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혀지는 실체
수안은 수용의 간략한 설명을 듣고 말했다.
“…네가 진짜 연애하는구나.”
“집에 데려갈 생각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러니 뒷조사할 필요도 없지.”
“너는 그렇다 치고 그 여자도 같은 생각이냐?”
“그야. 뭐….”
당연히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상대가 다른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오늘만 사는 것처럼 불타는 연애를 이어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자가 취직을 위해 애쓰는 상황에서 결혼이라는 불확실한 미래를 얘기할 수는 없었다.
“이상한 애만 아니면 된다. 그러니까 네가 강운 그룹 사람이라는 건 말하지 말고 그 집에도 한번 인사하러 가 봐.”
“형. 아니라니까 그러네.”
“아닌 건 네 눈빛이 아니지 인마. 그 여자애 얘기할 때 눈이 초롱초롱하던데? 너도 푹 빠져 있잖아.”
“…….”
수안은 수용이 과거를 회상하며 지은 표정을 보고 알 수 있었다. 동생 수용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연인에게 깊이 마음을 주고 있었다.
“…괜찮을까?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으실 수도 있잖아.”
“이봐. 이봐. 저도 좋으면서.”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랬지.”
“바쁘다는 놈이 시간 빼서 연애할 시간은 있었어?”
“…….”
“어지간한 집안만 아니면 내가 밀어줄 테니까 그 집에 인사나 가시라고요.”
“형이 도와줄 거야?”
“내가 허튼소리 하든?”
“오케이! 나 형만 믿고 진행시킨다. 응?”
“네가 가서 보고 아니다 싶으면 그때 정리해. 술 먹고 행패 부리는 아버지에 도박에 빠진 어머니를 가진 상대라도 결혼할 건 아니잖아.”
“에이. 주미는 밝게 컸어. 그런 집안 아닐 거야.”
“됐고. 다녀와서 보고해. 알간?”
“나중에 무조건 내 편 들어주기다. 알았지?”
“그건 가 봐야 안다니까. 아무나 밀어주는 게 아니라 적당한 여자애면 밀어준다고 했잖아.”
“그래도 형. 부탁 좀 해. 응?”
“에효.”
* * *
“…오빠. 우리 집에 인사하러 가고 싶다고?”
아저씨에서 오빠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전세금을 돌려받도록 도와주고 새로운 넓은 평수의 아파트로 이사하는 것도 수용이 도와줬다. 이후 식사를 대접한다며 만나기 시작해 깊은 사이로 발전한 둘이다.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고 우리 만나고 1년 거의 다 됐는데, 집에 인사도 못 드렸잖아. 그냥 말 그대로 인사만 드리겠다는 거야.”
“…오빠. 꼭 인사를 해야 하나?”
“왜? 내가 집에 가는 거 싫어? 나 부모님께 보여 주기 부족해? 교제 허락도 못 받아?”
“아, 아니. 오빠가 부족하긴 뭐가 부족해. 그냥 내가 아직 자리도 못 잡았고….”
여전히 백조의 삶을 살고 있는 주미였다.
“요즘 취직이 좀 힘들어? 괜찮아. 조만간 직장 잡을 수 있을 거야.”
“하아.”
주미의 한숨이 깊어진다.
“집이 멀어? 시골이겠지?”
독립해 서울에서 전세를 살고 있으니, 본가는 상당히 멀리 있다고 생각했다.
“시골은 아니고….”
“시골은 아냐? 지방 도시인가 보네.”
“…그래. 가자. 어쩔 수 없지. 계속 이렇게 만날 수도 없고.”
“오오! 언제 갈까?”
“오늘.”
“어엉? 오늘?!”
그렇다고 오늘 갈 생각은 아니었다.
“질질 끌어봐야 속만 더 아프겠지.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따라와 오빠.”
“…어.”
.
.
.
수용과 주미가 탄 택시는 익숙한 장소에 멈춰 섰다.
