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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다로운 조건 (276/304)

까다로운 조건

수용은 D, E, F급 평가를 받고 퇴출 위기에 놓인 많은 팀장급 인사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는 천사나 다름없었다.

사장과 부사장도 팀장급과 마찬가지였다.

수용은 김 부사장을 교본 증권의 부족한 점을 찾아 보완하는 차기 경영자로 포장했고, 정 사장은 지금까지 훌륭히 교본 증권을 이끌어온 경영자의 표상으로 보고서를 작성, 본사에 보고서를 올려보냈다.

“저는 앞으로 강 전무님만 믿고 따르려 합니다.”

“김 부사장. 신 회장님이 멀쩡히 살아 계셔….”

“사장님. 교본 증권 유동 자금의 60% 이상이 강 전무님 소유입니다. 당장 지분을 매입해도 대부분이 강 전무님 몫으로 돌아갈 겁니다.”

“…그건 그렇지.”

워낙에 많은 돈이었다. 거기다 위기에 처한 임원들과 팀장급 인사들을 지켜 주며 신망을 얻어 사내 임직원들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김 부사장이 하는 말에 정 사장도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자신도 강 전무를 밀어 주고 싶은 심정이다.

“회사에 잡스러운 라인이 사라졌습니다.”

학연, 지연으로 연결되었던 라인들이 이번에 다 정리되어 버렸다.

신뢰를 쌓기는 어렵지만, 신뢰를 잃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믿고 있던 상사에게 낮은 인사 평가를 받은 부장들, 사장과 부사장에게 낙제에 가까운 인사 평가를 듣게 된 이사들은 기존의 인맥에 신뢰를 잃었다. 갈 곳을 잃은 이들이 모두 강수용의 품으로 들어간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렇다면 신뢰를 잃은 이사급 인사들이 아직도 회사에 남아 있을까? 수용은 모든 이들의 얘기를 종합해 가장 더러운 성질머리를 가진 이사들 몇 명만 쳐 냈다. 이들이 진짜 교본 증권을 좀먹고 있던 자들이었다.

잡스러운 라인이 다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서로 밀어주고 끌어 주던 라인이 다 잘려 버렸고, 그 라인이 단 한쪽으로 쏠렸습니다. 사장님도 선택하셔야 합니다. 신입니까, 강입니까?”

앞으로 신주미를 따를 것인지, 강수용을 따를 것인지 묻는 것이다.

“좋아. 나도 강 라인에 동참하지.”

정 사장의 마음도 이미 돌아서 있었다.

“훌륭한 선택입니다. 사장님. 교본 그룹보다는 강운 그룹이죠. 어차피 교본 그룹 4세대 오너는 강 씨가 차지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그 부분은 의심할 여지도 없는 일이지.”

교본 그룹 신 회장의 아들이 튕겨 나갔으니 남은 것은 신주미 상무이사였다. 신주미는 강운 그룹 강수용의 아내가 아니던가. 이후 그녀가 낳을 자식이 교본 그룹을 이어받게 될 것이다. 결국 강운 그룹의 자손이 교본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라도 유상 증자를 고려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벌써?”

“강 전무님 자금이 무려 50억 달러입니다. 환율은 계속 상승하고 있고, 교본 증권에서 이 모든 자금을 운용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래. 너무 큰 돈이지.”

“그것만으로 일부 자금을 지분으로 돌려야 할 이유는 충분합니다. 거기다 지분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도 아니고 회장님의 사위 몫으로 옮겨가는 것뿐이지 않습니까. 회장님도 회사의 자본금이 늘어나는 일을 환영하실 겁니다.”

“좋아. 그럼 계획을 세워 보도록 하세.”

“예! 사장님.”

* * *

수용은 인사 평가 이슈로 혼란했던 교본 증권을 단번에 휘어잡았고, 경영진의 크나큰 신뢰와 소속 직원들의 존경 속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교본 그룹 본사에서도 상당히 고무적인 성과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자기 능력이 이렇게 좋았어?”

주미는 오늘 관련 보고서를 받았지만, 믿기지 않아 몇 번이고 다시 보고서를 살펴야 했다.

“…….”

수용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난 그냥 나와 같은 사람들이 안타까웠을 뿐인데….’

쭉정이들을 향한 안타까움에 그들을 보듬어 안았다.

