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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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 5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수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세진을 맞이했다.

“하하하. 결국 이렇게 될 것을 말이야.”

수안의 말이 왜 이제야 돌아왔느냐는 질책으로 들린다.

“예. 회장님. 돌고 돌아서 이제야 돌아왔습니다.”

이현창 곁에서는 자꾸만 몸가짐을 조심하게 되고 긴장이 놓이질 않았다. 당시에도 이름 높은 정치인이었고, 지금은 한 나라의 대통령인 사람이다. 당연한 얘기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수안 곁으로 와 보니 뭔가 달라도 다르다는 것이 느껴진다.

‘여긴 사람 냄새가 가득 풍기는 곳이야.’

그래서 절로 마음이 놓이고 편안한 기분이 든다. 대통령 비서관들 사이에서 느끼지 못한 편안함이 이곳엔 있었다.

“어서 앉아. 이 사람아.”

“예. 회장님.”

이후 세진은 예전 추억을 되살리며 수안과 대작을 시작했다.

“하하하. 운 테크 박 사장은 아직도 백돌이를 못 벗어났잖아. 그 사람은 어째 골프가 늘지를 않아.”

“평균이라고 하기엔…. 운동 신경이 많이 부족 하시죠.”

“배 사장이 자네 온다는 소식에 얼마나 기뻐했는지 몰라. 이제 자기가 좀 놀아도 되겠다고 하더라.”

“그럼 전략실도 제게 맡겨 주십니까? 그래야 배 사장님이 쉬시죠.”

“그럴래?”

“농담입니다. 제가 전략실까지 손대면 배 사장님이 절 잡아먹으려고 할걸요?”

“흐하하.”

“그러고 보니 배 사장님은 안 보이십니다? 오늘 보자고 하셔서 배 사장님도 나오시는 줄 알았는데….”

“배 사장은 지금 바빠. 일본에 지진 터졌잖아.”

“…지진 구호 작업을 감독하고 계십니까? 배 사장님이요?”

“배 사장 아니면 누가 하겠어?”

“그럼 지금 일본에 배 사장님이….”

거대한 지진은 지나갔지만, 일본에는 위태로운 건물이 많았다. 그런 곳에 배영성이 달려갔다고 하니 크게 걱정됐다.

“그건 아니지 이 사람아. 거기가 어디라고 배 사장을 보내나? 아직도 여진이 이어진다고 하는데,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 사무실에서 전화로만 지시하는 거지. 전략실 직원들도 다 붙어서 처리하는 중이야.”

‘직원들을 끔찍하게 아끼는 회장님이 그런 위험한 곳에 배 사장을 보낼 리가 없지.’

“회장님은 예나 지금이나 사회 공헌 활동에 관심이 많으시네요.”

“어차피 돈은 다 일본 BE에서 내는 거야. 강운 그룹은 그에 비하면 아주 적은 돈으로 큰 효과를 보고 있어.”

세진은 수안의 말을 웃으며 듣다가 또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아! 차 사장님은 계속 일본에 계셨잖아요! 연락은 되십니까? 별일 없으시겠죠?”

“차 사장은 마침 한국에서 워크숍이 잡혀서 일본에 없었어.”

“우아! 역시 운이 대단하신 분이네요. 그러니 전쟁터나 다름없는 투자자들 사이에서 살아남으셨겠죠.”

“…….”

차진호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저 배영성의 지시에 따라 회사 주요 직원들을 끌고 한국에 놀러 왔을 뿐이다. 일본에 지진이 터진 걸 뉴스로 보고는 벌벌 떨면서 전화한 목소리를 여전히 기억하는 수안이다.

“차 사장은 한국에서 더 놀다가 일본으로 돌아간다고 했으니까 걱정하지 마.”

무서워서 못 가겠다고 난리라 더 쉬라고 했다. 게다가 투자 회사의 업무가 전화로도 얼마든지 가능했기에 쉴 수 있었다. 이번 일본 대지진으로 얻는 수익은 일본 BE가 아니라 미국 BE에서 얻게 될 것이다.

수안은 차 사장의 일보다 근래 세진이 어떻게 사는지가 더 궁금했다.

“애는 잘 크고?”

“언제 키워서 대학 보내고 장가보낼지 까마득합니다.”

5년 전 수안과 함께 일하고 있을 때 결혼했고, 올해 세 살이 된 남자아이가 있었다.

“회장님은 벌써 다 키워놓으셨지 않습니까. 마냥 부럽습니다.”

“내가 결혼이 빨랐잖아.”

첫째 정원이는 중2, 나현이는 초등학교 6학년에 올라갔다. 막내 시원이도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했으니, 다 키웠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제수씨는 뭐래? 강운으로 옮기는 거 말이야.”

