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냉탕과 온탕(feat. 충성!) (275/304)

냉탕과 온탕(feat. 충성!)

“하아. 답답하네. 정말.”

주미의 한숨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다른 팀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미도 부장급이 실무에 조금은 뒤떨어지기 마련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들이 실무를 보던 때와 달리 시장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었고, IT 발전으로 업무 환경 또한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배우려고 해 왔다면 이렇지는 않았겠지.’

이유는 또 있었다. 회사에서 라인과 라인을 통해 서로가 밀어주고 끌어 주고 당겨 주며 그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주미는 몇몇 부장들과 더 얘기를 나눠 보다가 이건 아니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

주미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사람은 당연히 교본 증권의 인사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정 사장님?”

교본 증권의 우두머리인 정익태 사장은 푸르죽죽한 얼굴로 대답했다.

“…예.”

“인사는 만사라고 했습니다. 새로 채용할 투자본부 직원들은 제대로 뽑으세요. 내부 차출도 더 신경 쓰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러다 진짜 교본 증권 말아먹겠는데요?”

주미가 예의를 지키려 노력했기에 막말까지는 뱉지 않을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팀을 구분할 필요도 없어졌다. 회사 전부에 피바람이 불게 생겼다.

“사과는 제가 아니라 회장님께 하세요. 회장님은 정 사장님을 믿고 교본 증권을 맡겨 주셨을 텐데. 오늘 이 꼴을 직접 보셨으면 얼마나 실망하셨겠습니까.”

주미의 말이 이어질수록 팀장들의 이마와 등에선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예. 상무님.”

주미의 고개가 반대로 휙 돌아갔다.

“김 부사장님.”

“예, 예.”

“부사장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사 관리를 사장만 합니까? 저 팀장들이 팀장 승인받을 때 김 부사장님도 분명히 결재했을 겁니다.”

“…더 살피겠습니다.”

“이번에 본사 각 팀장과 실장을 포함해, 전국 교본 증권 43개 지점에서 일하는 지점장과 부지점장까지 다시 평가합니다. 사장님께 보고 전에 제가 직접 대면 평가를 하겠습니다. 대면 평가에서 형편없는 사람이 A를 받으면 서류에 사인한 사람들은 전부 사표 써서 제출할 각오를 하세요.”

주미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판단에 교본 증권의 인사 평가를 다시 진행한다고 공표해 버렸다.

라인이고 뭐고 다 잘라 버릴 방책이었다. 본인 목이 잘리게 생겼는데, 어떻게 자기 라인이라고 좋은 인사 평가를 줄 수 있겠는가. FM대로 다시 평가가 진행될 것이다.

“앞으로 제가 교본 증권과 교본 생명 그룹을 오가며 관리하겠습니다. 요즘 회장님 방문이 뜸하다고 긴장 놓지 마세요.”

“예! 상무님.”

주미가 회의실에서 일어나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그룹 회장이 회의실을 나설 때와 비슷했다.

“휴우.”

누군가의 한숨 소리가 기폭제가 된 듯이 회의실에 연이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안도와 탄식이 뒤죽박죽 섞여 버린 한숨이었다.

“하아.”

“후. 미치겠네.”

그리고 진정한 내리사랑의 시간이 돌아왔다.

정 사장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회의실에 남은 직원들을 보며 말했다.

“본부장 이상 내 방으로 집합.”

“…예. 사장님.”

이 사랑은 밑으로, 밑으로 전해질 것이다.

“사직서는 우선 받아 둘 테니 가져오도록.”

“…예.”

불어 닥칠 칼바람의 예고였다.

* * *

수용은 떨리는 마음으로 교본 증권으로 향했다.

오늘이 첫 출근이었다.

‘잘하자. 아버님이 사위를 든든하게 생각하실 수 있도록. 아내가 남편에게 실망하지 않도록!’

대학원을 졸업하고 부동산 포털과 통신사를 오가며 일했지만, 이번에 세 번째 직장까지 생겼다. 무척 부담스러운 일이다.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다 기업 총수의 딸인 주미의 남편 신분으로 회사에 들어가는 수용은 민망스러운 마음만 가득했다.

‘증권사 업무 경험도 없는 놈이 전무로 시작한다니 얼마나 고까울까.’

주미는 수안에게 약속한 대로 수용이 교본 증권에서 전무이사로 시작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놨다. 신 회장은 딸의 임신 소식과 사위가 교본 증권에 옮긴다는 거액의 자금을 확인하고 바로 수용의 전무이사 직급을 수락했다고 한다.

“사장님. 도착했습니다.”

“아. 그래. 김 기사는 회사로 가 봐. 필요하면 내가 다시 연락하지.”

“예. 사장님.”

수용이 교본 증권 로비로 들어가자 대기하던 임원들이 후다닥 앞으로 모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전무님.”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절 기다리셨습니까?”

“예. 전무님.”

