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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수 (257/304)

비수

-오빠가 진태 씨를 뭐 하러 불러?

따지듯 묻는 수현의 말에 수안은 기가 찬다는 투로 대답했다.

“진태가 쪼르르 달려가서 고자질하던? 나 참.”

-…진태 씨한테 전화했는데 꺼져 있어서 내가 캐물었다. 왜!

“전화기가 꺼져 있으면 그런가 보다 해야지. 캐묻긴 뭘 캐물어?”

-오빠가 나 같으면 걱정 안 하겠어? 그 사람이 어디 보통 사람이야?

언니에겐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매일매일이 노심초사였다.

“너도 앞날이 캄캄하다.”

-불러서 뭐라고 했는데? 왜 이 사람은 오빠만 만났다고 하고 무슨 얘길 했는지는 왜 말을 안 해 줘?

“매제가 얘기 안 했어?”

-매제? 벌써 무슨 매제야? 어머머. 오빠 너무 급해.

그래도 싫다는 투가 아니다.

“결혼 안 하려고? 연애만 할래?”

-하, 하긴 해야지.

“빨리 집에 인사하러 오고 날짜 잡으라고 불렀어. 오빠가 네 애인 잡아먹냐? 오빠가 뭘 어쩔까 봐 난리야?”

-괜히 걱정돼서 그랬지. 흠흠. 안 그래도 곧 갈 생각이었는데 뭐.

“으휴. 다음 주 수요일에 한국대 특별 강연에도 오라고 했으니까 너도 와.”

-이번엔 오빠가 강연하나? 나도 강연 마지막에 도와줘?

“난 강연 같은 거 안 해. 클린턴 불렀어.”

-…그 사람이 부른다고 오는 사람이었어?

“박재문 대통령도 올 거고 아버지도 오신다고 했어. 클린턴 온다니까 다 몰려온다네.”

-아버지도? 그런 자리는 좀 부담스러운데….

“어쨌든 너도 오는 거다. 진태 옆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

-자, 잠깐. 그러다 스캔들이라도 나면 어쩌라고? 같이 가도 떨어져 앉게 해 줘야지!!

연애하면서도 기자들 눈에 띄지 않으려 얼마나 노력했던가. 지금 수안의 말대로 했다간 그런 노력이 모두 물거품으로 변한다.

“곧 결혼도 할 텐데 언제까지 숨겨? 미리 군불을 때 줘야 사람들이 둘이 연애를 했다고 생각할 거 아냐?”

-어휴. 태평양 오지랖 진짜.

수현은 자신의 결혼 상대를 골라 준 것도 모자라 연애 기사까지 챙기는 오빠의 참견이 과도하게 느껴졌다.

“싫으면 말고. 재벌가 딸, 그것도 강운 그룹 강수현이랑 만난다는 소문이 언론으로 전해지면 진태 걱정은 할 필요도 없을 텐데….”

-가, 가야지! 내가 가서 얼굴을 비춰야지!

거기까지는 생각할 수 없었던 수현이다. 수현이 그의 연인이라는 사실이 기사로 알려지면 여자 연예인이든 일반인이든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오빠가 생각 없이 일을 벌이겠니? 옆에 앉아 있기만 해도 알아서 예쁘게 기사까지 써 주려고 했는데 말이야. 뭐? 태평양 오지랖?”

-알았어. 진짜 미안!

“진태한테도 미리 다 얘기해서 오케이 사인받았고, 진태 소속사도 알아서 정리해 주겠다는데 오지랖? 앙?”

-내가 다 잘못했음! 제가 죽을 죄인입니다. 오라방!

“오케이. 그럼 한 가지 더!”

-말씀하시와요. 오라버니.

“진태한테도 얘긴 했는데, 너도 애 안 생기게 조심해 이것아. 덜컥 임신하면 너 진짜….”

-야! 이 오지라퍼가 어디까지 신경 쓰려고 그래? 끊어!!

“…….”

‘이런 반응이 정상적이긴 하지.’

뚝 끊어진 전화를 잠시 보다가 내려놓은 수안은 다시 읽던 보고서에 집중했다. 수안의 차량 앞으로는 여전히 붉은 미등이 도로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집에 도착하려면 아직도 멀었다.

* * *

[전격 방한. 클린턴 전 미합중국 대통령.]

[한국대 특별 강연 중인 클린턴 전 대통령.]

[굳건한 한미동맹 재확인. 클린턴과 박재문 대통령.]

[김대준 전 대통령과 클린턴 전 대통령의 만남 성사.]

[강운 그룹이 초청한 클린턴 전 대통령. 강운모 의원의 존재감 빛나.]