또한 쭉정이를 그대로 남겼으니 이들을 다시 알곡으로 만들 프로젝트가 필요했다.

글로벌 인재 육성 프로젝트.

‘교육을 받아야 사람이 바뀌는 거야.’

수용 스스로가 대학원을 나오면서 느낀 바가 있었기 때문에 실행한 프로젝트였다.

기존 팀장급 인사를 포함해 전 사원에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고, 벼랑 끝에서 살아남은 임직원들은 교육에 매달렸다. 지금 교본 증권은 다시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기 위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주미는 교본 생명 보험 전략실을 통해 확인한 보고서를 다시 떠올렸다.

남편이 교본 증권에서 받는 신뢰의 크기는 상상 이상이었다. 임원은 물론이고 팀장들을 비롯해 사장과 부사장까지 남편을 지지하고 있다는 정보였다.

특히 팀장급 직원들의 경우 수용의 지시라면 뭐든지 하겠다는 팀장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이러다가 나까지 교본 그룹에서 밀리겠어?”

교본 증권 직원들에게 열정이 돌아왔지만, 그 열정을 끌어올린 남자는 남편이었다.

“에이. 부부끼리 밀고 밀리는 게 어디 있어. 내 것은 전부 당신 것이나 다름없잖아.”

“흐흐흐.”

남편이 친오빠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걸 새삼 또 느낀다.

“당신은 몸이나 잘 챙겨. 우리 아기가 건강하게 잘 자라야지.”

수용은 주미를 뒤에서 안아 주며 이제 조금씩 불러오는 배를 쓰다듬었다.

“아직 초기잖아. 괜찮아.”

“초기니까 조심해야지. 여보.”

조심해야 할 시기는 벌써 지났지만, 걱정만 한가득한 예비 아빠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알았어요. 걱정 많은 예비 아빠.”

쪽.

뒤로 고개를 돌려 수용의 볼에 작은 입술 마크를 새긴 주미는 수용의 품에서 빠져나와 서류 몇 개를 들고 나섰다.

얼마 전 처가로 들어온 두 사람이다. 주미는 회장님께 보고할 일이 있으면 이렇게 집으로 서류를 가져오곤 했다.

“당신 덕분에 교본 증권은 신경 안 써도 되겠다. 아버지께 바로 보고할게.”

“나도 같이 갈까?”

“아냐. 당신은 씻고 쉬고 있어. 저녁 식사 준비되면 나와.”

* * *

“일전에 말씀드린 대로 교본 증권의 쇄신을 위해 전사 인사 평가를 진행했습니다. 일은 제가 시작했고, 강 전무의 부탁을 받아들여 중간에 일을 넘겼습니다. 저는 칼바람을 예상했는데, 강 전무가 훈풍으로 바꿔 놨습니다.”

“교본 증권 구조 조정이 끝나고 몇 년 지나지 않았다. 또 대규모 퇴직이 발생했다면 직원들이 동요했을 거야. 사위가 상당히 일을 잘하는구나. 최소한의 정리로 최대한의 효과를 냈어.”

강한 자극으로 쇄신을 진행하는 방법도 나쁘지 않지만, 강한 반발 또한 감당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모두를 포용하면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신 회장 본인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 인사 평가 이후에 진행한 프로젝트가 마음에 들었다.

“특히 글로벌 인재 양성 프로젝트는 교본 증권에 가장 필요한 일이었다. 정체된 회사 분위기를 타파하고 직원들의 열정과 능력을 끌어올릴 좋은 프로젝트야. 좋아. 정말 좋아.”

“저도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교본 증권을 휘어잡을 줄은 몰랐습니다. 정 사장과 김 부사장까지 강 전무에게 믿음을 감추지 않고 있습니다.”

“강운모 회장에겐 맏아들뿐이 아니었어. 두 딸에 이어서 막내아들까지…. 호랑이는 역시 호랑이 새끼를 낳는구나.”

강운모 회장의 자식이 하나같이 대단하다고 평가하는 신 회장이다.

자신의 아들은 고작 여자 문제로 집안과 틀어져 집을 나가 버렸는데, 사위는 들어가자마자 회사를 휘어잡으며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의 딸을 보물처럼 아껴주고 장인 장모에게도 깍듯하게 예의를 갖춘다. 딸과 사위가 집에 들어오고 나서는 집이 사람 사는 집처럼 느껴졌다.

