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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크

“…왜 나 빼고 둘이서만 말이 통해?”

“기본 예절 같은 거야.”

수용은 여전히 당당한 태도였다. 말로 표현하지도 않는 상대의 의중을 어떻게 읽는단 말인가.

“형은 평소에도 이러고 살아?”

“그나마 그룹 내에서는 덜하지만, 정치로 가면 더해. 특히 해외로 나가면 아주 복마전이다. 방금 대화는 기본 중에서도 기본이야. 이해하고 말고 할 것도 없어.”

겉으로 보이는 대화로 끝이 아니다. 행간에 숨겨진 진정한 의미는 사전적 의미와 전혀 다를 수도 있었다. 이번에도 수용과 형제들을 타박하는 말이었지만, 실제로는 너희 오빠와 우리 형제도 다르지 않았다는 의미로 보여 주기 위해 시작한 대화였다.

수용은 이를 이해하는 주미의 의식 수준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다.

“까마득하네.”

“나도 널 보면 까마득하다. 대체 언제 한 사람 몫을 하는 거냐? 네 누나들한테 들어 보니까 그때도 네가 말귀를 못 알아들어서 한참 고생했다던데?”

“…아오. 맞는 말이라 반박할 말이 없어.”

“크크. 넌 네 회사 경영하면서 더 성장하면 되니까 상관없어. 그나저나 제수씨.”

“예. 회장님.”

“지금까지 양보하며 살았다고 해도 미래까지 그럴 필요는 없겠죠?”

“…지난번 인사드리러 갔다가 집에 돌아와서 회장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저도 회사에 들어가 일을 배우기로 했습니다.”

“하하. 잘됐네요.”

“아버지도 흔쾌히 허락하셨습니다. 앞으로 그룹 전략실에 들어가서 강운 증권, BE 인베스트먼트와의 협력을 끌어내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수용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리려 했지만, 잠시 생각한 다음 말을 삼켰다.

‘결혼하면 우리 집에서 돕는 게 당연하지.’

재벌가와 재벌가의 결합이 아니던가. 다른 재벌가의 결합도 마찬가지였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넘어선 기업과 기업의 만남이기도 했기에 서로의 사업에 도움을 주며 확장을 이어 가는 경우가 많았다.

“하하하. 우리 제수씨가 이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가만있을 수 없겠네요.”

수안까지 긍정적으로 대답하니 수용은 더 나설 필요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형…. 헤헤.”

그래도 수용은 조금 민망했다. 형이 또 도움의 손길을 건넸기 때문이다. 강운 그룹의 협력은 오로지 형의 힘으로만 가능한 일이었다.

“오늘 두 사람을 부른 것도 이것 때문이었어. 그러니까 네가 민망한 얼굴을 하고 있을 일도 없다.”

“엉? 이것 때문에 불렀어?”

“예?”

주미도 당연히 몰랐던 일이다.

“제수씨. 회사에 교본 그룹과의 협력을 지시해 놨습니다. 다만 그 창구를 제수씨에게 일임하기로 사전에 결정했죠. 그래서 오늘 제수씨가 회사로 들어가는 방향을 제시하려고 했는데, 얘기하기도 전에 먼저 제수씨에게 부탁을 받았어요. 하하하. 요즘 일이 너무 잘 풀려서 제가 할 일이 없습니다.”

“…제 욕심을 들킨 것 같아 민망합니다.”

수용으로 인해 강운 그룹이라는 배경이 생겼고, 이를 활용해 그룹에 발을 들인 참이다. 그리고 배경을 십분 활용하기 위해 선을 넘으며 대차게 질렀건만, 상대는 그것조차 이해하며 준비하고 있었다.

“제수씨도 자신의 몫을 되찾아야죠. 배경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괜찮아요. 더 당당하게 요구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말씀대로 꼭 되찾아오겠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이제 제수씨 일은 곧 가족의 일이기도 합니다. 강운 그룹 가족 말입니다.”

“네.”

“와. 나 또 대화의 흐름을 놓쳤는데 말이야…. 주미가 뭐 잊어버렸어?”

이번엔 주미가 붉은 얼굴로 설명을 곁들였다.

“내가 오빠를 만나면서 강운 그룹이라는 배경이 생겼고, 그 배경을 활용해 내 몫, 그러니까 교본 그룹에서 내 위치를 차지하려고 회사에 들어간다는 말이야. 거기다 난 회장님과 사전 논의도 없이 강운 증권, BE 인베스트먼트와의 협력을 끌어내겠다고 말씀드렸는데, 회장님은 이미 예상하고 계셨어. 파악을 넘어서 준비까지 끝내 놓으셨다니 내 말장난이 민망할 수밖에. 게다가 우리 쪽에서 뭘 내줄 것도 없는 상황이잖아.”

