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한 놈
모든 예식이 끝나고 신랑과 신부가 떠난 다음에 강운 그룹 가족이 모였다.
“다들 와줘서 고맙다. 덕분에 수월하게 식을 치렀어.”
“오빠는 별말을 다 해.”
“또 울지 말고 적당히 끊어.”
“이 녀석들이 진짜.”
“작은오빠는 큰오빠 말하는데 끼어들지 말고.”
“네가 먼저 끼어들었다만?”
다들 60이 한참 넘은 형제들의 대화였다.
수안은 여기에 한마디 거들었다.
“형들은 지극히 정상이었네요. 집안 피가 진하게 이어졌을 뿐.”
“아들은 조용히 하고.”
“조카. 그거 욕인가?”
“죄송….”
수안은 조용히 찌그러졌다. 집안 어른이 있는 자리였다.
“이제 다음은 수현이 차례였지?”
“예. 백부님.”
창수, 창식 형제가 결혼했으니 이번엔 수현 차례였다.
“약혼식은 잘 치렀다고 들었다. 결혼식은 어디서 하려고?”
“…….”
수현은 아버지를 돌아봤다. 오늘 결혼식처럼 치르고 싶었지만, 화려한 호텔에서의 비공개 결혼식은 허락되지 않았다.
강운모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강북에 결혼식장 하나 있어서 그리로 잡았어.”
“응? 내가 모르는 강운 그룹 호텔이 강북에 있던가?”
“호텔 아니고 그냥 컨벤션센터. 이름이 뭐였더라…. HK 컨벤션센터였던가? 야외 결혼식으로 진행할 예정이야.”
“이름도 모르는 컨벤션센터? 호텔에서 안 하고? 야외에서 진행하면 기자들 막기도 쉽지 않을 텐데….”
“공개 결혼식이야. 기자들이고 뭐고 다 들어오겠지.”
“…….”
“…….”
아버지의 말에 수현이 덧붙였다.
“그렇게 됐어요. 남편 될 사람이 연예인이기도 하고 해서….”
“호텔에서 해도 공개 결혼식으로 진행할 수 있잖아?”
고모의 말에 수현은 조금 돌려서 말했다.
“…너무 부유해 보이면 좀 그렇잖아요.”
수현의 말에 병모와 지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국회의원이 된 강운모 때문이었다.
“…네가 고생이 많다.”
“오빠가 정치한다고 나서는 바람에 애들까지 이게 뭐야.”
“아녜요. 백부님. 괜찮아요. 고모.”
“누가 들으면 딸아이 혼삿길 막기라도 한 줄 알겠네.”
“으이그. 대체 넌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정치까지 한다고 난리를 피워.”
“내 말이 그 말이야. 오빠. 계속 국회의원 놀이할 생각이야? 이번에 끝나면 다시 복귀할 거지?”
재벌가에서 태어나 자란 두 사람에게 국회의원은 용돈이나 안겨 주고 작은 친분을 유지하는 계약직에 지나지 않았다. 재벌과 정치인은 평소 가깝게 지내지만, 너무 가까워지면 끝이 좋지 않았다.
또 수안이 나섰다.
“이 부분은 두 분께도 미리 말씀을 드려야 하지 않을지….”
운모도 형과 동생을 포함해 강운 그룹 직계가 모인 자리에서 밝히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게 좋겠네.”
“그럼 제가….”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고 수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께 정치를 권유한 사람이 접니다. 백부님과 고모님께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누가 운모 가슴에 불을 지폈나 했더니, 수안이가 그랬어?”
“쟤가 말발이 너무 세서 그래. 수안이가 마음만 먹으면 뭐든 못 할까.”
백부와 고모의 말을 흘려들으며 수안은 조심스럽게 아버지의 정치 참여 목적을 설명했다.
“차기는 저와 친밀하게 지내고 평소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는 한신당 이현창입니다. 그리고….”
“지금 쟤가 무슨 소릴….”
“지수야. 조용히 해 봐. 다 듣고.”
“어. 알았어.”
“그리고 차차기는 아버지를 밀어드리려고 합니다. 올해 민국당 당 대표를 시작으로 여당의 지도자로 자리 잡을 계획입니다. 또한 밀어낼 후보를 차기 후보로 던져 정리하면 차차기 후보는 아버지밖에 남지 않습니다. 이 외에도 대선을 향한 모든 계획이 세워져 있습니다.”
“……!!”
“……!!”
“아버지는 대통령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회장 자리를 내려놓으셨습니다.”
