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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한 출사표 (269/304)

당당한 출사표

무사히 인사를 마치고 집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이다.

“정신없었지? 집안사람들 다 모이면 항상 이래.”

“강 회장님이 오빠랑 세 살 차이라고 안 했나? 애가 언제 저렇게 컸어?”

“형이 결혼이 좀 일렀거든. 아! 너랑 내가 예전에 만났을 즘에 결혼했어.”

“내가 중3이었을 때 결혼했으면 첫째가 초등학교 2학년인 게 이상하진 않네. 애도 셋이나 되고…. 부럽다.”

아직 결혼도 못 했는데, 누군 애가 셋이나 있으니 부럽다는 감정이 먼저였다.

“네가 하린이를 너무 예뻐해서 큰누나랑 매형이 기분 좋은 것 같더라.”

“…….”

주미는 수안의 아이들에게 다가갈 용기가 없어서 하린이만 안고 있었을 뿐이다.

“으응. 아기들은 다 예쁘잖아.”

“작은누나는 좀 새침해서 다가가기 어렵지?”

수진의 가족들만큼 수현의 가족을 살갑게 대하지 않아서 하는 말이다.

“강 회장님 가족이랑 수현 언니네 가족은 좀 부담스럽더라고.”

“두 집은 시간이 좀 필요하지. 형수님이랑 둘째 매형이….”

연예계에 몸담고 있는 두 사람에겐 다가가기 어려운 뭔가가 있었다. 그나마 아현의 경우엔 오래 같이 살면서 적응이 끝났지만, 수현과 결혼을 앞둔 둘째 매형은 아직 함부로 말을 걸기 어려웠다. 주미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그보다 오빠는 나현이한테 껌뻑 죽더라? 내 주말 데이트도 나현이한테 밀린 것 같던데?”

“아….”

본래 주미와 만나기로 했었던 주말 약속을 이제야 기억해 냈다.

“주미도 같이 가면 나현이가 좋아하지 않을까?”

“…나중에 우리 아이한테도 그렇게 해 줄 거지?”

“당연하지. 우리 아이가 태어나면 조카가 무슨 필요야. 우리 아이가 최고지.”

“내가 꼭 기억하겠어.”

수용은 미래에 생길 주미와의 아이를 생각하니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강해졌다.

“허흠. 어쨌든 오늘은 시간 되지? 이따 전화하면 바로 나와. 차 빼놓을게.”

“…미안. 집에서 부모님이 기다리고 계셔서 오늘은 힘들겠어.”

“아. 또?”

주미가 집에 들어가고 나서는 데이트 한 번이 쉽지 않다.

“내일 보자. 알았지?”

“오늘 우리 집에 인사까지 한 마당에….”

“오빠도 집에 있다고 했단 말이야. 이번에 할 얘기가 있어.”

“오오.”

“그러니까 이해해 주라. 응?”

“중요한 일이 있었네. 오케이. 지원군 필요하면 바로 연락해. 집으로 뛰어갈 테니까.”

“큭. 벨 소리를 최대로 키워놓도록.”

“옙!”

주미는 든든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갔다.

* * *

집에 돌아오는 주미를 환영하는 두 사람이다.

“다녀왔니?”

“어서 오너라.”

“잘 다녀왔어요. 다들 좋은 분들이세요.”

“그럼. 강운 그룹이야 어디서든 알아주는 집안이지 않겠느냐.”

“나도 사모님을 몇 번 뵈었는데, 온화하고 품이 넓은 분이셨어.”

“네. 저도 좋게 봐주셨어요. 얘기도 많이 나눴고요.”

“…시집간다니까 좋아 죽겠냐?”

삐딱한 말은 주미의 오빠 신주환이 한 말이다.

“좋기야 좋지. 덕분에 사회 생활도 시작해야겠다는 마음도 들었어.”

주미의 말에 아버지도 긍정했다.

“그렇지. 여자가 결혼한다고 집안 살림만 하는 시대가 아니지.”

“맞아요. 강운 그룹 보니까 다들 결혼해도 자기 사업을 하더라고요. 회장님 사모님도 여전히 연예계 활동하시잖아요.”

“강운 그룹이 의외로 관대한 면이 있긴 해.”

“그래서 아버지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저 교본 생명 보험으로 들어갈까 해요. 허락해 주세요.”

“……!!”

오빠의 놀람에도 아버지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래. 너도 교본 그룹 사람이니, 들어와서 일을 시작해야지.”

“아, 아버지. 곧 시집갈 아이입니다.”

주미는 오빠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더 큰 펀치를 날렸다.

