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 개편의 이유
혼돈의 결혼식
남은 한 놈
자유연애
밝혀지는 실체
급 진전
첫인사
당당한 출사표
K-Daughter
스파크
형제의 비극
용돈과 선물
곡소리
냉탕과 온탕(feat. 충성!)
까다로운 조건
Ending & Restart
하이브리드
Come Back
흙 묻은 양말
돌아온 탕자
3월 11일
제자리
X 5
조직 개편의 이유
IMF 이후 거대하게 성장한 강운 그룹이다. 자동차와 금융, 전자와 무역,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건설과 중공업, 유통, 호텔, 방송사, 패션, 제과 등. 너무 많은 계열사가 존재했다. 수안은 회장이 되고 나서 지금까지 모든 계열사를 관리하려 애써왔지만, 1인의 힘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대한 강운 그룹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려면 힘의 분산밖에 답이 없었다.
그런 이유로 배영성이 수안과 강운 그룹 개편안을 손보고 있었다. 각 계열사에 부회장을 두고 오롯이 관리하도록 만드는 개편안이었다. 여기에 강운 생명 과학이 강운의 새로운 그룹사로 출범하면 새로운 부회장 TO가 생겨난다. 김현성이 이미 바이오 업무를 보고 있었으니 이번에 승진 기회를 주는 것이다. 또한 그룹사를 맡길 인물은 변치 않는 신뢰가 필요했기에 새로 인수한 기업의 사장들에겐 기회를 줄 수 없었다.
“회장님이 박힌 돌이라도 빼내실 줄 알았나? 기존 계열사 사장들은 김 사장보다 더 일찍 회장님을 모셨어. 경영 능력도 출중하지. 계열사를 그룹으로 묶어서 가장 중요한 계열사 사장을 부회장으로 임명하고 각자 그룹사를 이끌도록 할 예정이야. 자네도 그중의 하나가 되는 거고.”
“아!”
“그리고 난 본사 전무잖나. 회장님을 곁에서 보필하는 사람인데 직급이 높을 이유가 없지.”
배영성의 직급이 사원이라도 계열사 대표들은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다. 배영성이 전하는 말은 곧 수안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이다.
“따르겠습니다. 회장님.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부려 먹겠다는 뜻이야. 올해부터는 더블 스타에서도 부회장으로 일해. 겸직 알지?”
김현성은 또 배영성의 눈치를 봤다. 배영성이 부회장인데 자신까지 부회장을 맡아도 되는가 싶었기 때문이다.
수안은 뻔히 그 모습을 보고도 다른 말을 먼저 시작했다.
“그리고 배 부회장은 펜타그램을 더블 스타에 합병시켜. 회사 많아 봐야 관리만 힘들어.”
수안에겐 강운 그룹이 전부가 아니다. 국내에 더블 스타와 펜타그램이 있었고, 미국과 일본에도 BE 인베스트먼트와 산하 기업들이 즐비했다. 펜타그램을 흡수하는 것도 경영 효율화의 일환이었다.
“이 부장하고 심 실장이 만세를 부르겠습니다.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처음 더블 스타에서 일하다가 도청 사건으로 회사에서 쫓겨났던 둘이다. 이번에 돌아가면 금의환향이라 할 수 있었다.
“같이 일하던 직원들과 직급 차이가 너무 나면 안 될 텐데 말이야.”
이채환은 10년 전에 더블 스타 총무팀 대리로 퇴직했지만, 지금은 총괄관리부 부장을 달고 있었다. 같은 시기에 입사한 직원들은 이제 막 차장으로 올라선 더블 스타 직원은 가장 높은 직급이었다. 그나마 이채환은 한 단계만 차이가 있었지만, 심미진은 조금 심하다. 사원으로 퇴직했지만, 지금은 해외 파트를 담당하는 기획조정실 실장을 달고 있어 두 단계 이상의 차이가 있었다.
“펜타그램에서 일을 도맡아 한 직원들입니다. 당시와 하는 업무도 달라졌고, 합병해도 사무실이 분리되어 있으니 크게 염려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더블 스타 산하에 계열사가 얼마나 많던가.
지금은 강운 전자로 넘어갔지만, 예전엔 팬탁까지 산하에 있었다. 팬탁이 아니라도 거대한 계열사가 많이 남아 있다. SJ 컴퓨터는 여전히 잘 팔리고 있었고, SJ 컴퓨터 대리점은 종합 전자 쇼핑몰로 전환해 강운, 삼디, GL 등. 국내 모든 가전 제품을 취급하며 지역의 중요 거점으로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한컴 소프트와 안랩 연구소에서 공급하는 컴퓨터 소프트웨어 또한 시장에서 엄청난 점유율을 유지하는 중이다. 공정계약으로 유명한 더블 엔터테인먼트와 SN 엔터테인먼트는 연예계의 공룡이라 불릴 정도로 거대 기획사의 면모를 보이고 있었으며, 다움과 네이보는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절대자로 군림하는 중이다. 당시 자잘했던 벤처 게임 회사들도 지금은 본사 빌딩의 작은 사무실에서 벗어나 번듯한 사옥을 매입, 영업을 이어 갈 정도로 성장했다.
