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인사
주미가 한껏 차려입고 서초동 집에 온 날이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아휴. 잘 왔다. 오느라 고생했지?”
“…아. 하하.”
수용은 어머니의 의례적 인사에 오류가 있음을 지적했다.
“어머니. 걸어서 1분도 안 걸려요.”
“…어머. 내 정신 좀 봐.”
“저는 아버지 모셔 올게요.”
수용이 아버지 서재로 간 사이 수용이 연인을 인사시킨다는 소식을 듣고 온 수현과 진태가 안으로 들어왔다.
“저 왔어요!”
“저희 왔습니다.”
“이 서방 왔어? 아휴. 우리 잘난 이 서방. 이 서방은 볼 때마다 늘 새로워.”
“하하하. 감사합니다. 장모님.”
“엄마. 난 안 보여? 엄마 딸도 같이 왔거든요?”
수현은 진태와 같이 오는 날이면 항상 이런 대접을 받는다.
“넌 가서 아줌마한테 시원한 차나 내오라고 해.”
“쳇.”
“와아….”
주미는 진태의 실물을 처음 영접하고 있었다.
“이쪽이 소문의 옆집 따님? 반가워요. 수용이 누나 강수현이에요.”
“반갑습니다. 이진태입니다.”
‘정말 선남선녀라는 말이 딱 어울리네. 괜히 하는 말이 아니었어.’
“아, 안녕하세요. 신주미입니다. 두 분이 너무 잘 어울리시네요. 정말 그림 같아요.”
열애 기사에 이어 약혼 기사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다른 기사는 모르지만, 연예계 기사는 빠지지 않고 확인했었다.
“다들 왔느냐.”
강운모의 등장이다.
자식들이 모두 고개를 숙여 아버지를 맞이했다. 주미도 그 사이에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신주미입니다.”
“허허. 정말 많이 변했구나. 수용이가 못 알아볼 만도 했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자식 중에 가장 커다란 놈이 보이지 않았다.
“수안이는?”
“형은 형수랑 같이 온다고 했습니다. 금방 올 겁니다.”
아현의 촬영 일정 때문에 중간에 픽업해서 같이 온다고 했었다.
수진의 부재는 수현이 대신 전했다.
“수진 언니는 하린이가 갑자기 열이 나서 병원에 갔어요.”
“하린이가 많이 아프대?”
“큰일은 아닌가 봐요. 아까 통화했는데, 코감기였대요.”
“그나마 다행이구나. 다들 앉지. 차 내오라고 해.”
주미에겐 불편할 수 있는 자리였지만, 수용이 옆에 꼭 붙어서 주미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고 있었다. 덕분에 예비 시아버지와의 불편한 자리도 버틸 수 있었다.
시원한 차가 막 나올 때쯤에 수안과 아현이 도착했다.
“늦었습니다.”
“저희 왔어요.”
“어서 와서 앉아라.”
“예. 아버지.”
“네. 아버님.”
“와아.”
아현의 미모는 진태를 만났을 때의 느낌과 또 달랐다.
‘예쁘다. 아냐, 아름답다는 표현이 더 어울려. 강 회장님도 예나 지금이나 정말 멋있다.’
“주미 씨? 반갑습니다. 강수안입니다.”
“처음 뵙네요. 반가워요.”
수현, 진태 커플과는 차원이 다른 기품이 있었다.
“네, 네. 안녕하세요. 신주미입니다.”
‘아. 이런 형제들 사이에서 수용 오빠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제 제 일이기도 했다.
둘은 겉모습만으로 자신감이 바닥을 치게 만들었다.
“여보. 난 시원이 먼저 보러 갈게요.”
“아주머니가 맡아주셨을 거야. 데리고 나와.”
“네. 주미 씨 긴장하지 않게 당신이 잘 챙겨 주고요.”
“알았어.”
‘오빠가 왜 처음 날 보고 코웃음 쳤는지 이제야 알겠네.’