“설마 오빠한테 다 물려줄 생각은 아니시죠? 저도 교본에 둘밖에 없는 자식 중 하나예요.”

“…….”

난감한 얼굴의 아버지를 보며 주미는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그럼 강운 그룹에 빈 몸으로 가요? 대 강운 그룹에? 교본 그룹의 하나뿐인 딸이 시집가는데, 몸만 가라고요? 강 회장님이 가만 계시겠어요?”

주미가 언급한 강 회장은 현 회장인 수안이 아니라 전 회장인 강운모를 칭함이다. 정치에 몸담고 있지만, 외부에선 여전히 강운모를 가리키는 단어로 쓰이고 있었다.

“끄응.”

아버지가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자 신주환이 몸이 달았다.

“아버지. 이 부분은 지금 얘기할 일이 아닙니다.”

“넌 조용히 해!”

주미는 조용히 아버지의 말을 기다렸다. 질 수가 없는 싸움이었다. 교본 그룹이 커다란 날개와 그늘을 얻을 기회였다.

“…네 남편 될 사람은 뭐라던.”

강운 그룹에서 보이는 성의에 따라 내줄 것이 달라진다는 말이었다. 주미에겐 세기 통신이라는 무기가 존재했다.

“수용 씨가 따로 한 얘긴 없지만, 연 매출 15조 원 규모의 회사 하나를 들고나온다고 했어요.”

“……!!”

“……!!”

“옴마야!”

교본의 중심인 교본 생명 보험의 작년 매출이 11조에 불과했다.

“우린 알아서 챙기는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제 결혼은 강운과 교본의 결합이기도 하니까요.”

“허….”

“세기 통신? 그 알토란같은 통신사를 내준다고?”

주미는 어머니의 물음에 확실하게 답하며 당부를 잊지 않았다.

“아직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으니, 오빠 물려주실 생각이면 저는 이번 결혼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어요. 대신 세기 통신도 이대로 물 건너가는 거죠.”

“포기라니! 그런 생각일랑 꿈도 꾸지 마라.”

15조 원짜리 통신사를 어떻게 포기하겠는가.

“그럼 더 생각해 보세요. 아직 기사 나오기까지 말미는 있으니까요.”

“더 생각할 필요도 없다. 매출 15조 원 규모의 세기 통신을 사위에게 내준다면 우리도 비슷하게 성의를 보여야 해. 그럼 난 생명 보험 지분….”

“아, 아버지!”

아들의 외침에도 신 회장은 자신의 말을 끝냈다.

“생명 보험 지분 20%를 내주도록 하마. 증권과 다른 계열사 지분도 따로 챙겨 주겠다. 당장은 힘들 테니, 차근차근 진행하자. 세금 문제도 걸려있으니까 말이다.”

“안 됩니다! 아버지!”

오빠의 만류에 주미가 날카롭게 받아쳤다.

“오빠. 안 되긴 뭐가 안 돼? 다 해 봐야 고작 5조도 안 될 텐데.”

“넌 지금 그게 할 소리야! 고작이라니!”

“뭐? 오빠가 회사에서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줄 아나 본데, 오빠 회사 들어가고 1년밖에 안 됐거든? 지금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지분은 말 그대로 성의 표시밖에 안 된다고! 그리고 생각 좀 하면서 살아.”

“뭐? 생각? 너 강운 그룹 아들 만난다고 이제 오빠를 우습게 아는 거냐?”

“앞으로 강운 그룹과 함께하면 우리 교본 생명 보험과 교본 증권이 얼마나 더 크게 성장하겠어? 강운 그룹 회장이 누군지 잊었어? BE 인베스트먼트의 회장이기도 한 강수안 회장이잖아! 교본의 미래를 생각했다면 이것도 떠올렸어야지!”

“이번 일은 주미 말이 옳다. 강 회장이 조금만 도와줘도 교본 생명 보험과 교본 증권은 날아오를 거야. 지금의 교본 그룹과 향후에 성장할 교본 그룹을 비교하면 고작이라는 말도 어울리겠지. 녀석. 놀기만 하는 줄 알았더니,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구나.”

“…….”

신주환도 그걸 모르진 않았다.

‘내 자리는…. 내 위치는….’

성장할 회사보다 그룹에서 자신의 위치가 위태로워진다는 점이 중요했다.

“당연하죠. 괜히 회사에서 일하겠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교본 생명 보험에서 일하면서 강운 증권 및 BE 인베스트먼트와 협업을 위해 뛰고 싶어요. 제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요.”

주미의 말에 신 회장은 기꺼운 표정을 지었지만, 주환은 답답해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결혼 전에 회사 업무부터 적응해야겠구나. 네 자리를 마련해 놓으마.”

