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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리

당시 장세진도 드디어 돌아간다며 즐겁게 인사했고 복귀를 반기는 눈치였다. 자신이 모시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 불러 주는 상황이니 기대감이 상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장세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안의 색에 물들어 있었다. 강운엔 합리적인 일 처리와 적절한 보상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세진은 이현창의 곁으로 돌아가길 원했다고 생각했지만, 돌아간 그곳에서 쉽게 적응할 수 없었다.

수석비서관을 통해 사업가 누구를 만나고 오라는 지시를 들었을 때였다.

사업가는 묵직한 사과 상자와 그림 몇 점을 차에 실어 줬고, 자신은 그것을 모처로 전달했다. 세진은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며 생각했다.

‘왜 내가 이런 일을 해야 하지?’

솔직히 이런 자금의 이동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본래 자신이 진행해 온 일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중요했다.

‘지금이 대체 몇 시냐고?’

세진의 손목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밤 1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아무도 보길 원하지 않으니 이런 시간일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싫은 것은 싫은 것이다.

수안과 일할 때는 어지간해서 오늘과 같은 일이 없었다. 하지만 이현창 대통령 밑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시시때때로 이런 일이 발생하고 있었다. 꼭 비자금과 관련한 일이 아니라도 걸핏하면 야근과 철야가 이어졌고, 법정 휴일에도 당연하다는 듯이 출근을 요구했다. 무엇보다 이런 일련의 일들에 아무도 불만을 표할 수 없는 분위기가 너무 싫었다.

‘답답하다. 아무리 대통령이면 뭐 해?’

이를 견디다 못한 세진이 사직서를 내민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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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안은 세진을 데려가라는 이현창의 말에 크게 반가운 기색을 보였다.

“아휴. 저야 땡큐죠. 그 친구만큼 일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요.”

-결국은 뺏기는구먼. 요 며칠 집에서 쉬라고 했으니까 얼른 데려가.

세진은 사직서를 낸 것뿐이지만, 아무 데나 보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직서는 받아 뒀지만, 어쩌지 못하고 우선 쉬라고만 얘기했었다. 예전처럼 수안이 데리고 있는다면, 걱정 없이 내보낼 수 있기에 부탁하는 것이다.

“…정리는 끝나신 모양입니다.”

-끝났으니 보내 주지.

둘 다 정리가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세진이 관리하던 계좌들과 거액의 자금을 말함이다.

“장 비서는 고맙습니다만, 새로 들이는 사람은 함부로 믿지 마십시오. 괜히 골치 아플 수 있습니다.”

장 비서가 다른 건 몰라도 입이 무겁고 충성심이 강했다. 거기다 돈에 욕심도 없는 친구라 비자금 관리에 최적화된 인재라고 할 수 있었다.

수안은 장 비서가 관리하던 계좌를 다른 사람이 맡았다면 언제든 문제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 자금은 자신도 관련이 있지 않은가.

-후배가 그런 걱정 할까 봐 아들놈 시켰어.

해외 계좌 관리를 두 아들 중 하나를 선택해 맡긴 모양이다. 이현창도 함부로 맡길 사람이 없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하하. 잘하셨습니다.”

어차피 아들이 국내 차명 계좌를 맡아서 관리해 왔으니 하나 더 늘어난 것에 불과했다. 수안도 이현창의 아들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어쨌든, 이번 일은 나중에 보답하지. 자네 덕분에 한국이 주변국의 어려움을 지원하는 나라로 거듭났으니까. 게다가 일본 아닌가. 항상 콧대가 높은 녀석들이 우리 도움을 받았으니 한동안은 조용히 있을 거야.

강운 그룹의 일본 지원이 한국의 요청에서 비롯되었다고 포장한 기사를 보고 하는 말이다.

“나라가 잘되어야 기업도 사는 법입니다. 다음 청와대 경제인 오찬 간담회에 불러 주시면 거기서 뵙겠습니다.”

-그러지. 또 보세.

수안은 배영성을 불러 조만간 중장비와 인력이 투입 가능할 거라고 알려주고 푹신한 의자에 머리를 기댔다.

“마흔이 되면 좀 편히 살겠지 싶었는데….”