“아내는 예전처럼 늦게 오진 않겠다며 좋아했습니다. 요즘은 쉬는데도 마냥 좋다고 합니다.”

“청와대는 아니었나 봐?”

“말도 마십시오. 온 세상의 꼰대와 진상이 거기 다 모여 있습니다.”

“하긴 대통령부터가 꼬장꼬장하잖아. 대법관에 감사원장까지 거쳐서 더 그래. 게다가 창의적인 것도 아니고….”

수안의 말을 세진이 받았다.

“융통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지금 강운 그룹이 있어서 그나마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야. 일전에 세계 금융 위기 제대로 못 넘겼으면 국정 운영이 쉽지 않았을걸?”

“회장님 아니었으면 한 사람 몫은 어림도 없었습니다. 지금까지도 회장님이 도와주셔서 대통령 자리에 앉았다고 자주 얘기하십니다.”

“그 사람은 맨날 그 소리야.”

“그게 진짜라서 그렇습니다. 회장님이 서울시장을 해 보라고 한 덕분에 대통령 자리에 오르기 전 예행 연습이 되었습니다.”

“…….”

수안은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본래는 인기나 얻으라고 보낸 자리였다. 그 와중에 행정을 제대로 익혀 청와대로 입성할 줄은 몰랐다.

“특히 고마운 마음 표현하는 데는 아낌이 없으십니다. 회장님이 열 번 들었다면 근처에 있던 저는 백 번은 들었을 겁니다. 그만큼 회장님께 많이 의지하고 계십니다. 앞으로도 많이 도와주십시오.”

“…그 사람 운도 이제 다했나 보다.”

“네?”

“이번에 자네를 내쳤으니 그 운이 끝나도 이상하지 않지. 이렇게 밖에 나와서도 힘을 보태 달라고 응원하는 사람을 내쳤으니 내년 말이면 그 사람 운도 끝나겠어. 내 점괘가 확실하니 믿어도 좋아.”

“푸흐하하. 내년에 대통령 선거가 있지 않습니까.”

결국 이현창의 임기는 내년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야 했다.

“그래서 하는 소리지. 흐흐흐.”

둘은 적당히 먹고 마셨다. 따로 술을 권하지도 않고 잔을 돌리는 일도 없다. 그저 조용한 목소리로 대화하며 편안하게 술을 마시는 자리였다.

“여행 일정은 다 잡았어?”

“해외 여기저기 좀 과하게 잡았습니다.”

수안의 말대로 직장인이 오랜 휴가를 내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자신을 받아 준다는 약속까지 받아 긴 휴가를 계획했다.

“큭. 잘했어. 장 비서는 제대로 써먹어 줄 것 같더라.”

“애가 어려서 좀 걱정이긴 하지만, 그래도 말은 잘 알아들어서 데리고 다녀 보려고 합니다.”

“어휴. 그 어린 애기를 데리고 같이 여행 다니려면 쉽지 않겠네.”

“그래도 이런 어려움이 있어야 더 기억에 남지 않겠습니까? 아내도 학을 뗄 정도로 고생을 해 봐야 다시 나가자고 안 할 겁니다.”

“역시. 장 비서는 배운 남자네.”

“하하하.”

이후로도 시답지 않은 농담 따먹기와 가벼운 대화들이 오갔고 이제 자리에서 일어날 시간이다. 수안은 지나는 말처럼 가볍게 말을 던졌다.

“나가는 길에 작은 쇼핑백 하나 받아 가. 매번 전달만 해 줬지, 본인이 받아 간 적은 없잖아.”

“……!”

정 과장이 들고 있는 쇼핑백은 정말 익숙했다.

골프용품을 선물하는 작은 쇼핑백이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물건은 골프공이 아니라 돈이었다.

“에이. 그래도 회장님 이건 좀….”

“여행 나가서 어깨 펴는 남편 되라고 주는 거야. 해외여행 나가는데 가방 정도는 하나 사 주고 해야지.”

“저도 많이 모아 놨습니다.”

“경제권은 제수씨 넘겨줬다고 들은 것 같다만?”

“…제가 돈엔 별로 관심이 없지 않습니까.”

“사람이 참 간사하게도 돈이 있을 때는 사고 싶지 않았던 물건인데, 돈이 없으면 갑자기 사고 싶어진다? 음식도 마찬가지야. 이상하게 비쌀 때가 더 맛있단 말이지.”

유부남이 된 세진도 이제 공감할 수 있었다. 예전엔 돈이 돈으로 보이지 않았는데, 용돈을 받으며 직장을 다니다 보니 자꾸만 뭔가가 갖고 싶었다. 새로운 취미에 눈을 뜨기도 했고, 운동을 다니고 싶기도 했다.

“잘 쓰겠습니다.”