인수한 세기 통신은 강운 전자의 K폰 인기에 힘입어 시장 점유 35%를 넘기며 순항하고 있었고, 마지막으로 대현 그룹에서 인수한 하이닉스는 엄청난 자본금 투여로 이제 정상적인 기업 운영이 가능해졌다.
이 모든 계열사를 인수해 정상적으로 끌고 갈 수 있었던 힘은 본사 직원들에게 있었다. 수안은 본사 직원들에게 배 아픔을 선사할 수는 없었다.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 법이야. 더블 스타 본사 직원들도 지금까지 수고 많았으니까 적절한 보상이 지급되도록 해 줘. 지금부터는 소유한 계열사를 어떻게 운영하느냐가 관건이야. 그러려면 본사 직원들에게 소속감을 느끼게 해 줘야지. 소속감은 내 회사에서 날 대우해 줄 때 느끼는 법이야.”
“올해 승진 인사가 엄청나게 늘어나겠습니다.”
“배 부회장도 벌써 5년이야. 이번에 나는 명예 회장으로 돌리고 더블 스타 회장으로 올라서.”
배영성도 대충 짐작하고 있었기에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김현성이 큰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가….”
“배 부회장 승진한다는데 왜 김현성이 감사 인사를 해? 저 봐. 배 부회장이 말할 타이밍을 놓쳤잖아.”
“하하. 왠지 마음이 놓여서 그랬습니다.”
배영성과 동급으로 올라선다는 것이 내심 마음에 걸렸던 김현성이다.
“지금까지 김 사장이 혼자 다 맡아서 했으면서 뭘.”
“아휴. 아닙니다. 부회장님이 경영을 잘하셔서 그렇습니다. 저야 숟가락만 얹어서 승승장구합니다.”
“이 사람아. 내가 자네한테 얼마나 배우는데 또 그 소리야?”
“이런 두 사람이라 내가 맡길 수 있는 거야.”
“…….”
“…….”
배영성은 지금까지 나온 수안의 말들을 종합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안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있었다.
강운 그룹을 그룹사로 분리해 부회장을 세우고, 펜타그램을 더블 스타에 산입한 다음 더블 스타 회장직을 자신에게 넘겼다. 가장 중요하다고 했던 바이오 사업은 김현성에게 맡겼고, 그다음 중요하다고 했던 샤롯 그룹의 일은 자신이 맡고 있었다.
그럼 수안에게 남는 것은 BE 인베스트먼트 하나였다.
“회장님. BE 인베스트먼트가 큰일을 앞두고 있습니까?”
“어. 있지. 하여튼 배 부회장은 여전히 머리가 팽팽 돌아가네.”
2004년 미국이 경제 활성화를 위해 저금리 정책을 종료하면서 미국의 부동산 버블이 꺼지기 시작한다. 서브 프라임 모기지론 금리가 올라가며 저소득층 대출자들이 원리금을 갚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증권화되어 거래되는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을 구매한 금융 기관들이 대출금을 회수하지 못해 손실이 발생하기 시작하며 이 과정에서 여러 기업의 부실이 이어진다. 대형 금융사와 증권 회사의 파산이 이어지면서 세계적인 신용 경색이 촉발되며 이는 실물 경제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미국 금융 시장에 이른 타격이 이후 세계 금융 위기로 꽃을 피우는 것이다.
“…….”
배영성의 걱정스러운 표정에 수안은 손을 내저었다.
“아직 시간은 있어. 조금 걱정되는 수준이지. 위험이 예상되는 일이라 BE, 골드만삭스, 모건 스탠리에서 엉뚱한 상품을 거래하지 않게 하고 미리 미국 정부에 위험을 경고하는 정도?”
“엉뚱한 상품이라 하심은….”
“미국의 주택 담보 대출 금융 상품 말이야. 작년에 미국 저금리 정책이 끝나 버렸잖아. 지금까지는 주택 가격이 쭉쭉 올라서 버텨왔지만, 앞으론 빚을 갚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올 것 같아. 걔들은 버는 족족 써 버려서 대출 못 갚아. 우리나라 사람들과 다르지.”
미국에서 모기지론으로 불리는 주택 담보 대출은 몇 가지 등급으로 나눠진다. 안정적인 직장과 높은 급여와 충분한 은행 잔고를 갖고 있는 사람이 대출을 받는다면 프라임 모기지로 불리고 바로 그 아래 수준은 Alt-A로 불린다. 그리고 열심히 일해야 갚을 수 있겠다 싶은 사람의 대출을 바로 서브프라임(Sub-Prime) 모기지라고 불렀다.
클린턴 정권인 2000년대 초부터 시작한 ‘2조 달러 주택금융자금 지원사업’이 부시 정부까지 이어져 왔고, 주택을 쉽게 갖게 해 주겠다는 호의적인 정책이었다. 덕분에 주택 시장의 붐이 조성되고 주택 가격이 지속적으로 성장했기에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부실화되기 전까지는 좋은 정책으로 평가되었다.