“감사합니다. 아버지.”

“…….”

주환은 상황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아버지. 주미는 업무지원실부터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회사 전반의 일을 파악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여동생 주미가 날아오르도록 만들어 줄 수는 없었다. 자신도 업무지원실에서 시작했으니, 여기서부터 자근자근 밟아주면 더는 위로 올라가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박 부장에게 따로 지시해 놓기만 하면….’

업무지원실엔 자신을 따르는 이들이 남아 있었다. 아무리 총수 일가의 자손이라도 주변에서 돕지 않으면 성과를 보이기는 불가능했다. 성과가 없다면 내준다는 지분 얘기도 다시 쏙 들어갈 것이다.

“무슨 소리야? 전략기획실부터 시작해. 그래야 업무 폭이 넓어질 거야. 필요한 기업 자원을 활용하기에도 수월하지.”

“……!”

전략기획실은 아직 자신도 허락받지 못했다. 얼마 전에 법인사업본부로 발령받았다. 방문을 원하지 않는 기업에 사정사정해가며 방문을 허락받고, 법인 영업을 뛰는 중이었다. 그래봤자 성과는 신통치 않았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보험 영업을 배워가고 있었다.

“강운 그룹 중역과 마주할 일이 많을 테니, 직급도 낮으면 안 되겠구나. 부장급으로 시작해. 그래야 일이 수월할 것이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버지 기대에 보답하겠습니다.”

“하하. 이젠 네가 더 믿음직하구나.”

“주미가 잘할 수 있을지….”

“…….”

부모님의 반응에 주환은 아찔한 기분이었다.

“오빠는 업무지원실에서 법인사업본부로 넘어갔지? 다행히 나랑 마주할 일은 없겠네.”

“…나도 오래지 않아 전략실로 갈 거야.”

성과를 보이기 어려운 법인사업본부에 오래 있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정말? 아버지. 오빠가 전략실로 오게 되나요?”

“…….”

신 회장은 아들의 말에 불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3년 동안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을 거라고 얘기하지 않았느냐.”

“…주미를 전략실로 보낸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럼 저도….”

“주미가 전략실로 가는 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저도 전략실로 보내 주셔야죠! 그래야 저도 성과를 내지 않겠습니까.”

“아, 아들.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어머니가 말렸지만, 이미 주환의 치기 어린 감정의 표현이 신 회장의 심기를 건드려 버렸다.

“하! 네가 법인사업본부에 있어서 성과를 못 냈다는 말이냐? 그럼 법인사업본부에서 성과를 내는 직원들은 뭔데? 이제 일 배우기 시작했으면서 성과부터 찾아?”

“…….”

주환도 아차 싶어 말을 줄였다.

말은 주워 담을 수 없기에 조심해야 하는 법이다.

“업무지원실에서 법인사업본부로 보낸 것도 네가 부탁한 일이었다. 실무를 배우겠다면서 네가 보내 달라고 했어. 그런데 이번엔 1년도 못 채우고 전략실로 보내 달라고? 법인 영업도 제대로 못 배워놓고 전략실에서 뭘 하겠냐는 거냐! 네가 전략실로 오면 뭘 할 수 있는데? 그런 마음가짐으로 교본 생명 보험의 경영자가 되고 싶다고?”

“죄,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첫 단추부터 꼬였다 싶구나.”

신 회장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넌 업무지원실로 복귀해라. 괜히 법인사업본부로 보냈어.”

“아버지!!”

“여보.”

“당신은 가만히 있어! 내 아들이라 받은 혜택을 되돌렸을 뿐이야. 업무지원실에서 남은 2년을 채워라. 아니면 전략실은 고사하고 법인사업본부도 갈 일은 없을 거다.”

“……!”

혹 떼려다가 혹을 붙인 격이다.

“오빠가 업무지원실로 돌아오면 전략실에서 도움받을 일이 많겠네요. 고맙습니다. 아버지.”

“…….”

업무지원실로 가면 상위부서인 전략실의 지시에 따라야 했다. 게다가 부장급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앞으로 잘 부탁해 오빠. 대리라고 했던가?”

“…….”

속을 긁는 말에 주환의 얼굴이 드러날 정도로 굳어졌다.

“만약 네 오판으로 회사에 손해를 끼치게 되면…. 나도 생각을 달리하는 수밖에 없다.”

동생을 시기하는 마음이 업무로 드러날 것을 걱정한 신 회장이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두고 보겠다.”

생글생글 웃는 주미와 주환의 썩은 표정은 크게 대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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