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ding & Restart
미국 LA의 한 호텔 방. 두 남녀가 큰 소리로 싸우고 있었다.
“너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갑자기라니? 오빠. 내가 오빠가 좋아서 만난 줄 알아? 오빠 이제 끈 떨어진 연이잖아. 미국에 여행 간다고 해서 좋아했더니 아예 집 나왔다며?”
주환과 함께 미국에 온 것까지는 좋았다. 돈 걱정 없이 마음껏 쇼핑하고 자유롭게 미국의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언어는 통하지 않았지만,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한 주환 덕분에 의사소통에 문제를 느끼지도 못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문제는 최근에 밝혀진 주환의 가출 사실과 또 다른 이유였다.
“2주 전에 얘기했을 때는 괜찮다고 했잖아. 너는 평생 나랑 있어 준다며!”
“미안하지만 생각이 바뀌었어.”
“…너 혼자 여기서 한국으로 어떻게 돌아갈 건데? 비행기 표는 또 어떻게 구하고? 나 없이 네가 여기서 어쩌겠다는 거야!”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야! 난 호텔에서 나갈 테니까 그렇게 알아!”
여자는 처음부터 주환과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내 주제에 재벌가 자식이랑 무슨 수로 결혼해?’
가당키나 하겠는가. 아무리 밑바닥에서 굴러먹었어도 자신의 분수는 알고 있었다. 그저 적당하게 돈이나 뜯어내고 헤어질 생각이었다. 뜯어낸 돈으로 네일숍을 하거나 적당한 건물을 사서 편하게 살고 싶었다.
‘그냥 그 돈을 받았어야 했는데…. 괜히 욕심부려서 손해만 났네.’
돈을 더 받아 내려고 튕긴 것이 화근이었다.
‘조금 더 받으려고 튕겼더니 왜 다시 안 오는 건데?’
주환의 엄마라는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준다던 10억을 그냥 받았어야 한다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새롭게 얻은 기회를 생각하면 아쉬움도 금방 사라져 버렸다.
‘미국에서 그렇게 멋진 남자를 만날 수 있을 줄 어떻게 알았겠어?’
그녀는 주환과 잠시 떨어져 있었을 때 재미교포 사업가를 만나 번호를 교환하고 관계를 이어왔다. 남자를 애인으로 만드는 데는 프로라고 할 수 있었으니, 관계가 깊어지는 것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주환은 건물을 팔고 만든 현금 30억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계속 줄어들고 있으니 그 돈이 떨어지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터였다.
그에 반해 새로 만난 재미교포는 연 매출 3천만 달러의 마트를 운영하는 건실한 사업가였다. 자신과 나이 차이가 좀 있다는 것이 흠이지만, 그녀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사람이었고, 자신의 과거는 전혀 모르는 남자였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돈! 돈이 최고지. 그것도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적당한 돈!’
주환은 크나큰 실망감에 짐을 싸서 떠나는 여자를 잡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자신의 전부라고 생각해 왔는데, 그녀마저 자신을 떠나가고 있었다.
“오빠는 집에 가서 싹싹 빌어 보든가. 혹시 알아? 다시 받아 줄지? 하하하.”
여자는 자신감 넘치는 걸음으로 호텔 방을 나서고 있었다. 주환에게는 한 점 미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후 주환은 복잡한 심경을 쉽게 추스르지 못했다. 호텔과 호텔의 지하 바(Bar)를 오가며 술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날 저녁도 마찬가지였다.
독한 위스키를 연거푸 들이켜며 과거의 기억을 회상했다.
.
.
.
[너 지금 뭐라는 거야! 뭐?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을지 뻔한 술집 여자랑 결혼하겠다고?]
[제가 사랑하는 여자입니다! 오로지 저만 생각하고 저만 바라봅니다.]
[그 여자는 우리 집 돈만 보고 접근한 여자야! 넌 아무것도 몰라!]
[아닙니다! 그녀 마음은 진실합니다!]
집안에서 부모님의 기대와 사랑을 독차지하던 주환은 여동생의 등장으로 달라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혼자서 받던 관심과 사랑을 나눠 받을 뿐이었지만, 모조리 다 잃었다고 상심했다. 자꾸만 동생이 미웠고, 아버지와 어머니 얼굴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상실감을 채워 줄 다른 것을 찾기 시작했다. 술을 먹고 다른 사람과 싸움이 붙는 일이 많아졌고, 육체적 관계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여자를 찾았다.
