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Daughter (270/304)

K-Daughter

주미는 가족 간의 대화를 마치고 어머니를 따로 만나고 있었다. 아들 걱정이 가득한 어머니가 주미를 따로 부른 것이다.

“주미야. 이번엔 네가 양보하면 안 되겠니? 네가 전략실을 포기하면 아버지도 네 오빠를 다시….”

“엄마는 내가 회사 지분을 아예 포기했으면 좋겠어? 회사에 들어갈 생각도 하지 마? 그냥 집에서 남편 밥이나 해 주는 여자로 살다가 죽어?”

“…그게.”

딸에게 함부로 포기하라 마라 할 수는 없는 일이라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지금까지 주미가 주환을 위해 양보한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전략실을 포기하는 것은 회사를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었다.

회사에 들어가지 말라는 뜻도 아니었다.

옛날 여자들처럼 남편만 챙겨 주며 살라는 말도 아니었다.

그저 지금까지 그래 왔듯 맏아들의 일을 쉽게 해결하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항상 뒤로 한발 물러서 주던 딸이 오늘은 양보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아들이라서 회사 물려주고 싶어? 가능하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네?”

“불가능하긴 뭐가 불가능하니?”

“미안하지만 엄마는 회사에 아무런 영향력도 없어. 아버지 선택이 모든 것을 좌우해.”

“…….”

회사에 영향력이 없다는 말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빠가 회사 맡으면 진짜로 잘 경영할 것 같아? 엄마는 정말 그렇게 생각해? 엄마가 지금까지 키웠으니 잘 알 것 아냐?”

“…….”

자신이 낳은 아들이고 키워왔지만, 솔직히 회사를 훌륭하게 성장시키리라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보통 정도는 하지 않겠니?”

다만, 밑에서 유능한 직원들이 받쳐 주면 평균은 하겠다 싶은 마음이다.

“정말? 회사 안 말아먹고 꾸려나갈 것 같다 이 말이지?”

“주미 네가 강운 그룹 통해서 도와주기만 하면 성장도….”

강운 그룹에 시집갈 딸이 도와주면 회사의 발전이야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엄마의 말에 주미는 꼭지가 돌기 직전이다.

“하! 내가 왜? 나보고 교본 그룹을 포기하라고 해 놓고? 엄마. 내가 교본 그룹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상 교본 그룹에 해 줄 것은 아무것도 없어. 땡전 한 푼도 없다고!”

“넌 말을 해도…. 왜 그렇게 극단적이니?”

주미의 불만이 터지기 시작했다.

“내가 뭐가 모자라서 쭈구리로 살아야 하는데? 회사 성장시키면 내 몫을 찾는 게 당연하잖아. 엄마는 아들만 자식이야? 나도 엄마 자식이야! 나도 절반의 권리가 있다고!!”

“물론 너도 사랑하는 내 딸이야. 하지만 기업 경영이라는 게 쉬운 게 아니잖아. 그래도 네 오빠가 집안 장손인데….”

주미는 장손이라는 말에 더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오빠가 나중에 부모님 모시고 살기라도 할 것 같아? 엄마는 지금까지 키웠으면서도 아들 성격을 몰라? 매사에 저밖에 모르고 항상 이기적인 사람이었어. 엄마가 그렇게 키웠잖아!!”

“…….”

전부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었다.

“오늘도 봐. 아버지한테 한 소리 들었다고 바로 밖으로 나가 버렸어. 엄마가 걱정할 거라는 건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야. 엄마를 생각했으면 들어와서 사과 정도는 했어야지! 게다가 여동생이 결혼할 남자 집에서 환영받고 왔다는데, 축하 인사 한마디도 없었어!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어? 내가 왜 이런 오빠를 위해 양보하고 희생해야 하는데?”

항상 딸보다 아들을 먼저 챙겨왔고 아들은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아들이 이기적으로 자란 것은 자신의 탓이 컸다.

주미는 조용히 입을 다문 어머니를 보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대화를 시도했다.