놀라는 두 사람에게 운모가 입을 열었다.
“뭘 그렇게 놀라? 내가 괜히 국회의원을 했겠어? 정치를 시작했으면 꼭대기에 올라가야 할 것 아냐? 내가 누구 밑에 있는 거 싫어하잖아.”
“허! 운모는 그러고도 남지. 암.”
“그래서 그렇게 열심이었어. 난 오빠가 시장통에 돌아다니는 걸 TV에서 보고 얼마나 놀랐었는데…. 미리부터 서민 이미지 쌓고 있는 거지?”
“그래서…. 우리 수현이도 허접한 결혼식장에서 결혼시키게 생겼지. 나도 마음이 불편해.”
얘기가 다시 결혼식장 얘기로 돌아왔지만, 백부와 고모의 반응은 아까와 달랐다. 수안이 시작했다면 정말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판단이었다.
“수현아. 이번 건은 네가 양보해야겠다.”
“그래. 어쩔 수 없어. 대통령 자리가 어디 쉽게 되겠니? 미리부터 트집잡힐 일은 안 하는 게 좋아. 연예인 데려왔는데도 허락해 줬으니 그걸로 만족이지 뭐.”
병모는 오늘 자식의 결혼식까지 걱정하기 시작했다.
“오늘 우리 애들 결혼식이 너무 과하지 않았을까?”
“창수랑 창식이는 괜찮지. 자식도 아니고 조카였잖아.”
“거참. 별걸 다 신경 쓰고 있어? 어디 가서 얘기하지 말고 입만 다물고 있어. 괜히 대선 얘기 흘러나오면 미리부터 야당의 공격이 시작되니까 하는 말이야.”
“수안이가 한다면 하는 거지.”
“그래. 수안이가 생각이 없어서 애비를 대통령으로 만든다고 했을까.”
수안은 고개를 숙여 민망한 표정을 숨겼다.
“날 믿으시라고요. 내 아들을 믿지 말고.”
주변의 형제들은 어르신들 대화에 끼지 못했지만, 마찬가지로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국회의원이 된 것을 정치에 뜻이 있었다는 정도로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통령까지 노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어쨌든 마무리는 해야겠구나.”
강병모는 정신을 차리고 처음 하려던 말을 다시 꺼냈다.
“운모 덕분에 애들이 편하게 신혼여행에 갈 수 있었다. 고맙다.”
전용기를 제공한 덕분에 창수, 창식 형제는 편안하게 신혼여행 길에 올랐다.
강운모는 고개만 끄덕이고 끝이었다.
“그리고 지수도 와줘서 고맙다.”
“별말을 다 하네 진짜. 아들하고 며느리도 못 데려와서 민망해 죽겠는데.”
지훈과 혜린은 각자의 일정으로 도저히 결혼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고 한다.
“너희도 수고 많았다.”
“아닙니다. 백부님.”
“수현이 결혼할 때는 우리 애들이 가서 도울 거야.”
“아들하고 며느리도 그땐 시간이 맞겠지.”
“하하하. 하….”
강운모는 괜히 웃음이 났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눈물도 조금씩 나왔다.
‘아버지, 어머니가 생전에 보셨다면 좋았을 텐데….’
형제간에 우애 좋은 모습을 보고 싶어 하셨지만, 형을 그리 내쫓고 기대를 접으셨던 아버지와 어머니다. 부모님은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사이좋은 형제를 보지 못하셨다. 그 생각에 자꾸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야. 넌 나보고 울지 말라더니…. 너도 나이 들었다니까.”
“거 모르는 척합시다. 애들도 있는데.”
강운모는 대범한 척 말했지만, 형인 병모는 동생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큼. 그래.”
‘아버지. 어머니….’
형도 동생처럼 부모님을 떠올리고 있었다. 지수도 마찬가지로 부모님을 떠올렸다.
“…엄마랑 아빠도 하늘에서 보고 계실 거야.”
숙연한 분위기에 수안과 형제들 모두가 조용히 숨죽였다.
“앞으로 우리 강운 그룹 가족들 함께 잘 지내보자. 힘든 일은 돕고 즐거운 일은 서로 나누면서 살자.”
“알았어. 오빠.”
“예. 백부님.”
“거 당연한 소리를 무게 잡고 하고 있어?”
강운모의 삐딱한 대답이었지만, 내용은 긍정이었다.
“오늘 피곤할 테니, 다들 얼른 들어가 쉬어라. 식사는 다음에 같이 하자.”
“오늘 고생 많았어. 오빠.”