육체적 관계만으로 끝났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정신적 상실감을 채울 요량으로 상대에게 연인처럼 연기를 요구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술집 여자에게 연인처럼 상대해 달라고 요구하는 부잣집 도련님의 소문은 술집 여인들 사이에서 입을 타고 전해졌다.
그리고 주환의 마음을 알아보고 공략하는 여인이 나타났다.
술집 접대부로 만나긴 했지만, 그 여성의 연기는 정말 그럴싸했다. 주환이 요구하는 대로 연인처럼 그를 대해 줬고, 몸과 마음을 다해 봉사했다. 특히 그녀가 조심스럽게 고백한 고난의 가정사는 주환에게 깊은 동질감을 느끼게 했다.
주환은 오래지 않아 그녀에게 깊이 빠져 버렸다.
[어차피 집에서 난 중요한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누구랑 결혼하든 무슨 상관입니까! 아버지는 강운 그룹이나 중요하겠지요.]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예! 이제 이 집에 다시는 들어오지 않겠습니다.]
[너 당장 다시 앉지 못해!!]
[전 저대로 살겠습니다! 이제 아버지 아들이 아닙니다! 앞으로 아들은 없는 셈 치십시오.]
[뭐, 뭐라고! 너 거기 서지 못해!]
.
.
.
쪼르륵.
작은 술잔 속에 보이는 아버지와 닮은 얼굴이 보기 싫어 위스키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크흐.”
비운 잔에 다시 위스키를 채우고 또 입에 털어 넣는다.
“끄으.”
잔을 다시 채우며 혼잣말을 뱉어냈다.
“…아버지 말이 다 맞았어. …난 아무것도 모르는 병신이야.”
진정한 사랑이라 생각했던 그녀는 북극의 빙하처럼 차가운 여자였다. 사실 그동안 만나면서 실체를 알아가고 있었다. 처음에 보여 준 그녀의 선량함과 사랑 가득한 모습은 꾸며진 위선이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그래도 억지로 믿고 싶었다. 그래야 집을 나온 선택이 올바른 결정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병신. 그렇게 우긴다고 틀린 답이 맞겠냐? 그년하고 계속 만났으면 넌….”
주환이 자문자답하는 사이, 호텔 바에 전형적인 미국인 여성 하나가 들어와 앉았다. 그녀도 술을 마시러 왔는지 바텐더에게 술을 주문하고 있었다.
바텐더에게 받은 잔을 들고 그녀가 주환의 근처로 다가왔다.
“너 혼자?”
주환은 푹 수그렸던 고개를 들어 상대를 쳐다봤다.
“……!”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거대한 무언가가 눈을 어지럽혔다.
“나 혼자. 심심해. 여기 앉아?”
“…Sure.”
“벌써 술을 많이 먹어? 나 한국말 해, 너 왜 영어 써?”
“아…. 그랬네.”
주환이 어쩜 그렇게 한국말을 잘하는지 묻자 여성은 당연하다는 말투로 알려줬다.
“여기 LA. 내 친구 한국인 많아. 그래서 공짜로 한국말 배워. 하하하.”
“그런데 존댓말은 안 배웠냐?”
“…와. 꼰대.”
“…….”
올해 32살의 주환은 꽉 막힌 남자였다. 꼰대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인정?”
“인정.”
“와우. 분수 파악 좋아.”
“넌 몇 살인데?”
“내 친구들 말 맞아. 한국사람 만나면 나이부터 물어.”
“…무슨 말을 못 하겠네. 나부터 얘기하자면 32살. 여기선 31살이라고 해야 하려나?”
“어쩌라고 꼰대.”
“큭. 누구한테 배웠는지 제대로 배웠네.”
며칠 전에 도망친 전 여친의 기억은 훌훌 날아가 버렸다. 지금은 눈앞의 미국인이 더 중요했다. 특히 웅장한 미드가 자꾸만 주환의 시선을 끌어당겨 고역이었다. 헐벗은 흉부의 깊은 골이 남자의 본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남자를 사로잡는 데는 많은 조건이 필요하지 않았다.
‘눈 내리지 마. 병신아. 지금 눈 내리면 말짱 황이야.’
그렇게 주환은 미국에서 만난 새로운 인연으로 살아갈 힘을 얻기 시작했다. 똥차가 떠나자 벤츠가 주환을 맞이한다.
* * *
-분리 작업은 완료했습니다.
“쉽게 떨어졌습니까?”