‘이놈은 대체 어디 가서 뭘 하고 있는지….’

자신을 없는 아들이라고 생각하라며 집을 나갔지만,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

주미는 아버지의 표정 속에서 숨길 수 없는 상처를 엿볼 수 있었다. 바로 자신의 오빠 때문에 생긴 마음의 상처였다. 주미는 아버지의 고민과 걱정을 덜어 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너무 일렀다.

‘미안해요. 아빠.’

오빠 주환의 소식은 수안을 통해 들어 알고 있었다. 오빠와 그 여자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흥청망청 살고 있다고 한다. 아들이라 미리 물려받았던 건물을 처분한 돈으로 생활비를 충당하고 있으니, 몇 년은 한국 땅을 밟을 일이 없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평생 먹고살 수 있는 돈이었다.

주미는 품에서 작은 종이를 꺼내 아버지 책상 위에 올렸다.

“응? 이건 뭔데?”

신 회장은 작은 인쇄지를 받아 펼치고서야 그냥 종이가 아니라 사진임을 알 수 있었다.

“허허허. 콩알만 하던 녀석이 벌써 이렇게 컸어?”

주미가 산부인과에서 찍어온 초음파 사진이었다.

“무럭무럭 잘 크고 있어요. 의사는 멋진 옷을 준비하라고 했어요.”

“멋진 옷? 아! 아하하하. 그렇구나. 사돈댁에서 좋아하겠어.”

아기의 성별이 아들이라는 뜻이다.

기쁨으로 가득한 아버지를 보며 주미는 마음을 다잡았다.

‘생활비를 좀 보내야겠어.’

오빠가 미국에서 귀국할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생활비를 보조할 생각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평생을 먹고살 돈이라도 오빠가 흥청망청 쓰다 보면 쉽게 바닥을 드러낼 수도 있었다.

* * *

수안은 진동이 울리는 휴대 전화 화면에서 상대를 확인하고 바로 받았다.

“제수씨?”

-아주버님. 부탁이 있어요.

“하하. 얼마든지요.”

-일전에 오빠가 어디 있는지 알려 주셨잖아요.

“…그랬죠.”

-말씀하신 일을 진행해야 할 것 같아요. 기간을 늘리는 일이요.

수안이 최대한 기간을 늘리는 방향으로 진행할 수 있다고 했던 말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

-아주버님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원하는 일이니까요. 생활 자금만 조금 지원하고 싶어요. 그 외에 다른 부탁은 없습니다.

“이런 대화나 고민도 산모에게 좋지 않습니다. 오늘 이후로는 잊고 사세요. 따로 제게 돈을 보낼 필요도 없습니다. 제수씨는 이번 일과 무관한 겁니다. 안전을 염려할 필요도 없습니다. 잘 지켜드리겠습니다. 나중에…. 나중에 정말 돌아와야 할 때, 그때 다시 말씀하세요.”

-…감사합니다.

* * *

수안은 전화를 끊고 한동안 손톱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주미는 어떻게든 돈만 건네주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이런 일은 간단하지 않았다.

복잡한 계산이 필요했다.

톡톡.

‘지금 만나는 여자는 분명 사돈총각을 지옥으로 끌고 가겠지.’

남자든 여자든 상대를 잘 만나야 한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좋은 인생으로 함께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좋지 못한 배우자를 만나게 되면 둘 중 하나였다. 좋은 사람의 영향으로 상대가 교화되거나, 좋은 사람이 나쁜 물이 들어 똑같은 사람이 되거나….

“사돈총각이나 그 여자나 좋은 사람이 아닌데 예측이 무슨 필요야?”

둘 다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놔두면 해외에서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까지 따져야 했다. 특히 미국에서 돈 많은 동양인이 슬럼가를 활보한다면, 강도에게 총 맞고 죽기 십상이다. 그래서 고민이 깊어진다.

“젠장. 사돈총각이 만날 여자까지 새로 만들어 줘야겠네.”

지금 만나는 여자를 떼어 놓는 것에서 더 나아가 다른 여자를 붙여 줘야 했다. 그리고 그 여자 또한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 미국에 계속 머물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조건이 따라붙었다.

톡톡.

“흠…. 아무래도 아서의 도움이 필요하겠어.”

아서 마틴. 수안이 애용하는 미국의 사립 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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