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결혼식
“피겨 김연하요? 그럼 강운 그룹 조직 개편의 이유가….”
“응. 우리 연하의 피겨 역사가 시작되는데 내가 빠질 순 없지. 안 그래도 작년 주니어 국제 무대 데뷔에 가지 못해서 얼마나 아쉬웠는지 모른다고. 진즉에 다 넘겼어야 하는데 일이 많아서 갈 수가 있어야지.”
수안이 강운 그룹 계열사의 경영을 부회장들에게 일임하고 더블 스타, BE 인베스트먼트의 일을 배영성과 이방효에게 넘긴 이유였다. 수안은 앞으로 연하의 경기를 포함해 지원 중인 스포츠 꿈나무들의 경기를 보러 다니며 응원을 이어 갈 생각이다. 경제적인 지원도 당연히 이어질 것이다.
“…….”
배영성은 수안이 피겨에 관심이 있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빠져 있을 줄은 몰랐다.
“…연하가 올해 중3이었죠?”
“응. 안 본 사이에 키가 쑥 컸더라고. 우리 연하가 어디까지 날아오를지 기대되지 않아?”
수안은 고질적인 부상에 신음하고 전용 훈련장이 없어 아이스하키 링크를 빌려 연습하던 때 보여 준 연하의 눈물을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엔 발에 잘 맞지도 않는 스케이트화 때문에 고생했지만….
지금은 발에 꼭 맞는 고가의 맞춤 스케이트화를 신고 피겨 전용 아이스 링크에서 마음껏 훈련하고 있었다. 수인이 해 줄 수 있는 모든 지원을 받고 항상 최적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중이다. 캐나다에서 데려온 코치를 포함한 지원팀도 마음에 든다고 하니 앞으로 남은 것은 우승뿐이었다.
“현재까지 허리, 발목을 포함한 관절 부상도 없어. 앞으로도 없을 예정이야. 게다가 최신 훈련 장비가 가득이라 실력도 쑥쑥 성장하고 있지. 흐흐흐. 이거야말로 성덕 아니겠어? 움화화화.”
“…….”
이 정도로 빠져 있다면 말릴 방법은 없었다. 그래도 나쁜 쪽으로 빠지지 않은 것이 어딘가. 배영성은 언제든 문제가 생기면 보고할 수 있다는 데에 위안을 얻었다.
“회장님 본인이 스포츠 영웅이라는 점을 상기하셨으면 좋겠습니다. ”
“나? 나야 소 뒷걸음질로 쥐 잡은 격이고.”
“…….”
올림픽 단거리 육상 3연속 제패를 본인 입으로 저렇게 말하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더하겠는가.
“오랜만에 우리 연하 연습하는 모습이라도 보러 가야겠다. 배 부회장은 일 보러 가. 난 이제 여유가 좀 생겼으니까 집에 가서 아빠 노릇 좀 하고 우리 꿈나무들이 잘 크게 응원하러 갈게.”
“…예. 그러십시오. 일은 저희가 맡아서 진행하겠습니다. 이러려고 진급시켜 주신 것 아닙니까.”
“역시 배 부회장이 예리해. 하하하. 아! 그리고 강운 그룹에서도 승진해야지?”
“별 의미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배영성이 회장의 최측근이라는 사실은 강운 그룹 내부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전무에서 승진해도 일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회장 대행을 전무가 하면 면이 안 서잖아. 사장으로 하자. 앞으로 부회장 승진 인사가 많아서 티도 안 나.”
“…직급만 다는 정도라면 뭐. 어쨌든 감사합니다. 여기저기서 승진이네요.”
더블 스타에선 회장으로 올라서고, 강운 그룹에선 사장으로 올라서게 된다. 승진에 따른 연봉의 인상이 예상되지만, 월급이 올랐다고 좋아할 정도로 보유 자산이 부족하지 않았다.
“그럼 나 먼저 퇴근한다. 수고.”
“옙.”
이후 수안은 정원, 나현, 시원과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연하의 경기가 열리는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내며 피겨에 큰 관심을 두고 있음을 알렸다. 덕분에 연하는 주니어그랑프리부터 언론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고, 관심에 어울리는 결과(우승 혹은 1위 혹은 금메달)를 보여 주며 화답했다. 올포디움의 역사는 이미 시작되었다.
사진과 함께 연하의 기사가 올라오기도 했다.
수안이 방금 경기를 마친 빙상을 향해 인형을 던지는 사진이 찍히기도 했고, 기쁘게 웃고 있는 수안이 찍히기도 했다. 또한 양손 봉지에 가득 빵을 들고 연하를 기다리고 있는 사진도 있었다.
주인공인 피겨 선수보다 수안의 사진이 더 많다는 점이 아직도 식지 않은 육상 영웅의 인기를 실감하게 해 줬다. 그 외에도 수안이 나온 사진은 더 있었다. 아들 정원이를 데리고 걷는 사진이나 둘이 함께 응원하는 사진이었다. 보통 경기장에 갈 때는 아들 정원과 함께 방문했었기 때문이다.
