높아집니다. 특히 여성으로서 대선에 도전하는 힐러리 전 장관은 전쟁을 불사할 정도로 호전적인 이미지를 보여야 합니다. 전쟁 자체를 싫어하는 미국인은 많지만, 약한 미국을 원하는 미국인은 없으니까요.”
“Make America Great Again!(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좋습니다. 다음 대선의 구호로 써먹어야겠습니다.”
이번 대선을 힐러리의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뭐라도 가져다 써야 했다.
“하하하. 구호가 정말 좋군요.”
“그럼요. 재선에 성공한 현역 대통령이 힌트를 줬잖습니까.”
‘그리고 이미 검증된 구호니까요.’
트럼프가 써먹었던 구호지만, 무슨 상관인가.
미국의 다음 대통령까지 손에 넣을 수안이다.
‘전염병 사태를 잡으려면 미치도록 확진자가 증가하던 미국을 빼놓을 수 없지.’
이 역시도 전염병 사태를 막기 위한 계획의 일환이었다. 아직 최종 샘플이 입수되지 않았지만, 어찌 됐든 강운 생명 과학에서 가장 먼저 백신이 완성될 것은 확실한 일이다.
‘그때나 되어야 미국 정부에서 손해를 벌충하겠군.’
아버지가 주한 미군에 뜯긴 돈은 백신을 통해 수십 배로 돌아올 예정이다.
이제 머지않았다.
“오늘도 함께 러닝이 가능하겠죠? 저녁이나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만나는 날엔 항상 함께 달리곤 했었다.
“미안하지만, 아내와 딸이 비키니를 입고 대기 중입니다. 요트 휴가를 가기로 했거든요. 절대로 아버지께 불편한 말씀을 했다고 일부러 이러는 것이 아닙니다.”
“…….”
“미국식 농담이었는데, 별로 재미없었습니까? 역시 저는 한국식 농담이 어울리는 모양입니다.”
강운 그룹 회장이 농을 하는데 웃지 않을 놈이 누가 있을까. 아무리 재미없어도 바닥을 구르며 박장대소할 것이다.
“하하하. 농담이었군.”
“그래도 다음엔 살살 좀 해 주세요. 우리나라에는 어른을 공경하라는 말도 있습니다.”
지금부터가 진짜 복수였다.
‘속을 벅벅 긁어 주마. 오바마.’
“한국의 예절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죠. 좋은 말입니다.”
“그럼 다음 방한에 양보하는 겁니다. 특히…. 이제 자동차 관세 철폐할 때가 됐죠? 더는 유예하지 않습니다. 이젠 한국 정부에서 양보할 생각이 없다는 뜻입니다. 어디 이번엔 무슨 수로 막는지 지켜보죠. 아! 당연히 한국 자동차 시장은 미국에 활짝 열려 있습니다. 얼마든지 들어와서 파세요. 물론 팔릴지는 미지수지만요.”
“…애리조나주에 있는 강운 자동차 공장은 잘 돌아가더군요.”
“고맙지 않습니까? 한국 기업이 미국에 자동차 제조 공장을 짓고 미국인을 고용하고 있습니다.”
“관세 철폐는 예정대로….”
“좀 당기면 더 좋을 텐데…. 미국인은 미국에서 생산된 차량보다 한국에서 생산된 차량을 더 선호하니까요. 아. 요즘 포드는 어떻습니까. 보유했던 브랜드들을 팔고 조금 나아졌지요?”
수안이 괜히 관세 철폐를 당겼으면 싶은 것이 아니다. 강운 그룹에서 팔아야 할 차는 강운, 기화, 대운까지 셋이었지만, 이는 국내 한정이었다. 해외에서 새로 인수한 자동차 생산 기업체들을 더하면 자동차 업계의 공룡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관세 철폐는 한국과 미국 사이의 일이지만, 한국에서 최종 조립에 일부 관여하고 미국으로 내보내면 이것도 한국산 차라고 할 수 있었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이지만, 미국에서 생산하는 차량 대부분도 부품만 들여와서 조립하는 식이다.
“포드가 매각한 자동차 브랜드들은 스티븐 회장이 대부분 인수하지 않았습니까?”
“하하. 좋은 물건을 팔고 있는데, 안 살 수야 있나요.”
이제 볼보와 랜드로버도 국산 차로 취급받고 있었다. 해외에서 생산되어 한국으로 들어오고 있지만, 소유주는 강운 그룹이기 때문이다.
“자동차 산업은 스티븐 회장이 다 집어삼키고 있습니다. 다른 브랜드까지 매물이 나오는 것마다 다 샀으니….”
“우리가 남은 아니지 않습니까. 자동차 시장은 얼른 전면 개방으로 가세요. 또 알아요? 제가 미국에 공장을 또 짓는다고 할지?”
“…….”
뒤끝 있는 남자의 소심한 복수였다. 그렇다고 그냥 당하고 있을 오바마가 아니었다.
“자동차는 그렇다 치고…. 이제 애플은 그만 손에서 놓아주면 좋겠습니다. 안 그래도 K폰의 점유율이 높은데, 언제까지 애플에 참견할 생각입니까.”
이제 애플은 본래에도 세계적인 IT 기기 제조사였고, 지금은 더욱 크게 성장했다. 강운 전자의 K폰에 비할 수는 없지만, 애플의 아이폰도 상당한 완성도를 자랑했고 안드로이드 운영체제가 아닌 독자적인 IOS를 사용하며 미국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문제는 이미 세계 시장 1위에 빛나는 강운에서 애플의 지분을 상당히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분만으로 끝이 아니라 아이폰의 생산이나 개발, 경영까지 참견하고 있으니 오바마는 이를 해결할 생각으로 말을 꺼낸 것이다.
“물론 당장이라도 애플의 주식을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애플의 아이폰 기술도 대부분 강운 전자 기술이라는 건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저희가 기술제휴를 끊고 돌아서면 저희를 붙잡는 건 애플입니다.”
현실은 냉혹한 법이다. 강운에서 보유한 기술 특허를 상당수 사용하는 애플의 아이폰은 강운과 결별하면 엄청난 원가 상승에 직면할 수도 있었다.
“지분을 정리해도 기술 제휴는 얼마든지 이어 갈 수 있는 일이 아닙니까. 그리고 애플의 스티브와 스티븐 회장은 돈독한 사이로 알고 있소.”
“강운은 애플의 부모가 아닙니다. 아무리 사이가 좋아 봐야 돌아서면 남이죠. 게다가 애플은 미국에서 인지도 높은 IT 기업입니다. 가장 위험한 경쟁자라고 할 수 있죠. 그런 애플이 생산하는 아이폰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
“양보는 서로 주고받는 걸 말합니다.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양보하는 것은 양보가 아니라 희생입니다. 희생은 아무에게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가족이나 아주 친밀한 친구에게나 가능할 겁니다. 제가 프레지던트께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한국에 양보할 일이 있는지 찾아보겠소.”
양보를 주고받고 싶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수안은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자동차와 BE에서도 찾아봐 주시죠. 한국과 미국은 혈맹이 아닙니까.”
“…….”
“…….”
주도권을 잃어버린 패배자의 침묵과 여유가 넘치는 승자의 침묵은 다르다.
“항상 도움만 받아 와서 할 말이 없군요.”
“작은 도움을 기억해 주시니 감사할 뿐이죠.”
오바마의 임기도 끝물이다. 빼먹을 것이 있으면 빼먹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