“…들어 봐 엄마. 수용 오빠는 집안 맏이도 아니고 막내야. 집안에 책임감을 가질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야. 그리고 본인 회사도 있지만, 거대한 통신사까지 물려받아서 회사를 꾸려나가게 될 거야.”

“그렇겠지….”

“내가 결혼하면 잠깐 강운에 들어가 살기는 하겠지만….”

주미는 자신의 계획을 어머니께 드러냈다.

“나와서는 아빠랑 엄마를 내가 모실 거야. 내가 우리 집안 기둥으로 살 거야.”

“…….”

아들에겐 이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사랑으로 키우지 못한 딸이 부모를 생각해 주고 있었다.

“우리 집도 강운 그룹처럼 포근하고 따뜻하게 만들고 싶어.”

시댁 칭찬은 입에 발린 말인 줄 알았더니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강운 그룹 집안이 그렇든?”

힘없이 묻는 어머니의 말에 주미가 말했다.

“엄마가 오빠만 챙기지 않았으면, 우리 집도 그렇게 살았을 거야.”

“…그간 미안했다. 주미야. 다 엄마 탓이야.”

“…나 엄마한테 처음 사과 들었어.”

“…….”

“하지만 또 듣고 싶지 않아. 엄마는 죽을 때까지 사랑하는 내 엄마야. 그러니까 앞으로 미안하다고 하지 마. 그냥 내가 엄마한테 해 주는 거 당연하게 생각하고 받아 줘.”

“크흥. 내가 헛살았구나.”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지만, 덜 아픈 손가락은 있었다. 딸보다 아들에게 많은 사랑을 퍼 주고 아껴왔지만, 사랑의 보답은 딸에게서 받고 있었다.

“…엄마 울지 마.”

딸이 다가와 안아 주는데도 미안한 마음만 가득했다.

“흐윽. 그래…. 큼. 그래.”

아들에게 해 주는 것의 반만큼만 했어도 이렇게 미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맛있는 것 좋은 것은 전부 아들에게 몰아주고 딸에겐 양보와 희생만을 강요했었다. 아들이 집안 전부라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오늘에서야 자식이 둘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사랑하는 내 딸. 예쁨만 받아도 아까운 내 딸을….’

딸에게 주지 못한 사랑이 후회로 변해 가슴을 후벼 파는 날이다.

“엄마. 기분 전환할 겸 나랑 나가자.”

“곧 저녁 시간인데 가긴 어딜 가니?”

“아빠는 아줌마들이 알아서 챙기라고 해. 엄마는 예비 사위랑 바람 좀 쐬러 가자고.”

“강 서방?”

“내가 부르면 재깍 나온다고 했어.”

수용은 주미의 호출에 곧장 집 앞에 차를 대기시켰고, 예비 장모님과 예비 신부를 태우고 운전기사 노릇을 했다.

“어머님. 양평에 작은 별장이 있습니다. 그리로 모시겠습니다. 작은 개울이 근처에 있어서 거기서 쉬시면 마음이 편안해지실 겁니다.”

“호호. 그래요.”

“저녁은?”

주미의 말에 수용은 근처 식당을 입에 올렸다.

“해물 좋아하세요? 별장 근처에 해물찜 잘하는 곳이 있습니다.”

“엄마가 해물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았담?”

당연히 주미가 미리 문자로 알려 줬으니 아는 것이다.

“제가 바로 예약 잡아 놓겠습니다.”

어머니는 딸과 사위에게서 관심과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껏 아들에게서 받아 보지 못한 대우였다.

* * *

“축하드립니다. 회장님.”

“큭. 내가 결혼하는 것도 아닌데 축하까지야.”

주미에 관한 소식은 전략비서실의 배영성도 익히 파악하고 있었다. 집에 인사차 다녀갔다는 소식에 축하 인사를 건넨 것이다.

“회장님은 금융계와 인연이 깊으신 것 같습니다.”

“그러게. 교본 그룹이 금융계에 자리잡고 있으니까 좀 키워 주면 국내 금융계도 강운이 틀어쥐겠어.”

“지원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핵심 투자 리포트만 일부 공유해도 상당한 도움이 될 겁니다.”