“하하. 환영에 감사합니다. 좋은 분들이셨네요. 괜히 걱정만 많았습니다.”

수용은 기존 교본 증권 운용자산의 두 배를 입금한 교본 증권의 VVVIP고객이기도 했지만, 이젠 총수 일가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후계자의 남편이기도 했다. 정 사장은 전무가 아니라 사장으로 하고 공동 대표 체재로 가야 하지 않느냐고 제안했을 정도였다.

“교본 증권 정익태입니다. 부족하지만 회사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수용도 얼른 악수하며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아이쿠. 사장님까지 마중 나와 주셨습니까. 제가 가서 인사드리려고 했는데…. 오늘 전무이사로 발령받은 강수용입니다. 반갑습니다. 사장님.”

“저야말로 반갑습니다. 전무님이 오시길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사장실로 가셔서 차라도 하시겠습니까?”

“감사합니다. 하하.”

정 사장은 부드러운 인상의 수용을 보고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신 상무는 엄한 아버지 같고, 강 전무는 포근한 어머니 같은 느낌이야.’

둘의 성격이 이렇게 극명하게 갈렸다.

.

.

.

정익태 사장은 신주미 상무의 지시로 진행 중인 사내 인사 평가에 관해 보고하듯이 설명했고, 수용은 가만히 듣고 있었다.

“…해서. 최근 신 상무님의 지시로 전사 인사 평가를 진행 중입니다. 이번 평가를 통해 쭉정이를 걸러내고 알곡만 남겨 당사의 인재 수준을 크게 올릴 예정입니다.”

“쭉정이라….”

쭉정이라는 말이 심히 마음에 들지 않는 수용이다. 본인이 형 수안과 비교 대상에 오르며 항상 들었던 말이 아니던가.

“그 평가는 누가 하는 겁니까? 알곡이 합니까, 쭉정이가 합니까?”

인사 평가의 평가자도 쭉정이가 아니냐는 의심 어린 물음일까? 전혀 아니었다. 그저 쭉정이라는 말이 싫었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하지만 수용의 말을 듣는 정익태 사장은 당연히 경영진을 갈아치우기 위해 하는 말로 들렸다.

‘…이쪽도 만만치 않네.’

정익태는 부창부수라는 말을 떠올렸다. 푸근하던 첫인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최종 평가는 저와 부사장이 내리겠지만, 이사 선에서 중간 평가가 있을 예정입니다.”

“중간 결정은 제가 내리겠습니다. 함부로 인사 평가를 진행할 수는 없지요.”

쭉정이로 구분된 이들을 보살펴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자신도 쭉정이가 아니던가.

“하지만 그 부분은 신 상무님이 하시기로….”

수용은 임신 초기의 아내에게 이런 일까지 맡길 수 없었다. 그리고 가차 없는 아내의 성격상 불쌍한 쭉정이를 다 걸러내 불태워(FIRE: 해고) 버릴 것이다.

“아닙니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신 상무가 교본 증권 인사 평가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욕심은 이쪽이 더 많은 듯…. 누가 평가하든 크게 다르진 않겠네.’

“…예. 그렇게 하시지요.”

‘피바람이 더 거세게 불겠어. 이번 폭풍에서 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중에 정 사장은 인사 평가 결과를 받아 보고 생각보다 자신의 안목이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 * *

수용은 아내의 교본 증권 인사 평가를 자신이 이어받고, 인력지원실 이사까지 평가한 자료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화로 한 명씩 팀장들을 불러들였다.

“박 팀장님. 강 전무입니다.”

-넷! 전무님.

“지금 제 사무실로 와주시겠습니까?”

-옙! 지금 올라가겠습니다.

수용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은 박 팀장에게 직접 차를 건넸다.

“드시죠.”

“가, 감사합니다.”

수용 본인은 오늘 몇 잔이나 차를 마셔야 할지 몰라 아예 물만 떠왔다.

“제가 만날 사람이 많으니 잡스러운 인사치레는 생략하기로 합시다.”

“예.”

“본인 인사 평가 결과를 알고 계십니까?”

“모, 모릅니다.”

그저 자신이 따르던 금융본부장님이 잘해 주셨으리라 믿고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 갖다 바친 선물이랑 돈이 얼만데….’

본부장님이 부장급일 때부터 이어온 선물이었다. 많은 선물을 받아먹고 지금까지 항상 좋은 평가를 해 줬던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팀장까지 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보시겠어요?”

“…제가 봐도 됩니까?”

“그럼요.”

수용은 과거 3년간의 인사 평가 결과까지 포함된 박 팀장의 인사 카드를 펼쳐서 보여 줬다. 여기엔 상급자의 지난 인사 평가 결과와 부장, 사장들이 어떻게 자신을 평가했는지도 모두 기록되어 있었다.

“……!!!”

“참 이상하죠? 지금까지 매번 D, E만 주던 사람이 왜 갑자기 A를 줬을까요?”