[주가 지수 소폭 상승. 클린턴 효과.]

클린턴 전 대통령이 방한해 있는 동안 어느 신문이나 클린턴 전 대통령의 움직임을 헤드라인으로 기사를 써 내렸었다.

클린턴 내외는 강운 그룹의 꼼꼼한 의전에 상당히 만족스러워했다. 외부엔 버거운 일정처럼 보여도 둘은 무리 없이 일정을 소화했다. 강운 그룹 비서실이 총동원되어 입속의 혀처럼 그들을 보살펴왔기 때문이다.

[클린턴 전 대통령 내외 국내 관광 나서….]

[경복궁과 한옥을 구경 중인 클린턴과 미연방 상원 의원 힐러리 클린턴.]

[한식을 맛보고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린 클린턴.]

[선물 받은 한복을 입고 미소를 보인 클린턴 전 대통령 내외.]

[서울시 초청으로 진행된 행사에서 서울시장과 면담하는 클린턴.]

기사에 나온 사진은 관광에 나서며 잠시 멈춰 사진을 찍을 시간을 주거나, 일정 중에 직원들이 요구하는 자세를 잠시만 취해 주는 것으로 끝이었다. 일정 또한 강운 그룹 비서실에서 최소한의 동선으로 만들어 뒀기에 차를 타고 오래 이동할 일도 없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알아서 움직여 주는 비서실이 마음에 들었는지, 클린턴이 비서실 직원 몇 명에게 같이 미국으로 갈 생각이 없느냐는 농담까지 건네곤 했었다. 미모가 아름다운 여성들만 그 말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그녀들은 작은 미소로 정중하게 거절했다. 클린턴을 따라갔다면 특별한 경험을 했을지도 모른다.

“기사 잘 뽑았네. 수고했어.”

“기사는 잘 나왔지만, 저는 회장님 이름이 거의 나오지 않아서 좀 아쉽습니다.”

클린턴을 초청한 것도 수안이고, 모교에 거액의 장학금을 쾌척한 것도 수안이다. 일의 계획부터 마무리까지 모두 수안의 손에서 이루어졌는데, 언론은 정치인만 주목하고 있었다.

“내 이름은 더 나와서 뭐 하게? 내가 정치를 할 것도 아니고.”

“그렇긴 하죠.”

며칠간의 사회·경제면 사진에 클린턴 전 대통령, 박재문 대통령과 아버지가 보인다. 수안은 카메라 프레임 너머에 있었다. 기사 내용에도 수안의 이름은 일부러 찾지 않는 이상 눈에 띄지 않을 지경이다.

기사 어디에도 보이지 않지만, 수안은 클린턴 내외와 모든 곳에서 함께하고 있었다. 카메라가 없는 곳에서는 수안이 클린턴 내외와 가장 친밀한 사람이었다. 수안은 클린턴과 서울시장의 만남까지 주선하며 톡톡히 점수를 땄다. 물론 클린턴이 아니라 서울시장 이현창에게 땄다는 말이다.

수안은 클린턴과 단독 만남을 주선한 날에 이현창과 통화했었다.

.

.

.

-내가 후배님 덕에 미국의 전 대통령을 단독으로 만나 봤어. 허허허.

“나중에 대선에서 한 컷 쓰실 수 있겠죠?”

-물론이지. 미국 정부와 친밀한 대선후보 이현창! 캬~ 이거 죽인다. 사진에 클린턴 내외뿐만 아니라 자네도 함께 나왔으니 양쪽에 거물이 있네? 하하하.

클린턴은 미국의 전 대통령이라는 타이틀이 있으니 거물임은 틀림없었다. 게다가 수안은 여전히 포브스지에서 세계 제일 부자로 거론되고 있는 기업가 아니겠는가. 수안이 거물이 아니면 누구도 거물이라고 할 수 없었다.

“사진은 나중에 저도 보내 주실 거죠?”

-그래야지.

“비서실로 보내 주세요. 그럼 전 회의 때문에 들어가 보겠습니다.”

-어. 그래. 시간 나면 술 한잔하러 오고.

“예. 선배님.”

.

.

.

그때 찍은 사진은 벌써 액자에 담겨 수안의 집무실 한편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클린턴과 힐러리 그리고 이현창과 수안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외부에 유출하지 않은 사진은 이렇게 수안의 집무실에 존재감을 보이고 있었다.

사회·경제면을 지나도 여전히 관련 기사가 눈에 띈다.

[선남선녀의 첫 만남. 특강은 나 몰라라.]