그래도 회장님이 건네는 현금 중에서 가장 작은 수준이라 민망함을 참고 받을 생각이었다. 백화점 쇼핑백이었다면 받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엔 딱 맞게 1억이 들어가고, 세진이 받은 작은 쇼핑백은 2천이 들어간다.

“다녀와서 보자.”

“옙! 회장님!”

세진은 쇼핑백을 가볍게 들고 지하철로 향했다.

.

.

.

“아빠아아아!”

적당한 식사와 곁들인 반주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일찍 끝났기에 아직 아들이 잠들지 않은 시간이었다. 세진은 아들을 들어서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껴안아 주고 사랑해 줬다. 아내도 거실로 들어오는 남편에게 인사했다.

“당신 생각보다 일찍 왔네? 술도 많이 안 먹었어?”

“회장님은 9시 전에 무조건 회식 끝이라니까. 오늘은 더 일찍 끝났어.”

“손에 그건 뭐야? 당신 골프 배우려고?”

“아. 이거…. 회장님 선물이야. 당신이 열어 봐.”

회장님은 몰래 가지고 있다가 선물로 사 주길 바라셨지만, 이 정도 비자금은 세진도 갖고 있었다. 차라리 아내에게 솔직한 남편으로 어필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옴마야.”

“아….”

아내가 쇼핑백에서 돈을 꺼내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이, 이게 다 얼마야?”

“오만 원권….”

만 원권으로 따졌을 때 2천만 원이었다. 오만원권으로 다시 계산하면 1억이다.

“당신도 몰랐어?”

“…….”

알았다면 일부를 따로 빼놨을 것이다.

“알았지. 최근에 오만 원권이 나오면서 바뀌었다는 말은 들었거든.”

전혀 들은 바 없었지만, 아내에게 놀란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었다.

“회장님은 진짜 통 크시다. 괜히 세계 최고 부자가 아니라니까.”

“…쉽게 돈 쓰는 분이 아니야. 받았으면 받은 만큼 일을 해야지.”

“그럼 우리 여행 다녀와서 당신 매일 야근하는 거 아냐?”

“…강운 그룹 본사는 원칙적으로 야근이 없어. 6시 15분 전에 퇴근 준비하라고 안내 방송 나와.”

강운 그룹의 복지 정책은 정부의 근로자 복지 정책으로 이어질 만큼 선진적인 것들이었다. 덕분에 경제인 연합에서 볼멘소리가 들려오기도 하지만, 수안이 회장으로 일하는 한 근로자의 복지 정책이 과거로 후퇴할 일은 없을 것이다. 강운 그룹 중에서도 수안과 함께 일하는 본사 직원들은 더 높은 복지 혜택을 누리고 있었는데, 세진이 말하는 퇴근 안내 방송이 직원들의 만족도가 높은 복지 중 하나였다.

“헤헤헤. 내가 다닌 회사는 그런 적이 없었지. 강운 그룹 계열사라면서 왜 그러나 몰라.”

“흠흠.”

강운 그룹에 입사하는 것만으로 어깨에 충분히 힘을 줄 수 있었다.

“아! 당신 그럼 뭘로 들어가? 대리? 과장?”

“…부장급이라고 하셨어.”

수안에게 확답을 들은 세진이다. 청와대 비서관까지 지낸 사람이라 최소한의 대우를 생각해도 부장급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오오! 오오오오!!!”

“애나 재우자. 아들 지금 졸아.”

아빠 품에서 꾸벅꾸벅 조는 아들이다.

“이따 맥주 한 잔? 우리 오빠야가 돈도 많이 벌어오고 취직도 성공한 기념으로?”

“큭. 그래. 나도 술이 좀 부족했어.”

‘비자금 좀 없으면 어때? 이렇게 좋은데.’

아직 신혼에 가깝기에 가질 수 있는 생각이었다.

“아. 민희야. 박 사장님은 아직도 타수가 안 줄어?”

“박 사장님은 아무래도 골프랑 잘 안 맞나봐. 내가 사장님만큼 쳤으면 사장님보다 잘 쳤을걸?”

운 테크 박 사장과 함께 일하던 송민희. 그녀가 세진의 아내였다.

수안이 자주 운 테크로 걸음 하며 민희와 친해질 기회가 생겼고, 이후 민희의 적극적인 구애로 만남이 성사되었다고 한다.

“그럼 우리 같이 배울까? 이번에 돈도 생겼잖아.”

“비싸지 않아?”

“조금 가격이 있긴 하지.”

“음. 좋아. 딱 한 달만 같이 배워 보자.”

세진은 자신의 노림수가 맞아들어가 속으로만 환호했다.

‘미션 성공!’

<『재벌가에 끼어들었다』 14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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