말 그대로 말장난 수준이었다.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함부로 꺼내기 미안할 말이었지만, 얼굴에 철판을 깔고 말한 참이다. 도움은 원하지만, 내줄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더 민망한 것은 상대가 자신의 모든 상황을 짐작하고 받아 준다는 점이었다. 지금의 설명도 자신의 미안함을 부각하려고 일부러 자세하게 설명했다.

“…인생 참 복잡하게 산다.”

“오빠가 너무 생각 없이 산다고 생각하진 않고? 아까 회장님 말씀대로 제대로 회장님께 대차게 깨져 봤어야 이해했을까?”

“…….”

수용은 배신감을 느낀다는 얼굴로 주미를 보고 있었다.

“그 부분은 제수씨가 뛰어난 것으로 합시다. 제가 수용이를 매번 끼고 돌아서 얘가 풀어질 대로 풀어졌어요.”

“회장님이 얼마나 잘해 주셨을지 짐작됩니다. 회장님이 제 오빠셨다면 저도 수용 씨와 같았을 겁니다.”

아까의 배려를 돌려받는 수안이다.

“하하하. 그건 그렇고 제수씨는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습니까.”

회사로 들어가는 걸로 끝이 아니다. 성장시킨 회사를 남의 입에 넣어준다면 강운에서 협력할 이유가 없었다. 이미 자신의 몫을 찾는다고 했지만, 정확한 목표를 확인하고 싶었다.

“아버지는 제가 생각지도 못한 2할을 입에 올리셨어요. 아시겠지만, 이것도 회장님이 선물을 주신 덕분입니다.”

주미는 회사 지분 20%를 가져올 수 있다는 답을 했다. 선물이란 세기 통신을 의미했다.

“아휴. 아닙니다. 그 정도면 조금만 더 가져와도 확보하겠네요? 생각은 있는 거죠?”

경영권을 확보한다는 뜻은 온전히 그룹을 이어받는다는 뜻이고 그와 같은 목표를 갖고 있냐는 물음이기도 했다.

“오빠보다는 제가 낫다고 생각해요. 요즘 열심히 공부 중입니다. 다행히 아직 머리가 굳지 않아서 배움이 어렵진 않습니다.”

주미의 확고한 목표가 드러났다. 경영권을 오빠에게 양보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좋습니다. 저도 제수씨가 명석하다는 것을 확인하니 믿음이 생깁니다. 우리 함께 진행해 봅시다.”

수안은 주미가 교본 생명 그룹의 모든 것을 이어받도록 돕겠다는 확답을 했다.

“말씀만으로 너무 큰 도움입니다. 벌써 다 끝나 버린 기분입니다.”

“오랜 기다림이 필요할 겁니다. 천천히 갑시다. 마음 단단히 먹고 있으세요.”

“예. 회장님.”

그 와중에 수용은 또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툴툴거렸다.

“…아놔. 난 왜 불렀냐고. 나만 빼고 왜 둘이서만 얘길 하는 거야? 나도 좀 알자.”

“…….”

“…….”

수안과 주미가 수용을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중에 제수씨가 설명해 주는 걸로 합시다.”

“예. 회장님.”

“밥이나 먹자. 수용아. 든든하게 먹고 가서 박박 굴러라.”

“열심히 해. 오빠.”

“이번엔 얘기 안 해 주려고?”

“밥이나 먹어. 형 입 아프다. 언제까지 설명하니?”

“…끄응.”

* * *

수용은 수안과의 식사가 끝난 후에야 주미의 입을 통해 일의 전말을 파악했다.

“아버님이 지분을 20%나 내주기로 했고, 넌 교본 생명 보험 경영자가 되고 싶다고? 게다가 형은 그런 널 돕고? 네가 회사에 들어간다는 말이 언제 그렇게 커진 거야?”

“…이걸 일일이 다 설명해 줘야 알아들어?”

“그 말만 갖고 어떻게 알아? 형은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냐고 뜬금없이 물었고, 넌 갑자기 아버님이 2할을 입에 올렸다는 뚱딴지같은 대답을 했었잖아. 그리고 형이 다시 조금만 더 가져오면 확보한다는 이상한 말을 하니까 넌 오빠보다 낫다는 식으로 대답했는데…. 이게 어떻게 그렇게 연결되냐?”

“그게 그 말이거든요?”

“젠장. 무슨 암호도 아니고, 왜 한국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는데?”

“오빠가 욕심이 없어서 그래. 기업가 자제들 아무나 들었어도 다 알아들었을 거야.”