“어….”
“다 왔어.”
“…….”
“숨겨서 미안해.”
“…여기라고?”
“이 집이야. 자신 없으면 지금이라도….”
수용은 거대한 저택 앞에 서 있었다. 시골도 아니었고, 지방 도시도 아니었으며 서울 도심가였다.
“헐.”
그것도 고개만 돌리면 서초동 본가가 눈에 들어오는 곳이었다.
‘우리 집하고 엄청나게 가깝네.’
수용은 이 집에 방문했던 기억도 있었다.
‘전에 살던 분은 이사 가셨나? 주미를 봤던 기억이 없는데….’
“우리 주미가 오빠를 감쪽같이 속였네?”
그래도 이웃사촌이다. 주미의 집도 나름 잘 사는 집안이라는 뜻이었다.
“일부러 숨긴 건 아니고….”
“오빠는 마음이 넓으니까 괜찮아. 들어가자.”
“어, 어.”
수용에겐 어느 집이라도 상관없었다. 갑자기 자신감이 뿜어져 나온다.
바깥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인사했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아가씨.”
“얼굴 잊어버리겠습니다.”
독립했다지만, 몇 개월에 한 번씩은 집에 들렀었다.
“좋은 소리도 못 듣는데 뭐 하러 자주 오겠어요. 오늘 이후론 더 오래 못 볼지도 몰라요.”
허락도 없이 남자를 데려왔으니, 부모님과의 갈등은 예견된 일이다. 안에 있던 사람들도 옆에 있는 수용을 보고 의아한 얼굴이다.
“어? 저분은….”
“쉿. 아무것도 묻지 말아요. 나도 속이 복잡하니까.”
“…….”
주미와 수용이 지나가고 나서 둘의 대화가 이어졌다.
“아가씨가 남자를 데려왔네. 오늘 집안 시끄럽겠다.”
“…너 저분 몰라?”
“넌 알아?”
“…오래전에 먼발치에서 보긴 했는데, 지금은 헷갈리네. 살이 빠지셨나?”
“누군데?”
“옆집에 강운 그룹 막내 도련님이 아닌가 싶은데….”
“끄헙! 맞다! 나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아가씨가 괜히 데려온 게 아니구나?”
“그치? 맞지?”
“오늘 집안에 경사 났네.”
“회장님이 엄청 좋아하시겠다.”
주미는 몰랐지만, 경호 직원들은 한눈에 수용을 알아봤다.
.
.
.
“내 애인 소개해 주려고 왔어요.”
주미의 부친은 주미가 수용을 데리고 들어와 하는 말을 듣고 소리부터 질렀다.
“너! 독립한다고 나간 건 좋다 이거야! 그런데 남자를 데려와?!”
“주미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번엔 너무했어.”
모친의 시선도 그리 곱지 못했다.
주미의 부친은 딸에서 시선을 거두고 수용에게 향했다.
“그쪽은 뭐 얻어먹을 거 있다고 여길 들어오나? 난 허락 못 하니까 그렇게 알아!”
“…….”
“아빠. 이 사람도 나름 건실한 직장인이란 말이야. 뭐가 부족한데?”
주미의 말에도 다시 호통을 쳐 내쫓으려고 했다.
“너! 너…. 가 아니라….”
수용을 보던 주미 부친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이상하게 낯이 익네? 우리 어디서 만난 적이 있던가?”
“안녕하십니까. 신 회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강수용입니다.”
어렸을 때 주변 이웃들과 인사한 일이 있었다. 이웃들이 대부분 회사 사장이나 오너인 경우가 많았으니 재계 인사들과 안면을 익히는 자리였다. 형이 바쁘게 일하다 보니 가끔은 본인이 대신 아버지와 함께 인사했었다.
“수용…. 수용. 이름도 귀에 익은데….”
