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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거 (290/304)

따거

“예. 조금 특이한 조건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지우창 박사님께 해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선 듣고 판단하겠소.”

본래 보상을 말하고 조건을 설명할 생각이었지만, 일부라도 미리 알려 줘야 한다고 판단한 임수호는 간략하게 말했다.

“…항주에 바이러스 연구소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우창 박사님이 그 연구소에 들어가시길 원합니다.”

“바이러스 연구소라면…. 분명 내 연구와 연관이 있긴 합니다. 지원한다면 들어갈 수도 있겠지요. 박사급 인물이 많지는 않을 테니….”

“그래서 어렵사리 지우창 박사님을 찾아 이렇게 왔습니다.”

“거기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뭡니까.”

지우창은 상대의 모든 요청 사항을 들어 보고 협상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어려운 일이라면 더 많은 지원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다.

“우선 저희가 드릴 보상부터 들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응? 해야 할 일을 설명하기도 전에 보상부터 말씀하신단 말입니까?”

“이미 정해진 보상이라서 그렇습니다. 이 보상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그대로 손을 떼시면 됩니다. 저희 요구 조건은 보상을 받아들였을 때나 들으실 수 있습니다.”

“들어나 봅시다.”

임수호 차장은 손가락 다섯 개를 펼쳐 보였다.

“1년에 5백만 인민폐.”

“……!!”

한화로 9억 원에 이르는 거액이다.

“향후 10년간 항주 연구소에 계시면 매년 지급해 드립니다.”

10년 동안 90억을 주겠다는 말이었다.

“어떻습니까. 대학을 뒤로하고 연구소로 가실 정도의 금액이 됩니까?”

“…내게 위협이 되는 일이 아니라면 생각해 보겠소.”

대학 교수의 보수와 비교도 되지 않는 금액이었다.

“그 정도의 의사 표시면 충분합니다.”

어차피 중국 공안에 발설할 사람도 아니라는 판단이었다.

“이제 저희 요구 사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

지우창은 떨리는 심정으로 임수호의 말을 경청했다.

“항주 바이러스 연구소는 중국에서 발생한 사스 이후에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세계 최고 등급인 BSL-4(생물 안전 등급4) 실험실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스정리 박사는 ‘기능 획득 연구’에 집중하기 시작했지요. 지우창 박사님도 잘 아시겠지만, 애당초 바이러스에 없었던 기능을 탑재하는 연구가 바로 ‘기능 획득 연구’입니다. 주로 치명성을 높이거나 감염력을 강화하는 쪽으로 이뤄지지요.”

지우창은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정보를 끄집어냈다.

“음…. 바이러스학 저널에 실린 HIV 기반의 슈도바이러스를 사용한 스정리 박사의 논문을 본 기억이 납니다.”

이 논문은 스정리 박사가 이끄는 항주 바이러스 연구소가 중국과학원의 자금 지원을 받으며 야생에서 수집한 바이러스를 인위적으로 개조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개발하고 축적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예. 그리고 3년 전인 2010년에 해당 성과를 토대로 박쥐 바이러스 샘플을 조작해 인간 사스 바이러스의 스파이크 단백질과 상호작용 여부를 실험한 논문도 공동 저술했습니다.”

“아미노산 조각을 교체해 박쥐 바이러스의 수용체 감염력을 높이거나 낮출 수 있다는 내용이었지요. 상당히 공격적인 연구라 염려스러웠습니다. 바이러스를 무기로 사용하려고 진행하는 연구 같았으니까요.”

긴 설명 끝에 임수호가 요구 사항을 말하기 시작했다.

“저희는 많은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특히 스정리 박사의 연구를 가로챌 생각도 없습니다.”

“……?”

분명 스정리 박사의 핵심 연구 자료를 가져오라고 할 줄 알았다. 그래서 거절할 마음까지 먹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라고 하니 다음에 나올 말이 무척 궁금해졌다.

“지우창 박사님이 그 연구에 함께하시며 바이러스 병원체만 확보해 주십시오. 저희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병원체의 백신과 치료제를 만들어 낼 생각입니다.”

자신 정도의 위치라면 스정리 박사와 동급이었고, 연구소에서 샘플을 따로 빼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백신과 치료제라는 좋은 목적이라면 직접 연락해서 공동 대응을 하는 편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일이라면 협조를 요청하는 편이….”