저런 얼굴을 매일 봤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수진도 아이를 안은 상준과 함께 뒤이어 들어왔다.
“늦었어요.”
“저희 왔습니다.”
“하린이 아프다며? 집에서 쉬지 않고.”
“열은 떨어졌고, 감기약 받아 왔어요. 강하게 커야죠.”
주미는 들어오는 두 사람을 보며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
평범한 인상의 둘을 보니, 이제야 마음에 안정이 찾아왔다.
바닥을 기던 자신감도 쑥 올라왔다.
“안녕하세요. 신주미입니다!”
“오. 아가씨가 씩씩하네. 같은 기업가 집안이라 강운 그룹에서도 주눅들 일은 없지? 강수진이에요.”
“반갑습니다. 박상준입니다.”
“네에. 두 분 무척 반갑습니다.”
앞으로 친하게 지내고 싶었다.
그사이 아기를 받아 든 아현이 거실로 돌아왔다.
“시원아. 친구 왔네?”
“갸으.”
아직 아기인 시원과 하린은 엄마 품에 안겨 서로를 마주했지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아기에게 관심을 주는 사람이 있었다.
‘정말 유전자가 다르긴 다르구나.’
수안과 아현 사이에서 나온 강시원.
수진과 상준 사이에서 태어난 박하린.
둘은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라는 차이가 있었지만, 주미는 시원의 미모에 손을 들어 주고 싶었다.
‘정말 정감 가는 사람들이야. 우리랑 잘 어울려.’
그럴수록 주미는 수진과 상준 가족에 더 마음이 갔다. 정말 보면 볼수록 자신들과 비슷한 느낌이다.
고개를 돌려 회장님 가족과 둘째 언니네 부부를 보면 괜히 투정도 났다.
큰 소리를 낼 수는 없는 일이라 옆에 앉은 연인에게 조그맣게 말했다.
“오빠. 귀 좀.”
“어. 왜?”
수용이 귀를 가까이하자 주미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스코리아 뺨은 얼어 죽을. 내가 죽도록 얻어터지는 거 안 보여?”
“큭. 크크크.”
수용도 주미가 하는 말을 단번에 이해했다. 미스코리아의 존재를 집에 알리라고 했었던 과거의 발언을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웃냐? 웃어? 지금 이 상황이 웃겨? 앙?”
“흐흐. 끄읍. 자꾸 웃기지 말고 우리도 애들이나 보러 가자.”
다행히 모두의 관심이 두 아기에게 쏠린 상태라 둘은 자연스럽게 합류할 수 있었다.
“어머. 하린이 너무 예뻐요. 나중에 미스코리아 한다고 하겠어요.”
그 말에 수용은 입을 틀어막고 얼른 돌아섰다. 터지는 웃음을 참기 위함이었다. 또 등장한 미스코리아라는 말이 원인이었다.
문제는 그 모습을 수진이 봤다는 데 있었다.
“상준 씨.”
“어.”
“저놈 잡아 와. 방금 웃었어.”
“옙!”
그사이 웃음을 멈춘 수용이 돌아서서 말했다.
“누나. 아냐. 오해야. 기침이 나올 것 같았다고. 하린이 감기가 더 심해지면 어떡해.”
필사적으로 변명하는 수용이다.
“…누구든 웃기만 해 그냥.”
“전 하린이가 너무 귀엽고 예뻐서….”
“정말이지?”
“네에. 정말이에요.”
“그럼 안고 있어. 난 시원이 보러 가야겠다.”
하린이를 맡긴 수진은 조카 시원에게 달려갔다.
“올케언니! 나 시원이 좀 안아 볼게요.”
“여기.”
시원을 안아 든 수진은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렸다.
“다음엔 고모가 널 꼭 닮은 하린이 동생을 낳을 거란다. 어쩜 이렇게 잘생겼을까. 아휴. 얘는 나중에 연예인 하겠다고 할지도 모르겠네.”
“아니에요. 아직 어리니까 예뻐 보이는 거죠.”