국가마다 소비와 저축 패턴에 많은 차이가 있었는데, 미국의 경우엔 현재의 삶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했다. 한국의 경우 미래를 위해 저축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성향 차이는 대출금 상환이라는 압력에서 극명하게 다른 결과를 보인다.
“회장님은 그 위험이 어디까지 영향을 주리라 예상하십니까?”
김현성의 가벼운 물음에 수안은 무서운 말을 내뱉었다.
“세계 금융 위기.”
“……!!”
“……!!”
“…아직 회장님의 시야를 따라가려면 멀었네요.”
“따라오긴 뭘 따라와? 척하면 척이지.”
* * *
본사로 돌아온 배영성이 수안에게 자세한 설명을 부탁했다.
“회장님. 아까 말씀하신 세계 금융 위기는 그냥 나온 말씀이 아니시겠죠?”
“맞아. 실제로 발생했던 일이야.”
2001년 연방 준비 제도 이사회(Fed)에서 미국 국채에 대한 정책을 바꾸겠다고 시사했고, 이후 전 세계의 투자 은행은 새로운 저위험 고소득 투자처를 찾기 시작한다. 그들이 찾아낸 것은 바로 CDO(부채 담보부 증권)이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이 증권화되어 만들어진 것이 바로 CDO였으니,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이 부실화하면 연쇄적으로 영향을 주게 된다.
“BE도 위험합니까?”
“내가 있는데?”
수안이 있는 한, 수안이 모르는 2020년 이후가 오지 않는 한 BE가 위기와 부실에 직면할 가능성은 없었다.
“회장님이 계셔서 다행입니다.”
“솔직히 이번에 다가올 세계 금융 위기를 활용하면 BE는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위치까지 올라갈 수 있을 거야. 거대 보험사와 증권사, 은행이 줄줄이 파산할 테니까.”
“회장님은 원치 않으신다는 말씀이군요.”
“그렇다고 희생정신을 발휘할 생각은 없어. 도덕적 해이가 만연한 동네에서 BE만 성자 노릇을 할 수는 없는 일이잖아. 미국 정부와 연방 준비 제도 이사회에 충분한 경고를 전하겠지만, 거기까지야. 나머지는 부시 정부에서 감내할 일이지.”
“미국에선 어떻게 받아들일지….”
“…받아들이든 안 받아들이든 저들 탓이지.”
사전에 미국 정부에 위험을 경고하고 경고한 대로 움직일 생각이다. 세계 투자 회사 모두가 거래할 CDO(부채 담보부 증권)를 거래하지 않는 건 하수나 할 일이다. BE 인베스트먼트와 관련 금융 회사는 Alt-A등급 이상의 상품을 위주로 거래할 것이다. 수익률이 높은 대신 리스크를 안고 있는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관련 상품은 위기를 감지하지 못한 금융사들이 거래하도록 놔둬야 했다.
“미국 정부에만 경고하진 않을 거야. 일부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금융사엔 따로 언질을 해 주고 위험을 회피하도록 도와줄 생각이고.”
“BE의 영향력이 더 커지겠습니다.”
“맞아. BE의 내실은 다졌으니 외부로 영향력을 확대할 타이밍이야. 그 와중에 금융사 하나 정도는 더 인수해도 좋겠다 싶어. 안 그래도 골드만삭스와 모건 스탠리를 통합 금융사로 묶고 싶었거든. 여기에 보험사 하나가 추가되면 좋겠지? 흐흐.”
“BE와 비등한 수준의 종합 금융사가 탄생하겠는데요?”
마지막 단추인 보험사를 인수하는 시점엔 BE가 상당한 지분을 확보한 다음일 것이다. 골드만삭스와 모건 스탠리가 보험사까지 더해 종합 금융사로 탈바꿈하면 해당 금융사는 BE의 소유나 마찬가지가 된다. 각 회사의 지분이 각자 자산 규모와 평가 금액에 따라 희석되겠지만, 합병할 회사 전부에 지분을 가진 BE는 지분이 희석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방효 사장과 차진호 사장이 합심해서 절차대로 진행할 거야. 나야 국내에서 지켜보면서 팝콘이나 씹어야지.”
“…BE로 가실 생각 아니셨습니까?”
수안은 엉뚱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되물었다.
“내가? 애들 두고 내가 왜 BE로 가?”
“바이오를 김 사장에게 맡기시고, 샤롯 그룹의 일도 제게 맡기시고…. 강운 그룹은 전문 그룹사로 전환해 부회장을 임명한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게다가 더블 스타까지 제게 회장 자리를 맡긴다고 하셨으니….”
“그랬지. 그래서?”
“회장님이 국내 주요 업무에서 발을 뺀다고 하셔서 BE로 가신다는 뜻인 줄 알았습니다. 미국에서 미 정부나 연방 준비 위원회와 협의하시면서 일을 진행하실 계획이 아니셨습니까?”
“무슨 소리야. 나 미국 안 가. 올해 연하가 주니어그랑프리 출전한다고 했어. 이후에도 계속 연하 따라다닐 건데?”
“연하요? 피겨 김연하요?”
수안의 원대한 계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