“중국과학원에서 우리 강운 생명 과학의 협조를 수용할까요?”

“…쉽지 않겠군요.”

중국은 폐쇄적인 나라였다. 특히 기술 분야에 있어서 외부에 자유롭게 공개하는 자료는 없다고 생각해도 좋았다. 특히 한국의 첨단 기술을 빼내지 못해 안달이었는데, 생물학 분야에서 진행 중인 핵심적인 연구에 한국 기업을 동참시키진 않을 것이다.

“물론 지우창 교수님이 바이러스 병원체를 빼내기도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저희가 들어가서 구하는 것보다야 나을 겁니다. 저희는 이 일을 위해 큰돈을 쓸 생각이고요. 서로에게 좋은 일임과 동시에 인류를 감염병 위협에서 구하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저희는 지우창 박사님의 협조를 바랄 뿐입니다.”

지우창은 잠시 고민하고 말했다.

“서로에게 좋다고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강운 생명 과학에는 좋은 일이 아니군요. 어차피 항주의 바이러스 연구소는 4등급 실험실을 갖추고 있습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요. 대체 강운 생명 과학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박쥐는 중국인에게 복을 상징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연구소에서는 동물 실험이 수시로 자행되지요. 실험에 사용된 동물이 외부로 유출되지 않을 거라 자신하십니까?”

“…….”

지우창도 학생들을 가르치며 그들의 인식에 아연한 마음이 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동물 실험에 사용된 쥐나 토끼를 가지고 나가려다가 잡힌 놈이 몇이던가. 연구원들이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각지의 연구소에서 상상하지도 못할 사고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외부에 공표되지 않았을 뿐이다.

“실수로 개선된 바이러스를 품은 동물이 외부로 나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스정리 박사가 감염력과 치명성을 높인 바이러스 말입니다. 중국을 시작으로 전 세계로 뻗어나가면 대체 누가 이 일을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강운 생명 과학은 스정리 박사의 논문을 통해 위험을 감지했고 인류를 위해 이 일을 계획했습니다. 강운 생명 과학이 아무것도 얻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인류만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지우창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컵을 들어 물을 마셨다.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

보통의 연구소라면 지우창도 안전하다고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가르친 학생들과 연구원들을 생각하면 가능성을 따지지 않을 수 없었다. 바이러스 연구소에서 병원체의 유출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부터가 잘못된 일이지만, 중국에 불가능이 있었던가. 게다가 바이러스가 유출되면 가장 먼저 중국이 타격을 받을 것이다.

‘무고한 중국인들이 또….’

바이러스가 유출되어 전염병이 퍼져도 당국이 제대로 조처를 할지 미지수였다.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지면 중국은 세계의 적이 될 겁니다. 전 세계 어디에도 중국인이 발붙일 곳이 없을 겁니다.”

“…….”

“항주 연구소의 스정리 박사팀에 들어가서 함께 연구해 주십시오. 연구나 논문에 이름을 올리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하시면 스정리 박사도 경계심을 지울 겁니다. 그리고 거기서 지우창 박사님이 하실 일은 단 하나입니다. 그들이 개발한 바이러스 샘플. 그 샘플을 확보해 넘겨 주십시오. 우린 그 바이러스를 연구해 백신을 개발하겠습니다.”

“휴우.”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십니까?”

대학에서 안정적으로 급여를 받으며 본연의 연구도 할 수 있는 교수직을 내려놓고 남이 연구하던 일에 뛰어들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임수호는 지우창 박사가 충분히 고민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박사님의 연락을 기다리겠습니다.”

“필요 없소. 교수직을 내려놓을 시간과 항주 연구소에서 날 받아주는 시간이 필요할 뿐이요.”

항주 연구소로 가겠다는 뜻이다.

임수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깊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박사님.”

“이런 일은 돈을 받고 해야 할 일이 아닌 것 같소. 조국을 위하는 일이니까.”

지우창은 공산당을 싫어하는 것이지 중국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중국이 처할 위기를 두고 볼 수 없었다. 자신이 공부해 박사 학위를 취득한 것은 나라를 위함이었다. 조국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쓸 수 있다면, 돈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위험 부담이 있는 일입니다. 이 돈으로 나중에 하고 싶은 연구를 하실 수도 있습니다. 부담 없이 받아 주십시오. 대신 공안이 알아채지 못하게 다른 입금 통로를 마련해 주시길 바랍니다. 해외 계좌가 좋겠습니다.”