“저…. 옆옆 집에 살고 있습니다. 10년 전 가든파티에 와서 인사드렸습니다.”
신 회장의 회장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열렸던 가든파티였다.
“으응? 옆옆 집에 강 씨라면…. 억!”
“여보. 어느 집 말이에요?”
“가, 가, 강운?”
“예. 막내 수용입니다.”
“……!!!”
“……!!!”
“……!!”
수용은 경악한 표정의 가족들 사이에서 먼저 사과의 말을 했다.
“미안. 주미야.”
“와아. …미쳤다 진짜. 나도 숨기긴 했지만….”
덥석.
주미의 아버지가 수용의 손을 잡아 안으로 이끌었다.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듯이 두 손으로 수용을 꼭 잡고 있었다.
“아, 앉지. 들어와 얘길 해야지. 왜 여기 섰어.”
“예. 감사합니다. 아버님.”
“허허허. 아버님이라니. 듣기 좋구먼.”
“차는 뭘로 내올까요?”
모친의 태도도 달라졌다.
“아무거나…. 아니지. 얼마 전에 선물 들어온 벽라춘으로 내와.”
“네에.”
“고맙습니다. 어머님.”
“호호홍. 금방 내올게요.”
‘형 말을 듣길 잘했네.’
조용히 만나다 헤어졌다면 얼마나 억울했겠는가.
“주미 너도 얼른 와서 앉아라.”
“…….”
“너도 기억나지? 예전에 봤을 텐데?”
“…….”
과거의 기억을 뒤져 보니, 어렴풋이 강운 그룹 강 회장님을 만났던 기억이 떠올랐다. 자신이 중학교에 다닐 때였다. 당시 대학교 2학년이었던 수용은 살이 포동포동하게 올라있었다. 당시에도 제대로 인사를 한 것이 아니라 스쳐 지나간 것이 전부였다. 기억나는 게 용할 지경이다.
“그땐 이 얼굴이 아니었는데….”
“우리 애가 살이 너무 빠져서 자네를 못 알아봤잖은가. 언제 그렇게 헌앙해지셨을꼬?”
“저도 주미를 못 알아봤습니다. 중학교에 다닐 때는 마냥 어리게만 보였는데….”
“허허허. 서로 인연이 되려고 그랬나 보구먼.”
실로 화기애애한 만남이었다.
“둘이 만난 지는 얼마나 됐고?”
“이제 한 1년쯤 됐습니다. 집안에 인사드리고 교제를 허락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주미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럼. 그럼. 당연히 허락해야지.”
“아빠. 태세 전환이 너무 빠르지 않아? 방금 누가 허락 못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넌 조용히 해. 둘이 어떻게 만났어?”
“주미가 전세금을 떼일 뻔해서 돕다가 알게 되었습니다.”
“으이그. 얘가 뭣도 모르고 독립한다고 나갔을 때부터 알아봤지. 제 용돈만 갖고 살아 보겠다고 대학 졸업하고 집을 나갔지 뭔가. 매사가 어설프니 사기나 당하고 말이야.”
전세금 1억 5천은 주미가 어려서부터 받아 모아온 용돈이었던 모양이다.
“직장이라도 잡으면 독립을 하든가 했어야지.”
“아빠!!”
“넌 조용히 해 이것아!”
“칫.”
“그래도 인연이 이어졌으니, 독립이 허사는 아니었어.”
“주미는 밝고 유쾌한 성격이라 누구라도 좋아했을 겁니다. 제가 먼저 주미를 만났으니 운이 좋았지요. 회장님 말씀대로 전세 자금이 큰 인연이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기억나는군. 자네가 요즘 부동산 사업을 하고 있다고 들었네만.”
“예. 강운 그룹은 온전히 형이 맡고 있어서 저는 제 사업을 키우고 있습니다.”
“암. 남자라면 자기 사업을 해야 하는 법이지.”
부친의 말에 주미가 몰랐다는 듯이 물었다.