“제수씨는 나름대로 욕심도 있어 보였어. 강운이라는 배경이 생겼으니, 지금까지처럼 가만있지는 않겠지.”

수용을 통해 세기 통신을 넘겨주는 데 감사 인사를 들으며 주미의 반응도 전해 들었다. 계산이 빠르고 여느 재벌가 자식들처럼 자신의 몫을 잘 챙긴다는 말에 수안은 기꺼운 마음이었다.

‘수용이 녀석 배우자라면 욕심도 있어야지.’

예전에 욕심 많던 녀석이 정신 차리고는 양보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아내 될 사람이라도 욕심이 있다면 그것만으로 배우자 합격이다.

“교본 그룹에 막 퍼 주지 말고 제수씨를 통해서 진행하면 어때? 어차피 제수씨도 강운 그룹 사람이잖아.”

주미가 회사에서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강운 그룹과 교본의 협조 체계가 틀을 갖춰나갔다.

“강운 그룹의 금융권 영향력이 확대되겠죠. 결국 그분이 상당한 직위를 차지하시겠군요.”

교본 그룹에서 영향력을 가지려면 주미의 소속이 교본 그룹 내에 있어야 했다. 외부인으로서 돕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우선 교본 그룹에 제수씨가 들어가는 게 우선이겠네. 내가 먼저 논의하고 얘기할게. 협조는 그다음이야.”

“예. 회장님.”

* * *

수용은 형의 호출에 주미와 함께 약속 장소에서 기다렸다. 출입구부터 일반 손님과 VIP 손님이 분리된 식당이었다. 보안이 확실한 장소라 선택된 곳이다.

“강 회장님이 우릴 왜 따로 부르셔?”

“그러게. 나도 짐작이 안 가네.”

“세기 통신은 감사하다고 말씀드렸지?”

“물론이지. 자기도 고마워했다고 얘기했어.”

“난 오늘 다시 감사하다고 말씀드릴게. 괜히 이제 와서 뒤집히면 그렇잖아.”

“형한테는 머리 쓸 필요 없어. 세기 통신 도로 가져간다고 이상한 일이 아니야.”

수용은 세기 통신을 주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본래 자신의 회사가 아니었다.

“…그렇게 흐리멍덩하게 살면 손에 쥔 것도 다 잃는 법이야.”

“에효. 그런다고 뒤집힐 일이 안 뒤집히겠어?”

수용의 말이 틀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감사 인사로 얻을 것은 있었다.

“미안한 마음이라도 생기시겠지. 그럼 비등한 뭔가를 챙겨 주실지도 모르잖아?”

“잔머리일 뿐이야. 난 형한테만큼은 머리 안 썼으면 좋겠다 싶어서 그래.”

“오빠는 그냥 가만있어. 감사 인사 정도는 할 수 있는 거니까.”

“…그래. 마음대로 해라.”

둘의 대화가 끝나고 조금 뒤에 수안이 안으로 들어섰다.

드르륵.

“오셨어요. 회장님.”

“왔어. 형.”

“밖에서 보니 더 반갑네요. 하하.”

식사가 나오기 전에 주미는 인사부터 건넸다. 수용과 얘기한 그 내용이다.

“수용 씨 통해서 세기 통신을 결혼 선물로 내주신다고 들었어요. 일전에 인사드리러 가서는 차마 말씀을 못 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수안은 멋쩍은 얼굴로 세기 통신을 인수한 이유를 밝혔다.

“세기 통신은 원래 이 녀석 주려고 인수했습니다.”

“처음부터요?”

“본래 주인한테 돌아가는 셈이죠. 감사 인사까지 받을 일이 아닙니다. 더 주지 못해 미안할 뿐이죠. 마음 같아선 조금 큰 계열사를 떼어 주고 싶은데, 아버지가 지켜보고 있어서 저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아….”

주미는 이런 얘기를 전혀 듣지 못했다.

“형이 날 주려고 세기 통신을 인수했었어?”

“백부님도 통신사 경영하지만, 알아서 잘 굴러가잖아. 네가 평균만 해도 알아서 잘 굴러갈 것 같아서 너 주려고 했지.”