“내가 맨날 우리 하린이 보다가 저번에 시원이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언니. 내 새끼라 물론 예쁘긴 한데, 시원이는 정말 너무 다른 거 있죠. 시원이는 오빠랑 언니 반반씩 좋은 부문만 닮은 것 같아요. 어쩜 이렇게 잘생겼는지….”
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함함하다고 한다지만, 수진은 객관성을 잃지 않고 있었다. 수현은 보다못해 한마디 했다.
“언니. 왜 시원이를 데리고 그러냐고요. 애는 언니 남편한테 부탁해야지.”
“넌 내 맘 몰라 이것아. 제부랑 너 사이에 태어날 애는 당연히….”
수현과 진태에게서 나올 2세는 안 봐도 뻔했다. 분명 오빠 2세들과 비슷한 수준의 미모를 갖추고 태어날 것이다.
“애들은 방으로 데려가. 날도 아직 쌀쌀한데.”
주미는 조금 생소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딱딱한 분위기를 예상했는데, 아버님도 어머님도 다 편해.’
강운 그룹 직계 자식만 넷이다. 결혼해 아이를 가진 집도 둘이나 있었고, 결혼을 앞둔 집도 자신과 수용까지 포함해 둘이었다.
자신의 집에 비하면 숫자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와 자신까지 넷이 사는 집이었다. 걸핏하면 집을 비우는 아버지와 오빠 덕분에 집은 항상 서늘했다. 오빠는 다정다감하지 않았고, 아빠도 엄하기만 했다. 엄마가 있었지만, 엄마는 항상 오빠 편이었다. 집 안에서 자신은 외톨이였다.
그래서 더욱 주변에 밝은 모습만 보여 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밝고, 명랑한 친구로 기억되고 싶었다. 실제로 친구들은 주미를 구김살 없는 밝은 친구로 기억해 주고 있었다.
무리한 독립의 이유도 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이다. 매일 보던 친구들에게 벗어나 집에 있다 보니 답답한 집안 분위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더는 견딜 수 없었기에 독립을 결정하고 용돈만 들고나와서 집을 구했다. 그 와중에 수용을 만난 일은 자신의 인생에 큰 행운이었다.
게다가 그의 집은 이렇게 포근하고 따스했다.
“좋다….”
“뭐가?”
“오빠 집 분위기 되게 좋다. 막 푹신푹신한 침대 같아. 사람도 복작복작하고….”
“그냥 사람 사는 집이지 뭐.”
“사람 사는 집이라 좋은 거지. 우리도 여기서 같이….”
수용은 눈을 반짝이는 주미를 보고 말을 잘랐다.
“너…. 꿈도 꾸지 마라. 무조건 독립이야. 이미 나랑 얘기 끝나지 않았나?”
둘은 일전에 결혼 이후의 얘기까지 합의한 바 있었다. 나중에 결혼하면 첫째 누나처럼 바로 독립해서 신혼생활을 즐기기로 했었다. 서울 지역 어디든 못 가겠는가. 여전히 서울에 많은 아파트와 주택을 보유한 수용이다.
“딱 3년만.”
“주미야…. 오빠 화낸다.”
“그럼 2년이라도. 응?”
어느새 다가왔는지 수용의 모친이 듣고 물었다.
“뭐가 3년이고 2년이야?”
“나는 독립하자는데, 주미가 자꾸 여기서 부모님 모시고 살고 싶다고….”
“어머나!”
누나가 묻는 줄 알고 대답하던 수용은 엄마라는 사실을 깨닫고 말을 멈췄다.
“…엄마는 왜 몰래 듣고 그래?”
“이제 여기가 우리 집이라는 마음이 들려면 최소한 3년은 같이 살아야지 않겠어요? 제 말이 맞죠? 어머님.”
“우리 주미가 마냥 어린 게 아니네? 수용이보다 네가 낫다 얘.”
“헤헤.”
수용의 거침없는 말 덕분에 예비 시어머니에게 톡톡히 점수를 챙겼다.