주환이 만나고 있던 여성에게 갑자기 새로운 남자가 나타난 이유가 바로 여기 있었다. 미국에서 영어도 한마디 못하던 여자에게 쉽게 돈 많은 남자가 나타날 이유가 없었다. 본인이 예쁘고 머리가 좋아서 관계를 이어 간다고 착각하고 있지만, 진실은 잔인했다.
-기다린 것처럼 투입한 놈을 물고 빨더군요. 여자 쪽은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몇 개월 후에 한국에 입국한 다음 정리 예정입니다.
“좋습니다. 그럼 다음 단계가 궁금하군요. 남자 쪽에 투입한 사람은 어떻게 됐죠.”
주환에게 새롭게 나타난 여성도 마찬가지였다. 고르고 골라 주환의 마음에 들만한 무명 여배우를 선택했고, 그 여성은 일정 기간 동안 주환을 미국에 붙잡아 둘 것이다. 미국에서의 생활비는 여배우를 통해 넉넉하게 지급될 것이다.
-차근차근 진행 중입니다. 1년 계약을 했고, 추후 연장할 수 있습니다.
“만남이 길어지면, 오히려 배우 쪽에서 문제가 생길 수 있지 않습니까?”
수안은 미래의 변수까지 고민해야 했다. 새롭게 만난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다시 들어온다면 이것도 문제였다.
-여자 배우도 질이 나쁜 여자는 아닙니다. 상심한 남자를 달래주기 위해 그를 각별하게 생각하는 지인이 큰돈을 썼다고 알고 있죠. 또한 여성의 집도 미국의 중산층 이상입니다. 그저 배우의 꿈을 이루기 위해 LA에서 생활하고 있을 뿐입니다. 회장님의 존재를 알지도 못하니, 혹시나 두 사람 마음이 맞는다 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그럼 아예 계약 연장은 않기로 합시다. 이후의 일은 운명에 따르죠.”
그래도 술집 접대부보다는 낫겠지 싶은 생각이었다. 게다가 본인의 직계 가족도 아니지 않은가. 1년 후 다시 돌아와 깽판을 치든 국제결혼을 하든 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꾸준히 동향을 파악해 정기적으로 보고하고, 특이 사항이 발생하면 바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발생하고 나서 사후보고를 받고 싶지 않습니다. 문제가 생기기 전에 아서가 나서주길 바랍니다.”
그래도 사돈댁 식구라 위험에서는 보호해 줄 생각이다.
-이해했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누구보다 안전하게 생활하게 될 겁니다.
이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주환을 지키는 인물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주환이 엉뚱한 장소로 가서 위험을 당하지 않도록 멀리서 지켜줄 인물들이다. 수안은 이번 일에 많은 자금을 투입하고 있었다.
* * *
강운 자동차 임직원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는 날이다. 조립 라인 직원들은 혹시라도 부스러기가 바닥에 떨어져 있지는 않은지 두 번 세 번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녔고, 관리부서 직원들은 며칠 전부터 건물 내 외부 청소를 진행했었다.
회사의 대표도 다르지 않았다.
“공장 조립 라인 청소 상태는 확인했습니까?”
“예. 확인 끝났습니다. 언제 들어가셔도 깨끗한 생산 환경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프레젠테이션 리허설은 방금 전에도 확인했고….”
“회장님은 10분 후에 도착하신다고 합니다.”
“벌써? 얼른 내려갑시다.”
강운 그룹 회장의 방문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수안이 탄 차가 도착하자 사장을 비롯한 임원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가 차에서 내리는 수안을 향해 인사했다.
수안은 그중에 익숙한 얼굴에 먼저 인사를 건넸다.
“한 사장. 잠깐 사이에 반쪽이 됐네?”
예전에 대한 공조를 맡겼던 한중혁을 강운 자동차로 불러들이고 부사장으로 임명했었다. 그리고 이번에 강운 자동차 사장을 맡고 있던 인물이 자동차 그룹 부문 부회장으로 올라서며 사장으로 승진한 상태였다.
“하필이면 부회장이 미국으로 출장 갔을 때 오십니까. 덕분에 저만 바빴습니다.”
한중혁은 회장 앞에서 불만을 입에 올려도 될 정도로 수안과 친밀한 사람이었다. 더블 스타에서부터 함께했었고, 이후엔 대한공조에서 이현창의 두 아들을 보살핀 시간이 있었다.
“그럼 기화 차로 보내 줄 걸 그랬나? 거긴 더 바쁠걸?”
“살려 주십시오. 회장님.”
“하하하. 얼른 들어가자고.”
“예.”
이후 강운 자동차에서 야심 차게 준비 중인 신차 프로젝트가 회의실에서 공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