[배우 이진태와 강운 그룹 강수현 핑크빛 기류?]

[서로 귓속말을 주고받으며 친밀함을 보이는 두 사람.]

[세기의 커플 탄생하나? 연예계가 들썩!]

스포츠와 연예계 지면이었다. 신문뿐 아니라 포털 사이트에도 수현과 진태의 사진이 포함된 기사가 많았다.

“수현이 사진이 잘 나왔네. 이 사진 촬영한 중소 언론사는 따로 더 챙겨 줘.”

“예. 회장님.”

수현이 연예인보다 예쁘게 찍힌 사진 덕분에 둘이 잘 어울린다는 평이 많았다.

“그런데…. 진태 얼굴은 왜 이 모양으로 찍은 거야?”

반면 수현의 곁에 앉아 있던 이진태의 사진은 실물보다 못했다. 직접 실물을 봤던 수안이기에 그 차이가 더 극명하게 인식된다.

“원래대로 잘 나온 것 같습니다만.”

배영성의 눈엔 잘생긴 사진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사진과 영상으로만 이진태를 봐 왔기 때문이다.

“배 부회장. 진태 실물 못 봤어?”

진태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를 보였지만, 수안에게도 진태의 실물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수현이가 괜히 걱정하는 게 아니지.’

“…사진이나 실물이나 다르겠습니까?”

“달라. 실물은 이게 아닌데…. 왜 저렇게 얼빵한 얼굴로 나오는지 이해가 안 가네.”

“회장님 말씀대로면 차라리 잘됐죠. 덕분에 두 사람이 비슷하게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따지면 결과적으로 잘되긴 했지만, 얘는 사진발이 왜 이렇게 안 받지? 어째 죄다 이 모양이야?”

높은 쪽은 알아서 낮춰졌고 낮은 쪽은 올라가서 평준화됐다.

그나마 수현의 미모가 있어서 균형을 맞췄지, 어지간한 상대라면 진태를 상대로 비등하게 보일 수도 없었다.

“앞으로 두 사람은 종종 파파라치 컷으로 언론에 오르내릴 겁니다.”

대중들이 보기엔 파파라치 컷이지만, 실제론 서로 상의가 끝난 화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알콩달콩 사랑을 키워가는 풋풋한 그들의 만남과 러브스토리는 여인들의 연애 감정을 자극할 예정이다.

연예인과 재벌가의 만남은 항상 기이한 거부 반응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방향을 잘 잡아 줘야 긍정적인 반응을 끌어낼 수 있었다.

“괜히 너무 과한 연출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 요즘 사람들 똑똑하잖아.”

자연스럽지 않은 사진이 공개되면 이상한 점을 알아챈 사람들에 의해 역반응이 나올 수도 있었다.

“비서실에서 각별하게 검토하고 내보내겠습니다.”

“오케이. 그리고 신라 일보는 어떻게 진행 중이야?”

아버지께 무례한 태도를 보였던 신라 일보 기자의 일을 대처하기 시작한 강운 그룹이다. 강운 그룹 전 계열사와 강운 그룹과 거래하는 업체들이 신라 일보 광고 중단에 동참한 상태였다.

“순조롭습니다. 삼디 그룹과 GL 그룹에서도 동참해 줘서 상당한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스마트폰 기술 제휴라는 막강한 동맹이 이를 가능하게 해 줬다. 삼디와 GL이 나섰으니 계열사와 거래처 또한 동참하지 않겠는가. 강운, 삼디, GL에서 광고를 끊었으니 신라일보는 광고를 채우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변 회장이 똥줄 타겠어.”

“국내 최대 일간지나 다름없는데, 정말 정리하실 생각입니까? 아니면 버릇만 고치는 수준에서….”

“개가 똥을 끊니?”

“…….”

“놈들은 국내 신문이 아니라 일본 신문이라고 생각해. 국익에 도움이 되는 놈들이 아냐. 이번에 확실히 폐간시킬 생각이야.”

본보기는 확실하게 보여야 했다. 하다가 그만두면 얕보이기 마련이다. 그래야 신라 일보에 동조하던 다른 언론사도 몸을 사릴 것이다.

‘회장님은 일본을 너무 싫어하셔. 전생에 독립 운동하다 일본에 당하셨나….’

“예. 회장님. 추가 조치를 진행하겠습니다.”

신라 일보 사주 측에서 계속 연락이 들어오고 있지만, 이들은 수안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배 부회장이 차 사장에게 연락해서 할 일이 있어.”

“일본에서의 일입니까?”

차 사장은 일본 BE 인베스트먼트의 차진호를 말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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