“…….”

“그리고 혹시 일이 어찌 될지 모르니 가족들을 해외로 보내시지요. 자식이 있으니 해외 유학을 보내며 가족을 같이 보내시면 좋겠지요.”

“아까는 내게 그 어떤 해도 끼치지 않겠다고 말하셨소. 물론 나는 위험을 부담할 수 있소. 하지만 이젠 가족까지 위험할 수 있다는 뜻이오?”

“강운 생명 과학은 박사님과 가족에게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국은 다르지요.”

“…….”

“훗날 강운 생명 과학이 백신을 개발했을 때, 박사님이 병원체 샘플을 넘겼다는 사실이 밝혀질 수도 있습니다. 그게 아니라도 박사님 마음이 바뀔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항주 연구소에서 일하시다가 미국으로 망명을 결정하실 수도 있겠죠. 박사님이 미국 망명 절차를 검색하신 기록도 확인했습니다. 그만큼 중국 공산당에 환멸을 느끼셨기 때문이겠지요.”

“…오늘 처음 본 사람이 날 너무 많이 파악하고 계시는군.”

불만스러운 말이었지만, 처음과 같은 날 선 반응은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그러니 미리 돈을 마련하셔야 합니다. 저희가 드리는 돈을 받아 주십시오. 그리고 따님이 미국에서 유학할 기회를 주시고 가족들이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하십시오.”

“…알겠소. 그리하리다.”

“오늘 결정을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연구소에 가시면 따로 연락할 방법을 마련해 보겠습니다. 추가로 활동 자금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요청하셔도 됩니다. 제가 돈을 만지는 사람이라 어느 정도 융통성이 있습니다.”

“오늘 내가 재신을 만난 모양입니다.”

“저는 중국의 희망을 만났지요. 지우창 박사님은 중국에 마지막 남은 희망의 등불입니다.”

“…달변가로 정정하지요.”

“저를 어떻게 부르셔도 좋습니다. 저는 지우창 박사님과 가족분의 안전만 챙기겠습니다. 나머지는 박사님의 몫입니다. 인류를 위해 희생을 강요해 죄송스러운 마음뿐입니다.”

임수호 차장의 말에 지우창 교수의 눈이 깊어졌다. 임수호가 진심으로 자신과 가족을 걱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태도는 한결같이 정중했다.

‘이 사람은 선량하고 진실한데, 마음마저 따뜻하구나.’

지우창은 임수호를 스쳐 지나가는 인연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오래 보며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펑요. 어떻소?”

서로 친구가 되는 게 어떻겠냐는 물음이었다. 친구가 되면 편히 얼굴을 보며 앞으로 친분을 다질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따거가 좋겠습니다.”

대형으로 모시겠다는 뜻이다.

“……!”

지우창은 의외의 대답에 가슴이 울리는 것을 깨달았다.

“허허. 이거 제대로 코가 꿰었어.”

대형으로 부르는 것을 허락한다는 뜻이었고, 이는 곧 임수호가 가족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대형. 형수님과 조카는 제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임 동생이라면 이제 믿을 수 있네.”

“대형께 추가 보상이 가능한지 윗선에 제안해 보겠습니다.”

“됐네. 지금 받는 것으로 충분해. 외려 돈을 받고 일을 한다는 것이 민망할 지경이야. 그리고 의동생은 대형인 내가 챙겨야 하지 않겠어?”

“그래야 형수와 조카가 미국에서 편히 사십니다. 대형께서 교수직을 정리하시는 동안 저는 본사에 가서 확인하겠습니다.”

“…무리하지 말게.”

“이래 봬도 동생 능력이 좀 됩니다. 강운 생명 과학 회장님과 독대할 수 있습니다.”

“오늘 바로 가진 않겠지?”

“아무리 급해도 대형을 모신 기쁜 날에 술을 빼먹을 수는 없지요.”

“이거 마음이 맞는 동생을 만났군!”

“존경하는 대형을 만나 저도 마음이 흐뭇합니다. 제가 이 근처를 모르니 대형께 부탁드립니다. 마음껏 마실 수 있는 곳이면 좋겠습니다.”

“하하하. 좋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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