수안은 집에서 연하의 기사를 검색하며 주인공 연하보다 자신들의 사진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연하 사진은 대체 언제 찍는 거야?”
“아빠. 우리가 없어야 누나 사진이 찍히려나 봐.”
아빠 무릎에 앉아 같이 기사를 확인하던 정원이의 말이다.
“그래야 하나?”
“우리가 너무 자주 가긴 했지. 누나 연습하는 날에도 자주 가서 인사했잖아.”
“흠. 앞으론 조금 줄여 볼까?”
“힝. 그래도 아빠랑 같이 가는 거 재미있었는데.”
아빠와 함께하던 시간이 줄어드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피겨만 경기는 아니지. 수영 대회도 있거든. 골프 대회도 있고, 승마 대회도 있지. 정원이는 아빠랑 축구도 보러 가야 해. 아빠랑 다 같이 다니자.”
“오예!!”
[강수안 회장의 스포츠사랑은 여전해.]
[스포츠 꿈나무의 희망. 전 방위로 스포츠 인재를 지원하는 강운 그룹.]
수안의 행보는 기사를 통해 항상 전해지고 있었다.
* * *
오늘 뉴월드 호텔 그랜드볼륨은 화려하게 치장하고 손님 맞을 준비를 끝냈다. 특별한 결혼식이 열리기로 했기 때문이다.
“신부대기실부터 가볼까?”
“당연하죠. 신부가 쌍둥이라면서요?”
“사진으로만 봤는데, 정말 닮았더라.”
“전 확실히 구분할 수 있을걸요?”
“쉽지 않을걸?”
“두고 봐요. 제 눈썰미가 얼마나 좋다고요.”
창수, 창식 형제의 결혼식엔 정·재계에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총출동했다.
이제 국회의원이 된 강운모 전 회장과 현 회장인 강수안은 참석자 중에서도 VIP에 속했다. 게다가 한송 그룹과 형제지간이 아니던가.
보기 드문 형제의 합동 결혼식이었다. 신부 측은 쌍둥이였고, 신랑 측은 형제지간이라 합동 결혼식으로 결정됐다. 겹사돈이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먼저 신부를 만나고 온 수안은 입구에 서 있는 창수와 창식 형제에게 인사했다.
“여~ 형님들. 식장 들어가서 서로 신부 바뀌면 안 된다. 신부 잘 골라잡아야 할걸?”
“푸흐흐. 야. 안 그래도 헷갈려 죽겠다.”
“화장 때문에 얼굴에 점도 안 보여. 크흐흐.”
수안 옆에 서 있던 아현도 인사를 건넸다.
“축하드려요. 가서 신부 뵙고 왔는데 정말 두 분이 닮으셨던데요? 예쁘기도 예쁘시고요.”
자신만만했던 아현은 둘을 쉽게 구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제수씨. 우리 수민이가 훨씬 예뻤을 건데요?”
“아무리 그래도 수정 씨가 예쁘지 인마. 맞죠? 제수씨.”
“…두 분이 너무 닮아서.”
“형. 원래 집안에서 둘째 인물이 더 좋은 거야. 날 보라고.”
“아니. 내 말이 맞아. 너보단 내가 나으니까, 수정 씨가 더 예쁜 거야.”
“결혼식 날까지 장난치지 말고 무게 잡아. 오늘 외부에서 손님 많이 온다. 알지?”
“아버지 얼굴에 똥칠할 수는 없지.”
창식의 말에 창수는 또 타박이다.
“너만 조심하면 돼 인마. 똥칠이 뭐냐?”
“형이나 조심하지?”
“워워. 그만들 해. 밑에서 아버지 금방 올라오실 거야.”
“숙부님?”
“밑에서 백부님하고 잠깐 얘기 중이셔.”
동생이 도착했다는 말에 얼른 밑으로 내려가 맞이한 강병모 회장이다.
“넌 얼른 들어가기나 해. 너랑 얘기하니까 자꾸 우리가 풀어져.”
“맞아. 다 네 탓이야.”
“얼씨구. 이젠 별걸 다 내 탓이래?”
“여보. 들어가요.”
아현의 말에 수안은 손을 들어 인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갔다고 쉴 수 있는 건 아니다. 수많은 사람이 수안에게 인사하러 다가왔기 때문이다.
“어이구. 박 회장님이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제가 인사하러 갔어야 했는데요.”
“하하하. 내가 너무 일찍 왔나 보구만. 그래도 강운 그룹 회장을 만났으니 남는 장사야.”
.
.
.
“드디어 형님 자식들이 장가를 가네.”
“그러게 말이다. 이런 날이 오긴 오는구나.”
운모와 병모 형제는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대화 중이었다. 누가 보면 얼굴도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라 생각할 법했다.
“애들 키우느라 고생 많았소. 형님.”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나 진짜 고생 많았다. 지금까지 저놈들이 친 사고를 생각하면…. 아휴.”
군대에 가기 전에 두 형제가 저지른 일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했다.
“하하. 그래도 조카들이 이제 제 몫은 하잖수.”
“그렇지. 한참이나 나이 처먹고 나서야 철이 들더라.”