올해 마흔이 된 수안이다. 바쁘게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벌써 여기까지 달려왔다.

‘그래도 지난 삶보다는 지금이 낫지.’

금용으로 살던 당시의 마흔 살 생일엔 이리저리 숙소를 옮겨 다니며 건설 일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누구도 자신의 생일을 알아주지 않았고, 자신도 생일에 의미를 두지 않았다. 어차피 그 생일이라는 날짜도 자신이 고아원에 맡겨진 날짜에 지나지 않았다. 하루 종일 노가다를 뛰고 피곤한 몸으로 작은 숙소에 돌아가 씻으면 기절하듯 잠들었다. 그리고 일어나 다시 일터로 걸음을 옮기던 나날의 연속이었다.

수안의 상념은 이후 고아원을 나와 사회생활을 시작한 때로 옮겨갔고, 이어서 운 테크에서 만난 박성호 과장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박 과장의 집에 함께 갔던 장 비서….

“……!”

이현창 대통령이 장 비서를 내보냈다고 한 말이 번뜩 다시 떠올랐다.

“아! 장 비서가 지금 쉬고 있다고 했었지! 장 비서 전화번호가 어디 있더라…. 여기 있네!”

수안은 자신의 휴대 전화로 직접 전화를 걸었다. 통화 대기 시간은 길지 않았다.

-회장님!

너무 반갑게 전화를 받아 주어 수안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먼저 나왔다.

“하하하. 이 사람아 일을 그만두려면 나한테 말을 하고 그만두든가.”

-…회장님께 폐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만두고 강운 그룹으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내비치면 강 회장이 이현창 대통령에게 한 소리를 들어도 들었을 것이다. 자신이 모시던 사람에게 그런 상황을 초래할 수는 없었다.

“언제부터 나올 거야?”

-…….

“어쭈? 이제 자유인이라 이거야? 대답도 바로 안 나오네?”

-이현창 대통령께서 직에 계신 동안은….

그사이에 옮기면 문제가 될까 싶었다.

“이미 선배랑 얘기 다 끝났다. 네가 가긴 어딜 가겠어? 어차피 그 사람도 너 맡길 사람 나밖에 없어.”

-아.

그제야 세진도 이해할 수 있었다. 비자금의 비밀을 알고 있는 본인의 처지를 생각한다면 자신이 갈 수 있는 곳은 강수안 회장의 곁이 최선이었다. 이현창의 돈을 관리했지만, 그 돈의 출처가 대부분 강수안 회장으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생각을 이현창 대통령도 했다는 뜻이다.

“오늘은 늦었으니까 내일 다시 통화하자고.”

-벌써 7시네요.

자신이 모시던 사람은 항상 이런 부분에서 철저했다. 퇴근 시간이 지나면 쉽게 전화도 함부로 하지 않는다.

“그래.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났지. 자네도 이제 가정이 있잖아.”

수안과 함께하는 동안 짝을 만나 결혼에 골인한 세진이다. 세진이 비자금 업무에서 손을 떼고 싶어 한 시기도 결혼 후 아이를 가진 때와 비슷한 시기였다. 생때같은 아이를 놔두고 은팔찌를 차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세진은 자신의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도 그와 같은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청와대 정리하고 바로 출근하겠습니다. 회장님.

“급하게 그럴 것 없어. 직장인은 쉽게 쉬지도 못하잖아. 청와대 자리 정리하거든 해외 나가서 한두 달 쉬고 와. 아! BE에 이방효 사장 연락처 알지? 해외 나가서 괜히 딴 숙소 쓰지 말고 BE 소유 호텔이나 리조트로 잡아. 숙박비는 안 들게 해 줄 테니까. 집에서 어깨에 힘 빡 주고 자랑해도 좋겠네. 하하.”

-…….

잔소리가 많은 만큼 잔정도 많은 사람이었다. 안 그래도 청와대라는 어마어마한 직장을 나와서 아내를 볼 낯이 없었다. 다시 강운 그룹으로 돌아가 회장의 비서가 되었다고 하면 아내도 만세를 부를 것이다.

“그래도 해외 나가기 전에 나랑 소주는 한잔하고 가라. 알았지?”

-옙! 회장님. 감사합니다!!