“저도 무척…. 무척 궁금합니다.”

박 팀장은 금융본부장이 높은 평가를 해 줬으리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데이터는 반대의 수치를 보여 주고 있었다. 팀장으로 진급할 수 있었던 것도 부사장, 사장의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본부장의 뜻대로 되었다면 자신은 명예퇴직의 전철을 밟아야 했을 것이다.

“이번에 하급자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이사진과 경영자는 퇴출한다고 공식 천명했습니다. 짧게 말하자면 제대로 평가도 못 하는 놈은 사표 쓰고 나가라는 말입니다.”

박 팀장은 그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날 물 먹이려고 용쓰다가 안 되겠다 싶으니까 A를 줬구나. 받아먹을 거 다 받아 처먹고….’

“그래서 다른 팀장급의 인사 평가 자료를 과거와 비교하면 대부분 상당한 등급 하락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박 팀장님을 비롯한 일부 직원들만 오히려 반대의 결과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걸 제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박 팀장은 배신감에 치를 떨고 있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과거의 저는 인사 평가를 높이 받기 위해 상급자인 금융본부장님께 많은 뇌물을 건넸습니다. 이번엔 왜 받지 않나 했더니 몸을 사리느라 그랬나 봅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D나 E만 줬다고 하니 제 성의가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이었다.

“아. 뇌물.”

“또한 명절 때마다 선물 보따리를 안겨 드렸습니다. 인사 평가 시즌에는 추가로 봉투를 건넸습니다. 저 외에 많은 팀장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수용은 박 팀장의 개별 평가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뻔히 박 팀장이 보고 있는 와중이었다.

“매사에 솔직하고 인간적인 면이 돋보임. A등급 인정.”

“네, 네?”

자신도 같이 잘릴 각오로 금융본부장에게 비수를 날린 박 팀장이다.

“좋은 분이셨네요. 업무 성과도 상당히 좋으시고요. 지금까지 받은 낮은 평가를 오류로 생각하겠습니다.”

“…….”

“마음먹고 비밀을 털어놓으신 금융본부장 건은 잘 기억해 두겠습니다. 받아먹었으면 먹은 값을 해야죠. 아무래도 다른 놈에게 더 먹은 모양이죠? 상도의가 없는 사람이네요.”

박 팀장의 입술 끝이 슬슬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말 몇 마디로 눈앞의 전무이사를 파악할 수 있었다.

‘진실한 눈에 끝도 없이 호의적인 태도. 무작정 믿어도 되는 인간적인 사람이다.’

“…전무님.”

“예. 박 팀장님.”

“앞으로 잘 모시겠습니다.”

“어휴. 부담스럽습니다. 하던 대로만 하세요.”

이후로 수용은 낮은 등급의 평가를 받은 팀장들도 만나서 속을 풀어 주고 걱정을 덜어 줬다.

“팀장은 F등급이 나왔는데 말입니다.”

“사, 살려 주십….”

“이거 살짝 바꾸면 A+로 바꿀 수 있는데 보실래요?”

“……!!”

수용은 F라고 적힌 인사 평가 등급을 볼펜으로 쓱쓱 그어 A+로 바꾸는 신비로운 광경을 보여 줬다.

“사람이 일하다 보면 좀 틀릴 수도 있고, 도무지 일하기 싫을 때도 있는 거잖습니까. 사우나 몇 번 갔다고 인사 평가를 이렇게 주면 안 되죠.”

“…….”

지금 수용의 말이 진실인지 비꼬는 말인지 확실치 않았다.

자신이 사우나에 갔다가 걸린 게 몇 번인지 모른다. 항상 술이 문제였다.

그리고 자꾸만 빠르게 변해가는 사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뒤처진다는 느낌도 있었다. 그런 자신에게 A를 줄 리가 없었다.

“술 먹고 다음 날에 사우나 가는 게 또 당연하지 않겠어요? 그래야 몸 안에 흐르는 소주를 쭈욱 빼내고 다시 일을 하죠. 사람이 인정이 없네. 인정이 없어.”

수용의 표정은 진지하고 또 진지했다.

“법인 거래처 관리에 능하고 특히 인내심이 강해 조직 생활에 최적화된 인물임. 평가 결과를 A등급으로 수정.”

술을 자주, 많이 먹는 단점이 거래처 관리로 둔갑하고, 사우나에 가는 것은 인내심이 강하다고 포장했다.

‘용서받았다! 살았다!’

“감사합니다! 전무님!”

“…나중에 저랑 술이나 한잔합시다. 같이 사우나도 좀 즐기고. 저랑 가면 아무도 뭐라고 안 할 겁니다. 크크.”

“옙! 말씀만 하시면 저희 팀 전부 집합하겠습니다!”

“이렇게 좋은 분을 왜 자꾸 내보내려고 하는지 참. 또 봅시다.”

“옙! 전무님. 충성! 충성!”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