“아들 키워 봤자 다 쓸모없다더니. 아차. 수안이는 빼야지. 수용이 너와 같이 사는 건 내가 바라지도 않아. 나가 살아. 이것아.”
“에효.”
항상 찬밥신세인 수용이다.
“호호. 아주버님은 아들 노릇도 잘하시나 봐요.”
“주미도 애 낳아 보면 알아. 수안이 같은 아들 하나만 있으면 세상에 부러울 게 없어. 제 동생들은 또 얼마나 챙기는지….”
자식 자랑은 누구에게나 공평했다.
‘강 회장님이 동생들을 사랑한다는 사실은 저도 잘 알죠. 흐흐흐.’
덕분에 통신사까지 챙기지 않았겠는가. 아직 넘겨받은 건 아니지만, 시간문제일 뿐이다.
“어쨌든 저도 꼭 같이 살고 싶어요. 허락해 주세요. 어머님.”
“주미는 어쩜 이렇게 교육을 잘 받고 컸을까.”
이후 수안의 첫째 정원이가 학교에서 돌아왔다.
“…와. 많다.”
정원이는 온 가족이 다 모여 북적북적한 거실을 보고 더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아들!”
“아빠.”
아빠의 부름에 쪼르르 달려가 안기는 녀석이다. 수안은 아들에게 오늘의 학교생활을 묻기 전에 인사부터 시켰다.
“여기 인사드려. 삼촌이랑 곧 결혼할 분.”
“안녕하세요. 신화초등학교 2학년 강정원입니다.”
“반가워요. 정원이는 벌써 의젓하네?”
“감사합니다. 예쁜 누나.”
‘정말 든든하겠다.’
아빠와 닮은 아들은 구김살 없는 미소를 보이며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조잘거리고 있었다.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왔다는 소식에 아현도 아기 시원이를 안고 밖으로 나와 반겼다. 주미는 꿈에 그리던 가족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자신도 꼭 아이를 낳을 다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나도 예뻐해 줘.”
유치원에서 돌아온 나현이다.
나현은 도도도 뛰어가 엄마 아빠의 품에 안겼다.
아이는 엄마를 많이 닮아 크고 반짝이는 눈에 작은 얼굴을 자랑하고 있었다.
“나현아. 집에 오면 인사부터 해야 한다고 배우지 않았어?”
“아차! 다녀왔습니다아! 할부지 안녕! 할머니도 안녕! 수진 고모랑 고모부, 수현 고모랑 잘생긴 고모부! 수용 삼촌도 안녕안녕안녕!”
허리를 푹푹 접으며 인사하는 모습이 무척 귀여웠다.
“난 왜 그냥 고모부야?”
상준의 투덜거림은 가볍게 못 들은 척 넘어가는 나현이다.
주미는 그런 나현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처음 보는 언니도 있다!”
“삼촌 결혼할 분이래.”
“우아! 삼촌 장가가? 고마워. 언니! 우리 삼촌 구제해 주는 예쁜 언니는 천사야!”
“뭐어? 구제? 삼촌 아직 노총각 아니거든?”
수용의 반응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나현이 말대로 구제는 맞지. 저걸 누가 데려가려나 했는데.”
나현의 등장은 안 그래도 시끄러웠던 집안을 더욱 소란하게 했다.
“나현이는 이제 삼촌을 사랑하지 않는 거야? 삼촌 삐진다.”
“아잉. 삼초온. 내가 삼촌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나현은 폴짝 뛰어들어 삼촌의 품에 안겼다. 조카의 애교에 수용이 살살 녹았다.
“흐흐. 엄마 아빠 몰래 삼촌이랑 아이스크림 사 먹으러 갈까?”
“주말에 데이트? 나현이는 삼촌이랑 노는 거 좋아.”
‘딸! 딸이 진리야.’
방금까지 자식을 갖고 싶었던 주미의 다짐을 한쪽으로 향하게 만드는 애교와 미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