“처음엔 고마웠는데, 듣다 보니 욕으로 들린다?”

수용이 무능력하니 알아서 잘 굴러갈 회사를 준비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크흐흐. 지금은 아니지. 네가 잘만 운영하면 한송 그룹 넘어서는 것도 금방이야.”

주미는 애초에 되돌릴 가능성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기 통신은 애초부터 수용의 몫이었다.

수용의 말대로 괜히 머리를 굴렸다 싶은 생각에 절로 속마음이 드러났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강 회장님은 저희 오빠랑은 너무 다르시네요.”

“형제는 욕심이 좀 있나 봅니다.”

“오빠는 살면서 단 하나도 양보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저도 다 포기하고 살았….”

“저런. 욕심이 많은 분이신가 보네요. 그간 제수씨가 마음고생 많으셨겠습니다.”

“…제가 괜한 얘길 드렸습니다. 잊어 주세요.”

주미는 집안에 흠 잡힐 얘길 하는 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습니다. 이 녀석도 예전에 저를 제치려고 했는데요. 뭐.”

“네에? 오빠가요?”

세기 통신 받아 오는 것도 민망하게 생각하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예전엔 강 회장님을 견제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넘어서려 했었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다.

“에이. 형. 옛날 얘긴 또 왜 꺼내고 그래.”

“……!”

수용까지 인정했다면 믿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사실이라는 뜻이었다.

“이미 지난 일이니까 얘길 하지 인마. 너 그때 수진이 수현이랑 쎄쎄쎄 하고 있었잖아.”

“에헤이. 그만. 그만.”

주미가 듣는 와중에 나오는 과거의 이야기에 수용은 수안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치기 어린 젊은 시절의 흑역사였다.

“크흐흐. 이제는 그것도 추억이잖냐.”

과거 경영권 싸움에서 수안이 밀릴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미 당시에도 BE 인베스트먼트를 소유, 경영하던 수안이다. 국내에서 아무리 발버둥을 쳐 봤자 해외 자금 한 방이면 끝날 일이었다.

“형 눈엔 애들 소꿉장난으로 보였겠지.”

“정답. 흐하하. 고만고만한 녀석들이 사회 생활도 안 겪어보고 뭘 어째? 내가 아니라도 아버지가 먼저 아셨을 것이고, 잘하면 너희들 홀딱 벗겨서 내쫓았을걸?”

민망한 수용은 누나들을 탓했다.

“에효. 누나들은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날 부채질해서는….”

“너희들하고 사이 틀어질까 봐 내가 미리 나선 게 천추의 한이다. 그때 너희를 내버려 뒀어야 했는데…. 얼마나 날 힘들게 할 수 있을지 두고 봤으면 너희들 사회 생활 경험치도 올라가고 좋았을 텐데 말이야.”

수안과 형제들의 과거 얘기에 주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말씀 고맙습니다. 회장님.”

“우리 제수씨는 머리가 좋아서 회사에서도 일을 잘하겠는데요?”

순간 이어지지 않는 대화에 수용이 궁금한 얼굴로 물어 왔다.

“형제 얘기하다가 갑자기 주미 머리 좋다는 말이 왜 나와? 감사 인사는 또 왜 나오고?”

“…이해가 안 되냐?”

“응.”

“당당하게 긍정하네.”

“쉽게 설명 부탁해.”

“내가 제수씨 민망하지 않게 우리 형제 허물을 들춰 줘서 고맙다는 말이잖냐. 제수씨는 내가 왜 말을 꺼냈는지 다 이해했으니, 고맙다고 말했고.”

주미가 오빠의 허물을 얘기하고 아차 싶은 얼굴이라 일부러 수안이 과거의 일화를 꺼낸 것이다. 형제간의 불화는 어디에나 있으니 흠이라고 생각할 필요 없다는 배려였다.

“아….”

이제야 이해한 표정의 수용을 보고 수안은 주미에게 말했다.

“수용이가 이렇습니다. 앞으로 제수씨만 믿을게요.”

“기대에 부족하실 수 있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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