“백부님도 얼른 들어가서 쉬세요.”
강운 그룹 가족이 모두 밖으로 나갔고, 마지막에 강운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생은 말없이 형의 어깨에 잠시 손을 얹고 밖으로 나갔다.
병모는 동생의 손이 잠시 머물고 간 어깨가 뜨끈한 느낌이었다.
“녀석….”
나이가 드니 지난날에 부렸던 욕심이 부질없이 느껴진다. 아버지는 현명한 분이셨다. 동생에게 강운 그룹을 물려준 덕분에 가업을 크게 성장시킬 수 있지 않았겠나. 자신이 맡았다면 아버지 생전에 가업을 말아먹는 꼴을 보셨을지도 모른다.
“네 덕분이다. 운모야. 네 덕분에 강운 그룹이 이렇게 성장했다.”
“…거참. 들어가시라고.”
“……!”
운모는 재킷을 두고 가서 다시 들어온 참이었다. 뚜벅뚜벅 걸어가 의자에 걸어 둔 재킷을 들며 말을 보탰다.
“지금까지 폼 잡고 있었어? 기력도 딸리는 양반이 그러다 진짜 쓰러져.”
“…들었냐?”
“크크. 회사 큰 게 내 덕분인가? 다 아들놈이 잘난 탓이지.”
다 들었다는 말이다.
“간다. 가!”
병모는 민망한 마음에 후다닥 밖으로 나섰고, 운모도 그 뒤를 따랐다.
“뭘 또 그렇게 부끄러워해?”
“조용히 해!”
“하하하.”
“웃지 마!”
“아하하하하!”
* * *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흐뭇한 마음을 숨기지 않으셨다. 수안과 서재에 단둘이 있으면서도 피식피식 웃음을 흘리셨다.
“네 덕분이다.”
“…….”
다짜고짜 하는 말이지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범 강운 그룹이 오늘처럼 친밀한 관계를 자랑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네가 형님 회사에 큰 도움을 준 덕분에 형님이 저렇게 마음이 풀린 거야. 지수도 네가 도와줘서 유통업이 크게 성장했어.”
무조건적인 도움을 주며 한송 그룹의 성장을 도왔기 때문에 강병모 회장의 마음이 풀렸다고 생각했다. 뉴월드 마트도 마찬가지였다. 국내 마트 사업을 양분하는 뉴월드 마트와 홈플러스였고, 그중에 뉴월드 마트는 고급 식자재를 다루며 인기를 끌고 있었다. 홈플러스에선 뉴월드 마트가 취급하고 있는 고급품을 다루지 않기에 서로의 영역을 지켜 주는 셈이다.
“아버지께서 허락하셨으니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아냐. 이건 네가 잘한 일이다. 네 덕분에 강운 그룹 가족이 진짜 하나가 되었어.”
“민망스럽습니다.”
“잘한 일은 잘한 일이고…. 이제 한 놈 남았구나.”
아직 정리하지 못한 마지막 한 사람. 바로 수용이다.
“찾고 있는데, 수현이 때와 마찬가지로 쉽지 않습니다. 요즘 정신 제대로 박힌 신붓감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렵게 찾아도 상대는 결혼 생각이 없기도 하니까요.”
“어디 아현이 같은 애라도 있으면….”
또 연예계 인물이 거론되었지만, 이번엔 수안도 난감했다.
“연예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에 정신이 팔려서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여자들이 대다수입니다. 거기서 제대로 된 사람 찾기는 어렵습니다.”
수안에 이어 수현까지 연예인을 배우자로 맞이하며 연예계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덕분에 남은 수용을 노리는 연예인들이 많다는 소문이다. 하지만 그중에 수안의 마음에 차는 여성은 없었다.
“수용이는 요즘 뭐 하느라 그렇게 바빠?”
“제 사업한다고 푹 빠져 있지 않습니까. 사업이 날로 번창하니 연애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럼 그냥 내버려 둬?”
“…이제 갓 서른 넘었습니다. 더 두고 보셔도 됩니다.”
“그러다 엉뚱한 애라도 데려오면 어쩌려고?”
“연애라도 해서 누굴 데려오면 그때 생각해도 늦지 않습니다.”
“자유연애라…. 걔가 사람은 제대로 볼지 모르겠구나. 욕심만 많은 아이를 데려오면 집안에 분란이 생겨.”
“제가 따로 얘기해 보겠습니다.”
“수현이 결혼 이후에 수용이도 얼른 정리하는 방향으로 가자.”
“노력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