“창수랑 창식은 좀 빠르지. 형님은 더 늦었는데 뭐.”
창밖을 향했던 고개가 획 꺾여 운모를 향했다.
“뭐 인마?! 내가 뭘 늦어?”
“푸하하. 애들 성격이 다 어디서 왔겠어? 다 형님 닮아서 그렇지.”
“그런 너는? 뭐 수안이가 널 닮기라도 했냐? 수용이는 확실히 널 닮은 것 같긴 하다만….”
“…수안이는 나도 안 닮았지만, 제 엄마도 안 닮았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녀석이지. 내가 병원에 없었으면 애가 바뀌었다고 생각했을걸?”
아내조차 수안이 누굴 닮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곤 했었다.
“올라가자. 이제 사람들 몰려올 거다. 엄청나게 많이 올 거야.”
“내가 반절 맡으면 되지?”
“그래도 형제라 이거냐?”
“당연하지. 지수도 곧 와서 손님 받을 거야. 이럴 때 범 강운 그룹의 힘을 자랑해야 하지 않겠어? 지금은 수안이가 혼자서 상대하고 있겠네. 얼른 갑시다.”
운모와 병모의 여동생인 뉴월드 그룹 강지수 회장을 말함이다.
“큼. 그래. 그래…. 올라가자.”
괜히 울컥한 형을 보며 운모가 말했다.
“에헤이. 나이 들면 눈물이 많아진다더니, 형님 늙었어?”
“야. 그럼 내 나이가 젊냐? 내일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나인데?”
“아직 창창하니까 그런 소리 하지 말고 갑시다.”
“같이 가. 내 아들들 결혼식이야!”
“빨리 오쇼. 나이 먹은 티 내지 말고.”
“에라이. 너랑 나랑 몇 살이나 차이 난다고 그래?”
.
.
.
창수, 창식의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신부의 아버지는 양쪽에 두 신부의 팔짱을 끼고 버진 로드를 걸었다.
그리고 신랑이 입장해 신부를 인계받을 시간이 되었다.
“…….”
“…….”
수안의 걱정대로 누가 자신의 신부인지 몰라 당황한 두 사람 덕분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기도 했다.
“수정이… 맞지?”
“전 수민인데요?”
“아. 처제 미안.”
창수는 얼른 다른 신부에게 향했다.
당연히 창식이 돌아와야 맞는데, 벌써 창식은 신부와 팔짱을 끼고 있었다.
“형. 왜?”
“이쪽이 수정 씨라고 들었는데?”
“……!”
“형부. 제가 수민이거든요?”
“아녜요. 제가 수민이 맞아요. 형부.”
그 말에 창식도 팔짱을 풀고 창수 옆으로 가서 섰다. 누가 자신의 신부인지 알 수 없었다.
“윽! 그럼 수정인 어디 있는데?”
“누가 진짜 수민이지?”
-진짜 자신의 신부는 누구인가. 지금 선택이 평생을 좌우합니다. 누구도 믿을 수 없어요. 신랑은 진짜 자신의 신부를 선택하셔야 합니다. 흥미진진합니다! 저기 신부 옆에 서 계신 아버님도 확실치 않은 눈치예요! 이거 답이 없습니다!
사회자가 신부를 헷갈린 신랑들을 보고 말하자 손님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와하하하.”
-신랑 한쪽으로 갔습니다! 맞췄나요? 신부. 자신의 신랑이 맞으면 머리 위로 동그라미 그려 주시고…. 아. 땡입니다. 신부가 아니랍니다. 동생분도 틀렸으니 얼른 자리 바꾸세요.
혼돈의 신부 찾기가 끝나고 절차대로 식이 진행되었다.
신랑과 신부가 신랑 측 부모님께 인사할 때 강병모 회장은 터진 울음을 감추지 못했다.
보통 결혼식에선 신부 측 어머니가 눈물을 보이는 일이 많았는데, 강병모 회장 덕분에 곁에 있던 회장의 아내도 눈물을 줄줄 흘려 신랑 측만 눈물바다로 변했다.
“아이고. 형님은 왜 저런다니.”
“좋은 날이라 그렇지 여보.”
강운모 부부 뒤에서 수안과 아현도 같은 주제로 대화했다.
“당신도 나중에 우리 애들 결혼시키면 저럴까?”
“음…. 정원이랑 시원이는 모르겠는데, 나현이는 확실히 안 울어.”
“왜?”
“나현이는 평생 아빠랑 살기로 했거든.”
“헐.”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고 했어.”
그 말에 옆에 있던 수현과 수진이 한마디씩 했다.
“오빠 그건 너무했다. 우리 나현이 불쌍해서 어떡해?”
“그래. 미리부터 그렇게 교육하지 마. 듣기만 해도 아찔하네.”
수용도 마찬가지였다.
“형은 지금부터라도 정을 떼야 하지 않을지….”
“내 자식이랑 왜 정을 떼냐? 진짜 나현이가 아빠랑 살겠다고 했다니까 그러네.”
형제가 대화하는 중에도 결혼식은 정상적으로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