“…오빠. 다닌다는 회사가 오빠 거였어?”
“아. 응. 지금 너 사는 집도 사실 내 집이다.”
기존 집 전세금을 회수해 다른 집에 전세를 얻어 줬는데, 그 집은 수용 소유의 아파트였다. 고작 1억 5천으로 얻을 수 있는 아파트가 얼마나 되겠는가. 수용이 자신의 집을 내줬기에 얻을 수 있었던 집이다.
“하! 인생이 거짓말이네.”
“네가 물어본 적 없었잖아.”
“그래도 얘길 했어야지!”
“…….”
그 와중에 신 회장이 수용의 편을 들었다.
“너도 집안 얘길 안 했으니 똑같아 이것아. 그 와중에 너 챙겨 주겠다고 집까지 내준 사람이잖아. 고맙다고 하진 못할망정.”
“에잇.”
수용은 환대 속에 인사를 마칠 수 있었다. 신 회장은 수용의 방문에 기꺼워했고, 모친 또한 다르지 않았다.
.
.
.
“…….”
인사가 끝나고 밖으로 마중 나와서 불퉁한 얼굴을 한 주미는 지금부터 풀어 줘야 했다.
“화났어?”
“…오빠. 왜 강운 그룹 아들이라는 걸 숨겼어? 나도 못 알아보고.”
“솔직히 알아보는 게 이상하지 않냐? 난 우리가 어렸을 때 만났다는 것도 신기할 지경인데? 그나마 난 가끔 인터넷 신문에 얼굴이라도 보였지….”
“…….”
이 부분은 주미도 할 말이 없었다. 수용을 스쳐 지나가면서 보기는 했었고, 강운 그룹에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였다면 수용의 얼굴을 기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 같이 못 알아봤으니 같은 셈으로 치면 안 될까?”
“…오늘 난 가족들하고 연 끊을 각오까지 했단 말이야. 흑.”
“아이고. 주미야.”
수용은 눈물을 보이는 주미의 어깨를 토닥였다.
“흑. 내가 얼마나 조마조마했다고.”
“우리 주미가 그런 각오까지 한 줄은 몰랐네.”
“히잉.”
“조만간에 우리 집에도 들르자. 응?”
“흑. 지금 가도 되겠네. 몇 걸음이나 된다고.”
고개만 돌리면 수용의 집이 보이는 곳이다.
“…또 지금?”
“진담 같아? 지금 내 꼴이 이런데 가긴 어딜 가?”
옷차림부터가 편했다. 모르면 몰랐을까 이대로 강운 그룹 집안에 찾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 나중에 정식으로 인사해야지.”
“킥. 그래도 허락받으니까 좋다.”
“나도 아직 실감이 안 나. 우리 정말 인연이지 않아?”
“우리가 인연은 인연인가 봐. …그나저나 뚱땡이! 언제 살을 그렇게 뺐어?”
주미의 기억 속에 수용은 이런 몸과 얼굴을 갖고 있지 않았다.
“어허. 뚱땡이라니. 그때도 그렇게 살찐 건 아니었거든?”
“넓적한 얼굴에 몸도 아저씨였는데, 지금은 온몸이 탄탄한 근육질이잖아.”
깊은 연인 사이로 발전한 둘이다. 서로의 몸은 서로가 잘 알고 있었다.
“우리 주미도 안경잡이 여중생이었는데, 지금은 미스코리아 뺨치지 않나?”
“흐흐흣. 큼큼. 좋아. 오늘은 봐주겠어. 얼른 집에 가서 미스코리아의 존재를 알리도록.”
“옛썰!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겠습니다!”
수용은 주미에게 손을 흔들어 주며 뒷걸음질로 집으로 향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집 앞에 도착했다. 둘은 그때까지 서로를 마주 보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잘해!”
“응!”
서로의 목소리도 전해질 정도로 집이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