* * *

수안은 며칠 뒤 세진을 만나기 위해 일정을 비우고 장소를 섭외했다.

“너희 선임께서 복귀하신다니까 의전 똑바로 해.”

“옙!”

비서실 직원들에게도 소문이 퍼졌다. 수안이 일부러 퍼트린 소문이다.

“내가 들었는데, 예전 비서님은 장난 아니었다고 하더라.”

대화하는 직원들은 세진이 청와대로 간 다음 들어온 신입들이었다.

“뭐가 장난이 아닌데?”

“일 처리가 흠잡을 구석이 없었대.”

“회장님 잔소리를 별로 안 들을 만큼?”

“회장님 입이 꽉 닫힐 만큼. 단 한마디도 못 하셨다는데?”

““오오~””

“또 있어. 전략실에서 들었는데, 배 사장님도 그분한테는 깍듯하게 대우했다고 하더라.”

““오오오~””

“다들 뭐 하냐?”

신입들이 모인 곳에 상급자가 등장했다.

“정 과장님. 전에 장 비서님과 같이 일하실 때 그렇게 대단했습니까?”

“아…. 음….”

정 과장은 장세진의 일 처리를 곁에서 지켜본 사람이었다. 장세진이 따로 직급이 있진 않았지만, 따지고 보면 장세진의 위치는 회장 바로 아래였다. 그리고 일 처리도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사람이었다.

“노 코멘트.”

“헐. 정 과장님이 말도 못 할 정도라니….”

“겪어봐야 안다.”

““오오오~””

사실 이렇게 대단하게 여길 정도는 아니었다.

‘사람이 다 사람이지 무슨 기계나 되는 줄 아나….’

이런 것도 직장 생활의 작은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

.

.

수안은 식당으로 들어가며 장 비서와 통화했다.

“장 비서. 다 왔어?”

-예. 회장님. 지하철에서 내렸습니다. 목적지까지 2분 30초 내로 도착합니다.

“2분 30초 안에 온다고? 뭐 하러 초 단위까지 계산하고 그래?”

-K폰을 너무 잘 만드셔서 이런 것도 나오네요.

“아. 그랬나?”

수안은 장 비서와 통화하며 안으로 들어갔고, 수안의 대화를 들은 신입 비서진은 바짝 긴장하고 선임의 등장을 기다렸다.

“2분 30초 뒤에 오신단다.”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일 것 같아. 아직 약속 시간이 40분이나 남았는데….”

“우리 앞으로 6시에 출근해야 하는 거 아닐까?”

“아. 그건 좀….”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다.

그리고 잠시 뒤에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장세진이 도착했다. 사진으로 얼굴을 익히고 있었기에 알아보는데 어렵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장 비서님.””

“아. 예. 안녕하십니까. 비서실 직원들이 상당히 바뀌었나 봅니다.”

장세진은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아는 얼굴이 사라져 잠시 실망한 얼굴이었다.

“저는 있습니다. 장 비서님.”

“오. 정 대리님.”

세진은 아는 얼굴이 나와 반가웠다.

“이제 과장입니다.”

“오오. 제가 복귀하면 이제 정 과장님 아래로 들어가는 겁니까?”

“설마요. 회장님이 그렇게는 안 하실 겁니다.”

“이제 저 끈 떨어진 연입니다. 이현창 대통령과 연이 다해 나왔으니….”

신입 비서들은 이현창 대통령이라는 단어에 또 수군거렸다.

“청와대에 계셨나 봐.”

“그럼 최소 5급 이상 아냐?”

“당연하지. 행정관이어도 3급에서 5급 사이잖아.”

장세진은 그 말을 듣고 정정했다.

“비서관은 1급입니다. 나도 비서관 중 하나였고요.”

외부에 얼굴을 비출 일이 없어서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이현창의 금고지기인 사람에게 비서관 이하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헙! 그럼 연금도 나옵니까?”

“연금 없습니다. 일반 공무원처럼 철밥통도 아니죠. 대통령 임기가 내년으로 끝이니 내년이면 같이 잘렸을 겁니다.”

정 과장이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하여튼 별게 다 궁금하네. 회장님 기다리시니까 장 비서님 얘기는 나중에 물어봐. 이제 들어가시죠.”

“내 정신 좀 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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