“하. 진짜 까마득하네.”

“오빠는 지금이라도 경영 수업을 좀 받아야겠다. 예전에 안 받고 뭐 했어?”

“그땐….”

놀았다. 대학에 다닌다는 핑계로 펑펑 놀았다.

“놀았지? 그래 오빠 좀 논 것 같더라. 몸부터가 늘어졌었지. 한국대 다니면 다야?”

“이익!”

재수로 입학한 다음 놀기만 했다. 대학교에 다니면서 최고 몸무게를 기록하기도 했었다. 매일 운동이라곤 하지 않고 술자리만 찾아다녔으니, 살이 붙을 수밖에 없었다.

“표정 보니까 사실이네. 그때도 술배였지? 배만 볼록해서는….”

“그, 그만 때려!”

팩트로 얻어맞고 있었다.

“오빤 더 맞아도 됨. 그때 오빠의 게으름과 무관심이 오늘의 오빠를 만들었어. 강운 그룹 아들이 대학에 다녔으면 당연히 경영도 배웠어야지!”

“아악!”

“지금이라도 경영자 수업을 받아야 한다니까. 세기 통신은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면 끝이야? 오빠도 들어가서 전반적으로 일을 배워야 지시를 하지! 계속 부동산만 붙들고 있을 거야? 부동산이랑 통신사는 체급 차이가 어마어마하잖아. 재무제표는 볼 줄 알아? 설마 상법도 안 배운 거야? 미쳤어. 정말.”

“으으….”

수용은 귀에 꽂히는 주미의 잔소리를 견디기 힘들었다.

“당장 경영 대학원이라도 들어갈 생각을 하시라고요! 전문가 수준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다는 몰라도 알아듣기는 해야지. 그러다 회사 직원들이 작성한 보고서도 못 알아보는 수가 있어. 눈 뜨고 코 베이는 거 순식간이야. 어딜 도망가? 이리 안 와?”

“살려 줘….”

주미는 도망가는 수용에게 카운터를 날렸다.

“나중에 우리 애가 생겼다고 상상해 봐. 오빠는 어떤 아빠가 될 건데?”

수용의 몸이 덜컥 멈췄다.

“……!”

아직 생기지도 않은 아이지만, 부모가 된다는 책임감은 무척 무거웠다.

“오빠도 우리 아이에게 무능력한 아빠가 되고 싶진 않잖아. 그치?”

“…새삼 느끼는데, 너 우리 형이랑 막상막하다.”

외통수. 자식 얘기까지 나왔으니 뒤로 물러설 곳이 없었다.

“나 같은 게 어디 회장님과 비교나 되나? 오늘 겪어 보니까 오빠가 포기하길 백번 잘했구나 싶었어.”

오늘 직접 만나고 얘길 나눠 보니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오빠가 강 회장님께 감히? 어림도 없지.’

그래도 자신의 남자는 아직 완성되지 못한 그릇일 뿐이었다. 상황을 판단하는 능력이 부족하면 키워 주면 될 일이다. 전문 지식이 부족하면 배우면 된다. 누가 뭐래도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였다.

“오빠가 그래도 본능적인 감각은 좋다니까? 어디 부동산이 뜰지 감으로 아는 사람이잖아. 이제 다른 걸 키우면 돼.”

“좋아. 오케이. 시작할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 않는가.

“흐흣. 난 사랑하는 오빠만 믿을 거야. 내가 오빠를 얼마나 믿는지 알지?”

“응! 나만 믿어!”

수용은 주미의 손바닥 위에서 춤추는 인형이나 다름없었다.

“우쭈쭈. 우리 수용이가 최고네.”

주미가 엉덩이를 두드리며 말하자 수용은 정색하며 손을 치웠다.

“…오빠 놀려? 하지 마라.”

“화났쩌염? 주미 때릴 꼬얌?”

주미는 두 손을 모으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수용을 올려 봤다. 당연히 수용은 그녀의 표정에 얼굴이 풀려 버렸다. 그리고 주미를 바라보는 눈빛은 기이한 열기로 바뀌었다.

“…주미 혼내줄 몽둥이가 요깃네? 마이 컸다 아이가.”

“…오, 오빠?”

아직 젊은 두 사람이다. 처음 만나고 고작 1년 남짓인 젊은 연인은 작은 자극에도 불꽃이 튀기 마련이었다. 둘은 서로의 눈을 보며 고갯짓했다. 밖으로 나가자는 뜻이다.

둘은 조용히 식당에서 사라졌다.

오늘은 수용이 혼자 우뚝 서 있지 않아도 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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